[26슬램게임] '보이지 않는 헌신' 연세대 홍상민 "승리의 순간엔 저도 있을 거예요" (029)

박효진 기자 / 기사승인 : 2026-11-05 11: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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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박효진 인터넷기자] 지금껏 농구 하나를 바라보며 달려온 시간은 이제 프로라는 다음 무대를 앞두고 있다. ‘26슬램게임’은 KBL 드래프트를 향해 저마다의 시간과 가능성을 증명해야 하는 선수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번 주인공은 연세대 4학년 홍상민(200cm, C)이다.

#001_Scan: 연세대 홍상민 

홍상민의 농구 인생은 우연에서 시작됐다. 친구와 동네 코트에서 공을 던지던 초등학교 5학년 홍상민은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양정중 코치의 눈에 띄었다. 그날 이후 그는 6학년이 될 때까지 밤마다 양정중 체육관을 찾았다.


"길거리에서 친구랑 농구 하고 있었는데 코치님이 오셔서 '농구해 볼 생각 없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때부터 양정중에 가서 야간마다 농구했죠. 솔직히 처음엔 영어 학원 가기 싫은 마음도 컸어요(웃음).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농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 늘 있었어요."

다만 엘리트 농구로 가는 길은 곧게 뻗어 있지 않았다. 졸업 후 그는 양정중이 아닌 일반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미 185cm를 넘긴 키는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선생님들은 입을 모아 운동을 권했고, 어느 날 체육 선생님이 반가운 소식을 들고 왔다.

"체육 선생님이 '양정중에서 너 보러 왔다'고 하셔서 엄청 달려갔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알고 보니 농구부가 아니라 럭비부였던 거예요(웃음). 그래서 '저는 럭비 할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엉뚱하게 끝날 뻔한 해프닝은 뜻밖의 기회로 이어졌다. 홍상민의 꿈이 농구라는 걸 알게 된 교감 선생님이 단대부중 농구부 테스트를 신청해 준 것이다. 테스트는 당장 다음 날이었다. 결과는 합격이었고, 단대부중은 홍상민에게 함께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집이 있는 강서구에서 강남구까지 매일 오가야 하는 거리가 걸림돌이었다.

"부모님께서 중학교 1학년이 그 먼 거리를 왔다 갔다 하는 걸 많이 걱정하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제 발로 양정중을 찾아가서 '농구 선수가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렇게 시작하게 됐어요."

여러 가지 길이 있었지만, 홍상민이 끝내 선택한 길은 농구였다. 그러나 엘리트의 길은 생각보다 더 녹록지 않았다.

"너무 달랐죠. 다들 몸싸움을 너무 잘했어요. 일반인들은 골밑슛을 쏘면 가만히 놔두는데, 여기서는 다 블록을 하려고 달려드니까요. '아, 내가 안 되는구나' 싶었어요."

체력 훈련 또한 큰 충격이었다. 처음 떠난 속초 동계 전지훈련에서 홍상민은 트랙을 끝없이 도는 훈련 앞에서 처음으로 농구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냈다. 생각과는 다른 훈련에 흔들리는 홍상민을 붙잡은 건 가족의 한마디였다.

"너무 힘들어서 농구를 관둔다고 한 적도 있어요. 그때 가족들이 '네가 선택한 길이니까 한번 끝까지 해봐라.'라고 해줬어요. 그 말 덕분에 버텼던 것 같아요."


양정중에서 1년을 보낸 뒤 참가한 KBL YOUTH 캠프는 또 한 번의 전환점이 됐다. 캠프 안에서 홍상민을 영입하기 위한(?) 물밑 작전도 펼쳐졌기 때문이다.


"캠프에서 그때 제일 잘 하던 (박)정환이(울산 현대모비스)가 갑자기 저한테 엄청 친한 척을 하는 거예요. 잘하는 친구가 먼저 말을 걸어주니까 좋으면서도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러지?' 싶었죠(웃음). 나중에 알고 보니 코치님이 정환이한테 저를 꼬드겨 보라고 시키셨더라고요. 제가 캠프에 가 있는 사이에 부모님께도 연락이 와 있었고요."

