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S] ④ 한국농구 포인트가드의 효시(嚆矢) 김인건

서민교 / 기사승인 : 2022-01-28 08: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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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구 포인트가드 계보의 시작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인트가드 포지션이 자리 잡기 이전 한국농구에는 걸출한 스타가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패스와 시야는 포인트가드라는 명칭이 없던 시절, 김인건이란 이름으로 존재했다. 그는 한국농구의 포인트가드 역사를 연 최초의 인물이었다.


엘리트 농구인의 길을 걷다
김인건은 특이한 케이스다. 농구선수 출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운동에 있어서 타고난 재능을 지녔지만, 농구 뿐 아니라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다. 내성적이면서도 꼼꼼한 성격 탓에 농구 외적으로 학업에 있어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농구는 그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아서 즐겼을 뿐이었다. 학업과 운동의 경계선이 없었던 당시 시대적 여건상 그는 농구 특기생이 아닌 일반 입시시험을 보며 대학에 입학했고, 농구선수로서도 최고의 자리를 유지했다. 4형제 중 유일하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구공을 잡은 그는 엘리트 농구인의 길을 걸었다.

Q. 농구를 처음 시작하신 게 언제부터였나요?
경복중학교를 들어갔는데, 전교생이 토요일 오후 특별활동을 했었어. 오전까지는 수업을 하고. 지금의 동아리라고 볼 수 있지. 우표수집반, 생물반, 방송반 등이 있었고, 운동도 종목별로 지금의 핸드볼인 송구반, 농구반 등이 있었어. 아버지도 농구를 하셨던 분이기 때문에 농구가 하고 싶어서 농구반으로 들어갔지. 매주 토요일마다 농구를 했는데, 다행스러운 것은 경복중학교에는 실내체육관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운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었어.

Q. 당시 농구반 분위기는 어땠나요? 1950~60년대에는 모든 게 귀한 시절이었잖아요?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실내체육관이 있었지만, 상설 농구팀이 있어서 우린 쓸 시간이 없었어. 마당에서 농구를 하는 거지. 공도 귀해서 1학년 30~40명이 공 1개를 갖고 했었어. 방학 때는 합숙도 했었는데, 지금처럼 합숙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 교실에 이부자리 들고 와서 생활을 했던 거니까. 그러다 또 2학기 수업하면 토요일 오후마다 모여서 하고.

Q. 특별활동이 아닌 정식 농구선수가 된 것은 언제였나요?
경복중학교 2학년 때였어. 그 당시 특별활동을 하던 7~8명 정도가 남아 정식 선수가 된 거지. 그러다 3학년 때 주전으로 출전을 하게 됐고.

Q. 농구에 대한 재미나 매력은 언제 느끼셨나요?
농구를 하면서 성격이 활달하게 변했어. 그 전에는 놀이 자체가 없었으니까. 운동을 하면서 개방적이고 사교적으로 변했지. 농구를 하지 않았으면 오늘의 내가 없겠지만, 그 때는 그저 그렇게 어울리는 게 좋았던 것 같아.

Q. 고등학교 입학도 특기생 자격이 아니었습니다.

요즘에 학습권이나 학교폭력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만 우리 때는 그런 게 없었어. 무조건 공부와 농구를 병행해야 했으니까. 대회에 나가도 조퇴를 하고 다시 들어와 수업을 들어야 할 정도였지. 그래도 우승하고 그랬으니까. 고등학교도 시험을 봐서 들어갔었어. 공부를 하더라도 운동을 굉장히 잘 했거든. 종별선수권을 비롯해 전국대회 우승을 많이 했었지.

Q. 농구선수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도 많이 받으셨나요?
아버지는 굉장히 엄한 분이셨어. 학교 들어가서도 특기자가 아니니까 무조건 공부부터 하게 만들었지. 공부 못하면 농구도 안 시킨다고 했으니까. 우리 집안이 4형제인데, 나만 운동을 시키셨지. 학교에서 수업하고 운동하고 집에 와서 자는 거야. 그런 생활이 습관이 돼서 대학가서도 술 마시러 거의 가지 않았어. 졸업을 하고 나서 은행가서야 술을 먹기 시작했으니까.

