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현의 THE COACH] 김진 감독 “농구 발전, 말 아닌 행동으로”

곽현 / 기사승인 : 2016-05-08 2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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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곽현 기자] 프로농구 감독이 짊어지는 무게감은 상당하다. 재능 있는 선수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야 하고, 성적으로 팀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냉혹한 프로의 세계에선 오직 성적으로 감독의 능력을 평가하곤 한다.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기면 선수 덕, 지면 감독 탓이라고들 한다.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감독이란 자리는 그만큼 고독하고 쓸쓸하다. 이번 코너에서는 프로농구를 이끌고 있는 감독들을 만나 그들의 애환, 지도자로서의 신념에 대해 들어보려 한다. 그 첫 번째 시간으로 프로농구 최고참 감독인 창원 LG 김진(55)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연수와 맞바꾼 지도자 데뷔
고려대를 졸업하고, 실업팀 삼성전자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김진 감독은 1995년 현역에서 은퇴를 했다. 우리나이 서른다섯 살에 은퇴를 했으니, 당시로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만 해도 서른 살이 넘으면 노장이라고 했을 때니 말이다. 김 감독은 현역 시절부터 지도자 준비에 대한 생각을 차근차근 해왔다고 한다. 그는 은퇴 후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삼성전자가 미국 UCLA 대학과 꾸준히 교류전을 했었어요. 당시 감독이 짐 해릭이란 분이었는데, 교류전을 하면서 배울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때 마침 상무(국군체육부대)에서 감독 제의가 왔었어요. 처음엔 거부를 했죠. 지도자 연수에 대한 꿈이 있었으니까요. 당시 삼성에서는 저와 (김)현준이형이 같이 은퇴를 했는데, 현준이형에겐 지도자 연수를 보내주려고 했었고, 저는 그게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좀 서운하긴 했지만, 자비로라도 간다고 했죠. 구단에서는 상무에 보내고 싶어 했어요. 은퇴선수에 대한 진로를 잘 마련해주고 싶었던 거죠.”


현 김홍배 실업농구연맹 회장이 당시 상무 농구단 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김 부장은 계속해서 김 감독에게 제의를 했다고 한다.


“계속해서 거절을 하다가 4~5번 만남 끝에 결국 수락을 했어요. 당시 상무는 군무원이었는데, 지도자는 7급이었죠. 상무에서 지도자를 할 경우 받을 수 있는 여러 특혜가 있다고 설득하더군요. 마침 주위에서도 기회가 왔을 때 잡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을 해줬어요. 당시엔 내가 처음 계획했던 길이 아니라 아쉬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김 감독의 지도자 인생이 시작됐다. 김 감독이 상무를 맡았을 당시 멤버가 상당히 좋았다. 문경은, 이상민, 조성원, 김승기 등이 갓 입대해 주축이 됐고, 기아, 연세대, 고려대 등과 함께 성인 무대에 강력한 우승후보로 발돋움하게 된다.


상무에서 1년을 보낸 김 감독은 프로 출범 한 해 전인 1996년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코치로 프로 지도자의 첫 걸음을 딛게 됐다. 그는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 언제였냐는 질문에 “혹독하게 지도자수업을 했던 것 같다”며 프로 초창기 코치를 맡았던 시절을 떠올렸다.


“동양에서 32연패를 당했던 적이 있어요. 그 때 옆에서 지켜보면서 감독이란 자리가 ‘참 힘들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박광호 감독님이 계셨는데, 코치인 나도 힘들었지만, 표현도 못 할 정도로 힘들어보였습니다. 당시 부담감은 선수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지만, 당시 경험은 그의 지도자 인생에 있어 든든한 자양분이 됐다고 한다.


▲탁월한 안목, 창단 첫 우승의 시발점
김진 감독은 코치와 감독대행을 거쳐 2001-2002시즌 오리온스의 정식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는 첫 시즌 만에 오리온스를 우승으로 이끎과 동시에 일약 최고의 인기구단으로 발돋움시킨다. 전국구 구단의 시작이 된 시즌이다.


“그땐 농구를 참 재밌게 했었던 것 같아요. 포지션별로 전문성이 갖춰졌었고, 농구를 즐기면서 했죠. 외국선수들도 국내선수들에 맞춰 뽑았고, 빠르고 재밌는 농구를 했어요. 대구 팬들의 충성도도 대단했어요. 당시 호응도는 지금 창원만큼 대단했죠. 원정 경기를 가도 홈팀 못지않은 환호를 받은 기억이 납니다.”


오리온스는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동국대 출신의 김승현을 선발했고, 외국선수는 1순위로 대학을 갓 졸업한 마르커스 힉스를 뽑았다. 탁월한 패스가 장점인 김승현과 가공할 탄력을 자랑하는 힉스의 호흡은 강력하면서도 화려했다. 뿐만 아니라 김병철, 전희철, 라이언 페리맨 등 각 포지션마다 재능 있는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오리온의 쇼타임 농구가 시작된 것이다.



