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센터였냐고요? 달리는 빅맨이었죠”

김종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1-12-27 20: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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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17)] ‘리버스동기’ 조동기

농구대잔치 시절 프로 초창기를 지켜본 팬들이라면 센터 조동기(50‧197cm)를 기억할 것이다. 대학 시절에는 복병 중앙대의 주전 센터로 연세대, 고려대 돌풍에 맞서 싸웠으며 군에 입대해서는 이상민, 문경은, 조성원 등과 함께 상무 돌풍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이른바 덩치형은 아니었지만 잘 달리고 패스 센스도 좋았던지라 허동택 트리오가 맹위를 떨치던 당시 김영만과 더불어 기아자동차의 미래로 불리기도 했다.


중앙대, 상무 시절에 비해 프로에서의 성적만 놓고 봤을 때 조동기의 존재감은 흐릿한 것이 사실이다. 국가대표로도 뛰던 상무 시절, 수술을 받아야 될 큰 부상을 입고도 제때 치료를 하지 못했고 그로인해 통증을 달고 살며 30살의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택하고 말았다. 상무 제대 이후 기아로 돌아왔을 때는 점프도 제대로 못할 만큼 몸이 망가져 있었다.


“저 뿐만이 아니에요. 농구대잔치 때 잘했던 선수들 중 프로에 와서 왜 저것 밖에 못하냐는 소리를 들었던 선수가 다수 있죠. 이유는 단 하나에요. 부상관리.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아쉽지만 그러한 시절이 있었기에 몸 관리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겼고 지금은 잘 되고 있잖아요. 세상만사 다 이유가 있는거죠. 과정도 필요하고요”


농구인 조동기는 후회하기보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즐긴다. 이른 나이에 은퇴하기는 했지만 비교적 빠르게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부상 등 여러 가지 안타까웠던 기억이 경험으로 쌓여 선수를 아끼는 마음도 생겼다고 한다. 지나간 일보다는 미래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현재 춘천시 장애인 체육회 휠체어농구팀에서 감독으로 재직 중인 그를 만나 짧지만 강렬했던 선수 시절, 현재 진행형인 지도자 인생에 대해 들어보았다.
 

 

Q.어떻게 지내십니까?
현재 춘천시 장애인 체육회 휠체어농구팀 감독으로 있어요. 2019년 11월 춘천시에서 창단됐고요. 제가 여기 출신이라 고향에서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겠다 싶었어요. 국가대표 선수가 2명 포함되어 있고요. 얼마 전까지 리그가 있다가 3위로 마감을 한 상태에요. 그 외 한국유소년 농구연맹이라는 비영리법인을 가지고 있어서 얼마 전에 춘천에서 클럽별로 대회도 했어요.

Q.감독님이 농구연맹을 운영하시는 것인가요? 아니면 도와주는 형태인가요?
아, 제가 만든거죠. 나름 총재?(웃음) 대회를 꾸준히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일정에 변경이 생기거나 취소되는 경우가 많아졌네요. 이번에도 2주에 걸쳐서 하기로 했다가 1주하고 멈추게 된 상태입니다.

Q.어떤 계기로 휠체어농구팀 감독님이 되셨는지요?
WKBL, 중국 남자프로농구 등에 있다가 돌아와서 목동에서 한국유소년 농구연맹을 만들어서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춘천시에서 휠체어농구팀을 창단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처음에는 제가 할 것이다는 생각을 안했던 것 같아요. 후배 중에서 할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를 시켜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생각해봤는데 휠체어농구팀도 농구고, 고향이고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제가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어느덧 벌써 2년 정도가 흘렀네요.