Q. 중,고등학교 당시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으신가요?

고3때 한일교환경기라고 해서 일본 원정을 가게 됐어. 아마 그 대회가 주니어경기의 효시가 됐을 거야. 5.16 군사쿠데타가 나던 해였지. 진명여고와 함께 남녀 동반 원정길에 올랐는데, 우리가 7전 전승을 하고 진명여고가 4승2무1패 정도 했을 거야. 5.16 쿠데타 때문에 5월 18일에 떠나게 되어 있었던 대회가 연기 됐었지. 비행기 한 번 타기 힘든 시절이라 실망도 컸었고. 결국 한 달 정도 있다가 나가게 됐지. 축구는 올림픽 대표가 나갔고, 농구는 고등학교 팀이 한국 대표로 나갔거든. 당시 비행기로 3시간 이상 가서 시즈오카, 오사카, 교토, 후쿠오카 등을 다니면서 경기를 했었어. 마지막에 하카다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 하루 자고 서울로 올라왔었지.

Q. 그 당시 일본이라면 의미가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우리가 도착하니까 엄청 시끄러웠지. 일본 팀들을 상대로 전승하고 돌아왔다고. 서울역에 학교 밴드가 나와서 쿵짝 하면서 난리가 났고, 플래카드도 걸려있었고. 당시엔 신문이 4면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신문에 대서특필까지 됐었어. 일본과 교류가 거의 없었던 시절인데다 일본어도 배우지 못하게 할 때였으니까.

Q. 대학을 특기생이 아닌 일반학생과 같이 시험을 봐서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3 때 상급학교 진학을 해야 하는데, 일본 갔다 온 것이 6월이었지. 바로 방학을 하고 또 전국대회가 서울에서 열려 참가를 했었어. 그러다 10월이 됐는데, 특기자 입학이 없어진 거야. 정권이 바뀌면서 그 해만 특기자 입학 제도를 없앴어. 3개월 입시공부를 해서 연세대 경영학과에 들어갔지. 아마 그 때 떨어졌으면 농구 포기하고 재수해서 서울대 시험을 봤을 거야.

Q. 대표팀에 발탁된 것은 언제였나요?
고3 때 대표팀 후보는 됐었지만, 본격적으로 뛴 것은 대학 1학년 때였어.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을 할 때 선발이 돼서 그 이후 10년 동안 대표팀에 있었지. 중국이 나오기 전이라서 필리핀, 대만, 일본 다음으로 우리가 사실상 4위권이던 시절이었고.


포인트가드의 정석(定石)
한국에 농구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07년 기청회관(현 YMCA 회관)이 설립되면서다. 이후 반 세기동안 한국농구는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했다. 1960년대만 해도 뚜렷한 포지션 없이 센터와 포워드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1960년대 말 한국농구의 전성기와 함께 포인트가드 시대를 활짝 연 인물은 김인건이었다. 그는 당시 개성 강한 선수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으로, 공수의 완벽한 조화를 만들어냈다.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았던 그는 한국농구 포인트가드의 정석이었다.

Q. 한국농구 포인트가드의 효시라고 불립니다.
허허허. 효시라니? 과찬이지. 예전엔 가드 상관없이 기능적으로 나눠 있지 않았거든. 포워드와 센터로 구분했고, 포인트가드를 두고 그냥 ‘스탠딩 가드’라 부르기도 했어. 가운데 서서 하는 사람이란 의미였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 미국에서부터 포지션이 나눠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 기능별로 말이야.

Q. 정확한 패스 덕분에 포인트가드의 정석으로 불렸습니다.
패스는 부단히 노력도 해야 하지만, 예견을 해야 돼. 수비나 인터셉트도 그렇게 이뤄지는 거니까. 내 위주로 패스하면 절대 안 돼. 받는 사람이 처리하기 좋게 예견을 해서 패스를 해야지. 한 번의 패스를 하더라도 패스 능력은 기본이고, 수비를 피할 수 있는 능력, 우리 선수의 움직임, 우리 선수를 막는 상대 선수의 움직임까지 모두 볼 수 있는 시야가 있어야 돼. 기본적으로 이 정도는 봐줘야 가드라고 할 수 있지. 지금도 그런 패스를 주는 가드가 몇 없으니까.

Q.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선수는 누구였나요?
난 주로 센터와 농구를 했어. 김영일 씨와 호흡이 잘 맞았지. 물론 받는 사람도 움직이는 능력이 좋아야 되지. 패스 강도도 중요하고 공격자가 잡자마자 돌파를 하거나 점프슛을 쏠 수 있게 패스를 정확하게 줘야 하거든. 그래서 호흡이 중요한 거야.