“그 때 다들 안드레 페리(삼보)가 1순위라고 했어요. 경력 면에서 따를 선수가 없었거든요. 근데 제가 힉스를 뽑으니까 다들 정신 나갔다고 했죠. 하지만 제 생각에 힉스가 우리 팀에 더 맞다고 생각했어요. 선수들을 아우를 수 있는 김승현이라는 가드가 있었기 때문에 국내선수를 활용할 수 있고,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는 선수가 힉스라고 판단했죠. 한국적인 농구에 맞는 선수라고 생각했어요. 라이언 페리맨 같은 경우 기능적으로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는데, 대학 시절 리바운드 기록이 좋았어요. 성실성을 높이 평가했죠. 전부 다 농구를 할 줄 아는 선수들이다보니 상생하는 역할을 한 것 같아요. 승현이가 리딩을 해주면서 성적도 좋았고, 재밌는 농구를 했죠. 농구 붐업이 될 수 있었던 시기 같아요.”


김 감독 말대로 성적과 함께 화려한 농구를 선보인 오리온은 KBL 최고의 인기 구단으로 떠올랐고, 농구의 재미를 알리는데도 크게 일조했다. 점프볼이 농구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역대 최고의 챔피언 설문조사에서도 2001-2002시즌 오리온이 가장 많은 표를 받았을 만큼 그들은 역대급 팀이었다.


오리온은 챔프전에서 SK를 물리치고 창단 첫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김 감독으로선 감독 데뷔 첫 시즌에 우승이라는 큰 성과를 세운 것이다. 초보감독으로서 능력 있는 선수들을 선발한 김 감독의 안목이 돋보였다. 김승현과 힉스 모두 데뷔 전까지는 큰 주목을 받는 선수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팀에 녹아들 수 있는 선수들을 선발한 점이 주효했다.



김 감독은 선수 선발에 있어 중점을 두는 부분에 대해 “국내선수가 우선인 것 같아요. 국내선수들에 맞춰서 상생할 수 있는 외국선수를 뽑아야 시너지효과가 난다고 봅니다. 외국선수들 나름대로의 정서도 존중을 해줘야 해요. 그래야 그 선수들도 자기 플레이를 할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2002년 부산의 감동
2002년 그의 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프로 우승을 기점으로 그는 그 해 부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대표팀의 사령탑에 선임됐다. 부담감이 큰 대회였다. 국내에서 열리는데다 중국이라는 워낙 큰 벽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지도자들이 맡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최소한 결승은 올라가야 한다고 했죠. 우리 목표는 중국이었어요. 중국은 야오밍이 있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했어요. 전력차가 크다는 평가가 많았죠.”


당시 중국과의 결승전은 한국농구 역대 최고의 명승부로 회자되곤 한다. 중국은 NBA 진출을 눈앞에 뒀던 거물센터 야오밍(229cm)이 버티고 있었고, 선수들의 신체조건이나 기량 면에서 우리보다 한 수 위라고 평가되던 시기였다.


국내에서 열리는 대회인 만큼 대표팀도 최정예 선수들을 선발했다. 문경은, 이상민, 전희철, 서장훈, 현주엽, 김승현, 김주성 등 프로와 대학을 통틀어 최고의 선수들로 팀을 구성했다.


“당시 선수들의 투쟁심이나 사명감이 대단했어요. 한국농구가 우리 어깨에 달려있다고 생각했죠. 팀에서 하는 것보다 더 투혼을 보였던 것 같아요. 장훈이, 주성이, 주엽이 등 센터진들이 야오밍 등 중국의 센터진을 상대로 투혼을 보여줬죠. 더블팀은 기본이고 트리플팀까지 했어요. 다들 미친 듯이 뛰어줬죠.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좋은 선수들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이들을 하나의 팀으로 엮을 수 있었던 것은 김 감독의 지도력이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다. 개성 강한 선수들의 플레이를 최대한 살려주고,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도록 유도했다.


감독으로 처음 부임했던 시즌에 통합우승, 그리고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김진 감독에게 2002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해이자, 자신의 지도자 인생을 지탱해준 버팀목이 되고 있다고 한다.


▲영감을 준 레이커스 훈련 참관
그에게도 공백 기간이 있었다. 오리온을 거쳐 SK 감독에 부임한 그는 2009년 12월 성적 부진을 이유로 시즌 도중 자진사퇴 했다. 김 감독은 당시를 회상해보면 재충전을 할 수 있었고, 지도자로서 공부도 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라고 한다.