마침 양정중의 사령탑이 바뀐 시점이었다. 더 큰 무대에서 우승에 도전해 보자는 마음으로 삼선중 유니폼을 입었다. 홍상민은 이곳에서 만난 동료들과 합을 맞추며, 삼선중이 매 대회 결승에 진출하는 강호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농구 선수로서의 첫 전리품도 이 시기에 손에 쥐었다. 제56회 춘계전국남녀중고농구 연맹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해 득점상과 리바운드상 그리고 우수상을 한꺼번에 받으며 처음으로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공부를 잘해서 상을 받아본 적도 없고, 상장은 받아봤어도 트로피는 한 번도 없었거든요. 경기는 졌지만 너무 뿌듯했어요. 부모님도 정말 좋아하셨고요. '아, 내가 정말 농구 선수구나'라는 걸 처음 느낀 해였어요."

한 단계 위의 벽을 체감한 것도 이 무렵이다. 중학교 3학년에 막 올라 치른 대학교와의 연습경기에서 홍상민은 처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느꼈다.

"그 전까지는 제가 밀린다는 느낌을 못 받았었고 스스로 괜찮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대학생 형들을 만나고 나서는 진짜 안 되겠다, 너무 세다는 걸 느꼈어요. 그때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을 제대로 하기 시작했어요."

경복고 진학 후 1학년 시즌은 코로나19와 겹쳤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지자, 홍상민은 개인 운동으로 공백을 메웠다. 코트 위 실전은 멈춰 있었지만, 그 사이 팀 안에서는 끈끈한 유대가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홍상민은 농구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주저 없이 고등학교 2학년을 꼽았다. 전 학년의 호흡이 유독 잘 맞았던 해였다.

"다들 자기가 빛날 수 있는 3학년 때가 제일 재밌다고 하는데, 저는 2학년 때가 제일 재밌었어요. 형, 동생 사이에 지킬 건 지키면서도 장난칠 때는 정말 재밌게 놀았어요. 힘든 훈련을 해도 저희끼리 웃었고요. 그때 사진을 보면 저 혼자 찍은 사진이 없어요. 항상 옆에 누군가가 있었어요."


그 즐거움의 울타리가 되어준 건 코치진이었다. 급하게 달리기만 하던 홍상민의 농구에 속도를 조절하는 법도 일러줬다.

"코치님이 맨날 하시던 말씀이 있어요. '너는 스포츠카 같다. 너무 빨리 달려서 옆에 있는 나무들을 못 본다. 천천히 가야 나무가 보인다.' 그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2학년 때의 성적은 오르내렸다. 준우승과 4강, 예선 탈락을 모두 겪었다.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홍상민을 막아선 건 라이벌 용산고였다. 그 중심에는 중학교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이채형이 있었다.

"코트를 날아다니다가도 용산고만 만나면 딱 막혔어요. 채형이가 워낙 센스가 좋아서 제가 돌파하는 길을 다 읽고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같이 뛰어봐서 서로를 더 잘 알았죠.”

그렇게 기다리던 우승은 3학년 마지막 대회였던 왕중왕전에서 찾아왔다. U-18 국가대표 차출로 일부 선수가 빠진 상황이었지만 경복고는 결승에 올라 정상을 밟았다. 결승전에서 홍상민은 32분 34초 동안 코트를 누비며 21점 11리바운드 3블록슛을 기록했다. 이 경기에서 존재감을 폭발시킨 홍상민은 대회 MVP까지 거머쥐며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았다. 그러나 홍상민은 그 공을 동료에게 돌렸다.

"4강까지 제가 너무 못했어요. 애들이 잘해줘서 결승까지 올라간 거고, 결승 한 경기에서 원래 보여줘야 할 걸 보여준 것뿐이에요. 사실 저는 (김)서원이가 받을 줄 알았어요. 대회 전체를 보면 팀을 이끈 건 서원이었거든요. 그 상은 서원이가 만들어준 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따로 고맙다고도 했어요."


"우승은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의미가 있어요. 그해 그 대회에 경복고가 우승했다는 게 역사처럼 남잖아요. 완전한 전력이 아니라 아쉬움은 있었지만, 기분은 정말 좋았죠."

홍상민은 경복고의 공수 중심으로서 다양한 개인상을 휩쓸었다. 고교 최고의 센터라는 수식어까지 얻게 됐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다음 무대, 연세대는 또 다른 시험대였다.