Q. 포인트가드는 특히 머리가 좋아야 하잖아요?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연습을 해야 좋은 선수가 될 수 있거든. 그런데 머리가 나쁘면 아무리 운동을 해도 좋은 선수가 될 수 없어. 창조적인 플레이를 할 줄 알아야 하니까. 특히 스포츠 중에서도 농구는 머리가 발달돼야 해.

Q. 공격 뿐 아니라 수비도 뛰어났다는 평가입니다.
사실 공격보다 수비를 가장 잘했어. 상대의 맥을 끊고, 공을 못 주게 만들고, 실책을 하게 만드는 거지. 내가 맡은 수비는 책임지고 득점을 주지 않았어. 정말 열심히 뛰었던 것 같아. 요즘 보면 양희종이 그렇게 열심히 수비를 하더라고.

Q. 개인훈련은 어떤 식으로 하셨나요?
일단은 농구하는 것을 많이 봤어. 남이 하는 것을 많이 봐야 늘 수 있거든. 마당에서 할 때는 비만 오면 농구를 못하니까 체육관이 있는 경복고로 많이 몰려들었어. 농구장에 가서 계속 보다가 마지막에 온 팀이랑 한 게임하고 가는 거였지. 개인훈련은 수 없이 했지. 우리 때는 슈팅 연습을 많이 했어. 거의 둘이 짝을 이뤄서 슈팅 연습을 하는데, 슛이 정확한 선수와 연습하면 효과적인 거지. 림 밑에만 있으면 공이 오니까. 신동파와 함께 슈팅 연습을 많이 했어. 많이 쏠 때는 500개는 쐈을 거야. 100개 기준으로 하면 거의 95개 정도는 들어갔어. 잘 안 들어갈 때 90개 정도 정도 넣었으니까. 패스 연습은 거의 벽에다 했었어. 사실 슛이나 패스는 모두 타고나야 하는 거야. 노력도 중요하지만 훈련만 갖고는 안 되거든.

Q. 후배들 중에 현역 시절 비슷한 선수가 있다면요?
그때는 필름이 없어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볼 수가 없었어. 김승현 스타일보다는 이상민 같은 플레이를 좋아해. 리딩을 보면서 팍팍 밀어주는 거지. 빠르고 스케일이 큰 농구를 해야 농구가 재밌어지거든. 우리가 못 잡아도 상대도 공을 못 잡게 말이야. 특히 가드는 속공을 잘해야 되거든. 정확하게 코앞에도 공을 갖다 주는 그런 패스를 해야 돼.


선진 농구를 입다
1960년대 한국농구는 과도기를 맞았다. 농구선수 출신 미군 장교들을 포섭해 대표팀 지휘봉을 맡기면서 한국농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 그 당시 대표팀 선수들은 선진 농구를 배우고 싶은 욕망에 가득했다. 이미 정체된 한국농구의 수준을 뛰어넘는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풍부했다. 그 중심에는 김인건이 있었다. 그는 대표팀의 젖줄이었다. 언제나 공은 그의 손에서부터 시작됐다.

Q. 그 당시 미군 코치가 대표팀을 맡았습니다. 한국농구 발전을 가져온 계기가 됐습니다.

1966년에 미8군에 있는 미국농구선수 출신 장교를 포섭했어. 조동재 선생이 아시아제단에 있을 때 마콘(Macon) 중위라고 용산에서 근무하던 선수 출신 장교가 있었어. 미8군 사령부에 정식으로 요청을 해서 지도자를 맡겼었지. 그 사람이 맡으면서 한국농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었어. Mr. 마콘이라 불렀는데, 그 코치가 1년 동안 맡으면서 수비가 많이 늘었어. 매치업 존 같은 선진 형태의 존 디펜스를 처음으로 대표팀에 적용시켰거든. 인화단결을 기술보다 더 중요시 여겼던 코치였고, 1965년 방콕아시안게임을 인솔했었지. 그러면서 필리핀도 이길 수 있게 된 거고…. 이후 1966년 말에 고스폴이라는 미군 코치가 2년 동안 맡으면서 또 한 번 업그레이드를 시켰지.