김 감독은 2010년 10월 NBA 명문구단 LA레이커스의 훈련에 참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당시 레이커스는 명장 필 잭슨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었고, 슈퍼스타 코비 브라이언트가 팀의 간판이었다.


“감독 생활을 하면서 운이 많이 따랐던 것 같아요. 레이커스 훈련을 참관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고 하더군요. 근데 부딪혀보니 길이 열리더라고요. 당시 레이커스 코치였던 짐 클레멘스 코치와 인연이 있어서 잭슨 감독을 설득시켜줬어요. 선수 은퇴 후 가지 못 했던 지도자 연수에 대한 갈증을 채울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당시 레이커스는 이전 2시즌 우승을 차지한 디펜딩챔피언이었다. NBA 최강팀의 훈련을 직접 지켜본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닐뿐더러, 그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NBA는 시간개념이 철저했어요. 훈련시간은 철저했지만, 훈련 외적인 부분에선 코치들이 선수들을 터치하지 않았죠. 룩 월튼(現워리어스 코치)이란 선수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늘 훈련시간 한 시간 전에 나와서 슈팅연습을 했어요. 공을 잡아주는 슈팅코치가 따로 있더군요. 그 코치도 개인적으로 고용을 해서 썼어요. 가르쳐주는 게 별거 없어요. 슛의 아주 기본적인 부분들이었죠. 비시즌 코치들을 고용해 개인훈련을 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는 레이커스 훈련에서 보고 느꼈던 점을 접목해 국내 리그에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팀을 이끌고 있다. LG 감독으로 새로이 시작한 그는 2013-2014시즌 LG를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 챔프전 준우승으로 이끌며 재기에 성공했다.



▲농구 발전 위한 노력, 말 아닌 행동으로
그의 농구스타일을 보면 과거 오리온스 시절이나 현재 LG에서나 가드가 중심이 되는 빠른 농구를 선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리온스에선 김승현이라는 가드를 중심으로 그와 호흡을 맞출 수 있는 트랜지션이 좋은 외국선수를 선발했다. 외곽에서는 김병철이라는 정확한 슈터가 버티고 있었다.


LG에서도 김시래가 중심이 된 빠른 농구를 구사했다. 김종규라는 달릴 수 있는 빅맨이 있고, 문태종, 김영환이 외곽에서 득점포를 가동했다. 김 감독은 이러한 빠른 농구의 중심에는 가드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달릴 수 있는 빅맨의 비중이 상당히 크다고 전했다.


“외국선수를 뽑을 때 트랜지션이 가능한 선수를 선호해요. 5명이 같이 공수전환을 할 수 있고 속공을 할 수 있는 농구를 선호하죠. 빅맨이 리바운드를 잡고 달려줄 수 있다면 농구가 정말 빨라지고, 폭발력이 생길 수 있어요. 과거 힉스와 페리맨이 있을 때 둘이 달려주면서 찬스가 많이 났죠. 둘에게 수비가 몰리면 외곽의 김병철, 전희철에게 찬스가 났죠. 반대로 4, 5번이 게으르면 그런 플레이가 나올 수 없어요. 지난 시즌엔 트로이(길렌워터)가 그게 좀 약점이었어요(웃음).”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지 20년을 넘긴 김진 감독. 지도자를 처음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전하고픈 조언이 있는지 물었다.


“경험이 중요하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겠죠. 그리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직업 특성상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지만…. 자기 팀 뿐 아니라 선진농구도 많이 봐야 해요. 선수들 중에서도 하는 걸 보면 지도자 자질을 갖고 있는 선수가 보여요. 지도자들이 가르쳐주는 걸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죠. 김영환, 기승호 같은 선수들이 잘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전술 이해도나 후배들과의 관계를 보면 잘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김 감독이 처음 지도자를 맡았던 시절부터 쭉 얘기를 들으면서 그의 철학, 지도방식, 에피소드 등 다양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얘기를 나누면서 그가 단순히 지도자로서 선수들을 잘 가르치고,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것 이상의 바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프로는 궁극적으로 성적을 내야 합니다. 선수들을 성장시키는 역할이 제가 해야 할 일이죠. 선수들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서 일찍 은퇴를 하는 경우도 나오는데, 최대한 오래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또 한국농구가 90년대에 비해 인기나 여러 가지 면에서 성장하지 못 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요. 선수들이 후배들에게 좋은 영향을 줘야 하고, 저 역시도 마찬가지에요. 선순환적인 역할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많습니다. 비시즌 보면 농구를 즐기는 인구가 상당히 많아요. 저변은 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양분을 줄 수 있어야 해요. 농구인들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자 여러 의견을 내고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이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한국농구를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재능기부라든지 여러 활동을 통해 한국농구를 성장시키는 노력을 했으면 합니다.”


#사진 - 유용우 기자, KBL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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