#002_Life in University

연세대 합격 소식은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 접했다. 휴대전화에 뜬 합격 문자를 확인한 홍상민은 곧장 부모님께 소식을 전했다. 설렘도 잠시,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왔다. 농구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누군가에게 맞춰가야 했다. 막연히 그려왔던 대학 생활은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넘어가기 전부터 엄청 무서웠는데, 막상 가보니 상상한 그대로였어요. 그냥 정말 무서웠어요(웃음). 지금 생각해 보면 형들이 일부러 그랬던 것 같아요. 잘하는 애들만 오는 학교니까 어깨가 올라가지 않게, 고등학교 때처럼 개인이 아니라 '우리는 원팀'이라는 걸 알려주려고요. 그때는 몰랐는데 학년이 하나만 올라가도 왜 그래야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더라고요."

진짜 시련은 코트 위에 있었다. 고교 시절 주축으로 쉼 없이 코트를 누비던 홍상민은 연세대의 시스템에 좀처럼 녹아들지 못했다. 출전 시간은 눈에 띄게 줄었고, 처음 겪어보는 벤치의 시간은 혼란으로 다가왔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경기를 정말 많이 뛰었는데, 갑자기 벤치에만 앉아 있으니까 혼란스러웠어요. 납득을 못 했다기보다는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절대 안 돌아갈 것 같아요. 그래도 그때가 제일 많이 배운 시기예요."

홍상민을 압도한 건 훈련 강도가 아닌 분위기였다. 매 순간이 실전이었다.

"운동 자체는 고등학교에 비해서 엄청 힘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어요. 분위기가 처져도 오늘 하루를 버려서는 안 되고, 이 훈련에서 무조건 얻어가는 게 있어야 한다는 집중도가 있었어요. 하루하루를 그냥 소비하는 느낌이 아니어서 그 분위기에 많이 압도됐던 것 같아요."

흔들리던 신입생 시절을 버티게 한 건 동기들이었다. 유급을 거친 탓에 동기들보다 한 살 많았던 그는 먼저 벽을 허물었다.

"저랑 (강) 지훈이가 유급을 해서 애들이 처음엔 다 형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절대 형이라고 하지 마라, 같은 학번이면 친구라고 말했죠. 다 같이 너무 힘든 시기를 겪다 보니 다섯 명이 정말 똘똘 뭉쳤어요. 다 같이 어깨동무하고 '1년만 버티자' 하면서요. 서로 성향을 알아가고 맞혀가던 해였어요."

1학년의 터널을 지나자, 이번에는 부상이 그를 가로막았다. 2학년 때 연습경기 도중 허리 디스크가 터진 것이다. 그러나 홍상민은 좌절 대신 오히려 기회를 봤다.

"허리 디스크는 일반인들도 재채기하다가, 양말 신다가 터진다고 하잖아요. 저는 연습경기 도중에 그렇게 됐어요. 부상이 반가운 건 당연히 아니지만 '내 몸 관리를 더 잘해야 하는구나'를 깨달았어요.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해서 많이 힘들어하지 않았어요."

그해 정기전은 코트 밖에서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그 승리는 오히려 그에게 '하나 된 팀'의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새겨줬다. 



"연세대 선수라면 정기전이 제일 먼저 생각나잖아요. 2학년 때는 부상으로 못 뛰었는데, 이겼을 때 '이게 진짜 원팀이구나' 하는 걸 많이 느꼈어요. 정기전을 준비하는 과정도 아직 생생하게 기억나요."

대학 무대의 마지막 시즌, 홍상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한 각오로 코트에 섰다. 그 각오는 기록으로 증명됐다. 명지대전에서 홍상민은 37분 40초 동안 18점 8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활약은 한 경기에 그치지 않았다. 상명대와의 맞대결에서도 19점 5리바운드를 쏟아내며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승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무릎 부상으로 한두 경기를 결장했고, 플레이오프를 앞두고는 발목을 다쳤다. 플레이오프를 앞둔 홍상민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솔직히 지금이 제일 싱숭생숭해요. 보여주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부상을 당해서 같이 마무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에요. 최대한 노력은 하고 있지만 아직은 모르니까요. 트라이아웃만큼은 꼭 뛰고 싶어서 열심히 재활하고 있어요."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사이 홍상민의 마음도 단단해졌다. 처음에는 힘든 기색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지만, 이제는 힘듦을 흘려보내는 법을 배웠다.