Q. 1968년 미국 원정길이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습니다.
1968년 1월 미국 원정을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김신조 무장간첩 사건과 푸에블로호 선원 석방 문제 등 전시에 정말 어려울 때였지. 미국 자선단체인 피플 투 피플(People to People)에서 우리를 초청한 것이었어. 미국을 가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군용 수송기를 타고 4명이 먼저 가고 하루 종일 미국 비행장에서 대기하다 새벽 3시가 넘어서 일본에 들렸다가 나머지가 갔었거든. 여객기는 여객기인데 휴가 가는 장병 가족이 타는 비행기여서 승무원도 없었어.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군 비행장으로 도착해서 다시 민간 비행장으로 이동해서 겨우 시애틀에 도착했지. 한 이틀 만에 선수들이 모두 모여 대회 당일에 도착했어. 저녁 7시 경기였는데, 우리 때문에 9시 경기로 미뤄진 상태였지. 이미 관중들이 들어와 있었고.

Q. 당일에 도착했으면 시차도 그렇고 제대로 된 경기를 하지 못했겠네요?
우리는 이틀 동안 잠도 거의 못 자고 유니폼만 갈아입고 경기를 진행했어. 3경기를 했는데, 당연히 모두 졌지. 선수가 10명밖에 안 갔고, 임원 3명이 동승했거든. 뛸 때는 그래도 괜찮은 줄 알았는데, 벤치에 앉아 있으면 졸 정도였으니까 제대로 경기를 할 수 없었지. 여기서 신동파 자랑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대단한 게 신동파는 슛이 다 들어가더라고. 허허.

Q. 당시 열악한 상황에서 캐나다와 미국 투어는 상상도 못할 일인데요.
그곳에 교포들이 여섯 가구 정도 있었는데, 농구 끝나면 자기 집 가서 밥 먹자고 하는 거야. 2~3명씩 나눠서 김 박사네 집, 무슨 박사네 집으로 가서 밥 먹고 밤 12시쯤 숙소에서 만났지. 얼마나 피곤했는지 다음날 오후 3~4시 정도에 깬 거야. 그날 또 게임을 해야 하는데 말이야. 그래도 그때 교포들이 참 고마웠지. ‘야키마(Yakima)’라는 인디언 많은 도시에서 2부 리그 속해 있는 미국 대학팀들을 찾아다니면서 게임을 했었는데, 아침에 우리를 깨우질 않는 거야. 대표팀에 돈이 없으니까 아침을 먹이지 않으려고 자게 놔둔 거지. 아침 겸 점심을 먹으라는 거지. 그러다 군대 숙소에서 잘 때는 또 새벽 4시에 깨우더라고. 군대에서는 아침을 일찍 먹으니까….

Q. 이긴 경기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나요?
샌디에이고에서 게임을 할 때였는데, 우리나라 해군 장교들이 미국에 왔다가 우리를 응원하러 온 거야. 그 경기에서 우리가 이겼지. 자유투가 원 앤드 원(1구를 넣어야 2구를 던질 수 있었던 규칙)이던 시절이었는데, 아마 21개를 던져서 21개 들어가고, 마지막에 누가 쐈는지 모르겠지만, 그거 1개 빼고 다 들어갔었어. 연장전까지 가서 이겼는데, 그 배 함장이 점심에 우리를 초청해 함포도 조종해보고 그랬었지. 그때 우리를 후원한 게 자선단체라서 헌혈도 하게 되어 있었는데, 몇 명은 헌혈도 하고 미국 텔레비전에 좋은 면으로 많이 나오기도 했었어.

한국농구의 전성기를 열다
한국농구의 최고 전성기이자 대전환점을 이룬 것은 1969년 제5회 방콕 아시아선수권대회였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14위라는 저조한 성적을 냈던 한국농구는 이듬해 공식적인 아시아대회에서 첫 우승이라는 기념탑을 세웠다. 한국농구는 당시 최강이었던 필리핀을 발칵 뒤집었고, 1970년 또 한 번 제6회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아시아 최강의 자리에 우뚝 섰다. 두 대회 연속 한국남자농구대표팀을 이끈 것은 역시 김인건이었다.

Q. 1969년 방콕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농구 최초로 우승을 했습니다.
그 당시 우승 멤버가 미국 다니면서 같이 합숙한 멤버였어. 호흡이 잘 맞을 수밖에 없었지. 김영기 씨가 코치를 맡았던 그 대회에서 전승을 했으니까. 중국은 없었지만, 필리핀과 일본이 잘하고 우리보다 키도 더 컸었지. 우린 센터가 192cm 박한이 가장 컸으니까. 우리가 가장 작은 축에 속했지. 아시아에서 남자농구가 처음으로 우승한 대회였기 때문에 서울에 도착하니까 난리가 난 거야. 각 단체 및 청와대 조찬 초청이 있었고, 카퍼레이드도 했으니까.

Q. 그 당시 경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나요?
풀 리그로 했던 경기였기 때문에 마지막 경기를 우리와 필리핀을 잡아놨었어. 그런데 일본이 필리핀을 이겨버린 거야. 그래서 우린 일본과 경기를 갖고 마지막에 필리핀과 해서 결승을 두 번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어. 일본을 10점 이상 이겼는데, 3점슛이 없을 때니까 꽤 큰 점수차였지. 마지막 필리핀과 경기에서는 신동파가 날렸지. 우리나라에서는 라디오 중계를 하면서 난리가 났고, 필리핀에서도 프라임 타임에 계속 10번쯤 재방송을 해줄 정도였으니까. 그때 멤버가 김영일 이인표 신동파 신현수 서상철 박한 곽현채 유희형 조승연 이자영 최종규였거든. 유희형은 점프도 잘하고 몸싸움도 좋았어. 미국 가서 몸무게가 10kg은 쪄서 왔거든. 이인표는 돌파는 물론 골고루 잘했고, 김영일 씨가 수비와 피딩을 잘해줬지.

Q. 1970년 방콕에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또 따냈습니다.
원래는 이 대회를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발전을 위해 개최하려고 했는데, 체육관을 지을 여건이 되지 못해 반납한 대회였어. 그래서 방콕에서 또 하게 됐지. 2회 연속 우승한 게 우리밖에 없어. 예선을 거쳐서 결선 리그를 했는데, 이스라엘이 아시아로 나올 때였어. 우리가 이스라엘하고 하면 잘했어. 미군들하고 연습경기를 많이 했거든. 우리가 패스 게임이 많으니까 키 큰 상대하고 할 때 잘하는 거야. 밖에서 던지면 다 들어갔으니까. 농구를 재밌게 했었지. 이스라엘은 무섭지 않았어. 아마 15점씩은 이겼을 거야. 속공도 엄청 빨랐으니까. 반대로 필리핀은 이스라엘한테 절대 안 됐지. 우리가 예선 1위로 6개국이 벌이는 결승 리그에 진출했어. 우리가 필리핀한테 한 번 졌지만, 필리핀이 3패를 당하면서 우리가 1위를 차지했지. 아시안게임 개최 이후 최초의 금메달이었어. 그 이후에 1971년 동경 ABC대회에 나갔는데, 일본하고 필리핀한테 패하면서 뮌헨올림픽에 못 나갔어. 김영일 씨 빠진 자리가 너무 컸지.


엘리트 코스의 복귀
한국농구의 전성기를 이끈 김인건은 현역선수 생활 은퇴 후 또 다시 엘리트의 길을 걸었다. 한국은행 코치를 시작으로 지도자의 길에 접어든 그는 삼성전자 감독을 비롯해 프로농구 안양 SBS 감독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는 지도자의 길과 함께 업무에 치중했다. 학창시절 농구와 학업을 병행한 그것과 같았다. 2002년 농구선수 출신으로는 최초로 태릉선수촌장에 임명됐고, 3년의 임기를 마치고 지난 2008년 또 다시 태릉선수촌장으로 복귀했다.

Q. 은퇴를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은퇴할 당시에 더할 수도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서른만 되면 ‘할아버지’ 소리를 들었어. 동기들도 없으니까 빨리 은퇴를 하게 되더라고.

Q. 은퇴 후 한국은행에 입사했습니다.
당시 한국은행은 일반 사원들이 하는 일을 똑같이 했었어. 아침에 출근 도장 찍고, 잠깐 운동하는 거 보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와 일을 하고. 서울대 출신 사람들이 많았는데, 난 외환관리부와 해외건설부에 있었어. 태릉선수촌도 훈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산 관리부터 다 해야 되는데, 은행에서 선배들한테 배운 것들이 정말 도움이 많이 됐지.