"예전에는 힘든 게 표정에 다 드러났어요. 지금은 힘든 건 최대한 빨리 잊으려고 해요. 저는 낮잠을 진짜 좋아하거든요. 부상 때문에 잠도 잘 안 올 때는 맛있는 걸 먹고 웃긴 걸 자주 봤어요. 내 얼굴이 많이 웃어야 속도 그렇게 바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곁을 지켜준 사람들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동네 친구는 정기전과 대학리그 경기장을 빠짐없이 찾았다. 홍상민의 두 누나는 현실적인 조언으로 동생의 길을 함께 고민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누나들이 감정적으로 도와줬다면 대학교 때는 현실적으로 조언도 많이 해줘서 도움이 많이 됐어요.”


농구로는 체감하지 못했던 대학 선수로써의 마지막은 오히려 사소한 순간들 속에서 다가왔다.

"농구는 매년 똑같이 하고 경기는 그냥 중요한 경기일 뿐이라 마지막이라는 걸 잘 못 느꼈어요. 그런데 팬분들 편지에 '마지막 유니폼'이라는 말이 적혀 있을 때, 학교 사이트에서 졸업 신청을 할 때 느껴지더라고요. 후배들이 '내년 전지훈련 어디 갈까' 하는 얘기를 할 때도 저는 그냥 듣고만 있게 되더라고요. 이제 정말 제가 꿈꾸던 프로로 갈 때가 됐다는 걸 느껴요." 

#003_ Application

드래프트는 지금까지 쌓아온 시간을 평가받는 자리인 동시에, 앞으로의 가능성을 직접 설명해야 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수많은 후보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면 무엇을 잘하는 선수인지, 어떤 모습으로 팀에 보탬이 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홍상민의 농구는 늘 힘에서 출발했다. 중학교 때부터 다음 단계의 선수들과 몸을 부딪치며 밀리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고, 더 센 상대를 만난 뒤로는 웨이트 트레이닝에 매달렸다. 중학교 시절 득점상과 리바운드상을 함께 거머쥔 것도 골밑에서 버티는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코트 위 기술만큼이나 그가 자신 있게 내세우는 무기는 에너지다. 동료들 사이에서 늘 웃음을 몰고 다녔던 홍상민은 팀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일에 누구보다 능숙하다.

"저는 원래 밝은 성격이에요. 팀에 밝은 에너지랑 활력을 넣어줄 수 있다는 게 제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넘어져 본 사람만이 일어나는 방법을 안다. 연세대 1학년 시절의 긴 벤치 생활, 반복된 부상을 지나오며 홍상민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몸으로 익혔다. 프로에서 마주할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이유다.

"프로에 가서 처음에 자리를 잘 못 잡고 흔들릴 수도 있잖아요. 그래도 저는 1학년 때 했던 것처럼, 그 초심으로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항상 있어요. 잘했을 때 내가 어떻게 했었는지를 돌아보면서 다시 찾아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과제도 분명히 알고 있다. 4년 동안 한 팀의 시스템을 익혀온 대학과 달리, 프로는 빠른 적응을 요구하는 무대다.

"연세대에서는 전학 갈 일이 없으니까, 패턴을 익히는 데 4년이라는 시간이 있었어요. 프로에서는 새로운 건 빠르게 외우고 익혀야 하니까 공부를 정말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스스로 관리를 잘해야죠. 전부 겁난다기보다는 기대 반, 걱정 반이에요."

#004_ My future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먼저 그려보는 순간이 있다. KBL 입성을 꿈꾸는 드래프트 참가자들에게도 '프로 선수가 된 나'는 오래 품어온 가장 선명한 상상일 터다. 홍상민이 그린 그 장면의 끝에는 숫자가 아닌 승리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몇 득점 이상을 보여주고 싶다는 건 없어요. 팀이 이길 수 있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선수라고 생각해요. 승리했을 때 그 무리 속에 제가 있어서 승리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말을 듣는 선수로 남고 싶어요. 기록지에는 안 보여도 팀이 알아봐 주고 감독님이 알아봐 주는 선수요."

자신을 한 단어로 표현해 달라는 질문에 홍상민이 내놓은 답은 단순했다.

"저는 농구 선수라고 했어요. 인생의 반을 농구하면서 살다 보니까, 저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돌고 돌아 농구공을 손에 쥐고 세 번의 진학과 전학, 고교 무대의 MVP, 대학 시절의 벤치와 부상을 차례로 지나왔다. 그 모든 시간을 한 단어로 압축한 답이 농구 선수였다. 기록지 너머에서 팀의 승리를 만드는 선수, 홍상민이 이제 프로 무대에서 그 이름의 무게를 증명하려 한다.


#사진_점프볼DB, 박효진 인터넷기자, 홍상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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