Q. 이후 삼성에서 감독을 하셨습니다.
삼성에 있으면서도 농구만 했던 것이 아니라 삼성물산과 삼성전자 가서도 일하고 그랬지. 한국은행에서 11년, 삼성에서도 19년을 있었네. 최고의 직장에서 일했다는 자부심이 있어.

Q. 농구인으로서 태릉선수촌장을 맡으셨습니다.
1966년 6월 30일 태릉선수촌이 개촌했는데, 민관식 씨가 동경올림픽 갔다 온 뒤에 ????이러면 안 되겠다????고 해서 대통령께 건의해서 만든 거야. 꿈속에서 ????태릉으로 가라????고 그랬다 하더라고. 생전에 들었던 거니까 신기한 일이지. 그 당시는 청량리에서 불암산까지 1시간에 버스 1대가 있던 시절이거든. 우리는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이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양정모가 레슬링으로 땄는데, 스포츠 강국에는 선수촌이 다 있었어. 중국은 지금도 수십 군데 있고. 그만큼 태릉선수촌이 중요한 거야. 농구인으로서 처음 맡았다는 것에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고.

Q. 두 번째 태릉선수촌장을 역임하셨는데,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요?
전체 관리 지원을 하는 곳이지만, 여기도 농구 팀 일원이라 생각해. 양궁이나 레슬링 뿐 아니라 모든 종목이 따로 놀지 않고, 서로 격려할 수 있는 팀워크가 필요하거든.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이 잘 할 수 있도록 뒤에서 밀어주는 거지. 메달을 따거나 좋은 성적을 내면 대리 만족을 느끼게 되고. 나도 항상 인격적으로 대하려고 존댓말을 쓰거든. 서로 존중을 하면서 전 종목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김인건이 말하는 내 생애 최고의 순간
1969년 ABC대회도 그렇고, 1964년 도쿄올림픽도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재미있었고 뜻깊었던 대회는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우승 때였던 것 같다.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아시안게임에 참가했었는데, 미국에 있는 유학생들까지 불렀던 탓에 우리가 무척 힘들었다. 키도 크고, 힘도 좋았으니까. 그러나 게임은 우리가 이겼다. 그때 이스라엘을 대비해서 미 8군 선수들하고 연습을 많이 했던 덕분이었다. 다음 대회부터 이스라엘은 유럽으로 분류되어 아시안게임에 출전하지 않았다.
방콕 아시안게임은 8개팀이 풀리그로 경기를 펼쳐 메달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승을 거두고 필리핀에게는 근소한 차로 졌는데, 필리핀이 이스라엘에게 대패하는 바람에 득실차를 따져 한국이 금메달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때 멤버가 슈팅가드엔 유희형, 포워드엔 이인표, 파워포워드는 신동파, 센터는 김영일(작고), 그리고 나는 포인트 가드였다. 지금이야 3-4번의 포지션 역할이 분담돼 있지만 당시만 해도 싱글 포스트여서 3-4번이 모두 슛을 잘 던지는 사람이었다.
그때는 워낙 선수구성이 좋아서 분위기가 ‘이번에 우승하지 못하면 안된다’였는데 선수들이 너무 잘해서 오히려 선수 정신력이 해이해지지 않을까 코칭스탭에서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일부러 꼬투리를 잡아서 정신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합숙훈련할 때는 하루 휴가를 주곤 곧바로 30분후에 연락을 취해 빨리 들어오라고 했다. 그런 다음 시간에 못 맞춰 들어오면 정신력이 해이해졌다고 혼내는 그런 웃지못할 일도 있었다.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화는 농구선수들인 우리가 YMCA체육관에서 한달 동안 유도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필리핀 선수들은 워낙에 거친 플레이를 펼치는 바람에 우리가 많이 당했었는데, 한 달간 유도 연습을 하고 나니까 배짱이 생겨 대회 나가서도 싸움이 날 것 같으면 우루루 달려나가곤 했다. 그러면 필리핀이나 이스라엘 선수들이 도망갈 정도였다. 그때 기억이 많이 난다. 유도도 배울 수 있었고...

 

김인건은...
신동파와 함께 1960년대 한국농구를 이끈 김인건은 1944년 3월 11일 출생으로 경복중.고등학교와 연세대를 거쳐 한국은행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했다. 1960년대 대표팀에서 10년간 뛰며 1969년 ABC대회 및 1970년 아시안게임 사상 한국남자농구 첫 우승의 주역이 됐고, 한국은행 코치 및 삼성 감독, 국가대표 감독, SBS 감독 등을 맡았다. 또한 대한체육회 이사 및 대한농구연맹 부회장을 지냈으며, 태릉선수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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