Q.감독님 본인은 경험하지 못한 무대잖아요. 적지않은 어려움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그럼요. 같은 농구지만 많은 면에서 차이가 크거든요. 일단 휠체어를 다루는 스킬이 중요하고 룰이나 여러 가지 부분에서 다른 점이 꽤 있죠. 방송에서도 두 번 정도 얘기를 했던 얘기인데요. 아무래도 제가 장애인 농구를 직접적으로 경험해 보지 못한 상태니까요. 직접 장애인 농구를 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우리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죠. 그러다 보니 텃새 아닌 텃새 같은 부분도 느껴지고 그랬어요.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제가 볼핸들링 같은 것을 시켰더니 선수 한명이 ‘휠체어를 직접 타고 한번 해보라’고 시범을 요구하더라고요. 시키는 데로 휠체어를 탄 상태로 했었죠. 어찌보면 서로 믿음을 가져야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나중에 그 친구한테 얘기를 했어요. ‘너가 그렇게 요구를 해서 나도 어디가서 말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생겼다’라고요. 지금은 선수들도 잘 따라와 주고 해서 즐겁게 농구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팀에서 여기로 오고 싶어하는 선수들도 있더라고요.

Q.휠체어농구팀에서 뛰는 선수들도 일반 스포츠선수들처럼 연봉도 받고 스카웃 경쟁도 치열하고 그러나요?
여기는 실업팀이라서 월급식으로 받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연봉으로 따지면 많이 받는 선수들이 4,000~5,000만원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잘하는 친구들 같은 경우 대표팀 대회에 나가면 따로 수당같은 것도 발생하고요. 여기 같은 경우 시 소속이라서 공무원같은 대우를 받는 것 같더라고요. 호봉제가 있어서 오래 뛰고 호봉이 올라가면 금전적인 부분도 같이 올라가겠죠. 명절에는 보너스도 나오고 훈련수당이라는 것도 있어요. 1년에 한번씩 재계약을 하게 되고요. 3년이 지나면 선수가 원할 경우 이적이 가능해져요. 현재 1부리그가 6팀인데 실업팀 유무, 여러 가지 조건 등이 영향이 있는지라 3팀 정도에 잘하는 선수가 몰려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선수로 매진하는 경우와 본인 직업을 따로 두고 겸하는 두가지 케이스가 있어요.

 

 

“파워 대신에 기동성과 패싱센스를 활용했습니다”

Q.농구를 시작하시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갑자기 감독님에게 반말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 일까요?(웃음)

하하핫…,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요. 그때 주변의 권유로 축구를 잠깐 하고 있었어요. 한데 적성에 잘 맞지 않아서 곧 그만뒀고 다른 친구들처럼 지내고 있었죠. 예전 국민학교(초등학교) 운동회때 보면 모래 주머니같은 것을 던져서 박 터트리는 게임같은게 있잖아요. 그때 저는 키가 커서 박 뒤에서 잡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장학사 한분이 지나가다가 보고서 ‘쟤, 농구 한번 시켜보면 어떨까?’싶었나봐요. 그때 제가 있던 지역에는 농구팀이 있는 학교가 한곳 밖에 없었는데 거기로 연락을 주셨어요. 6학년 2학기때 쯤 연락이 왔고 그곳에 농구하러 몇 번갔는데 괜찮더라고요. 당시에 춘천중학교가 지역 내에서 제일 좋은 학교였어요. 농구로 거기를 가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부모님과 상의해서 하는 쪽으로 결정을 했어요. 그랬는데 운동 시작하자마자 급성골수염이 오른쪽 손목에 찾아와서 농구를 그만뒀었다가 1년 쉬고서 중2때부터 본격적으로 농구를 하게 된거죠.

Q.처음부터 포지션이 센터였나요?
다른선수들은 초등학교 3~4학년 그런 정도에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좀 늦은편이었죠. 하지만 키가 컸던지라 바로 센터로 들어가서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았어요. 중2때 182cm정도 되었으니까 저희팀에서는 제일 컸어요. 제가 뭘 하고 싶다고 해서 한 것이 아니라 감독님께서 ‘넌 이렇게 이렇게 훈련하고 플레이해’그러니까 시키는데로 한거죠.

Q.언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하셨나요?
성적이 본격적으로 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중3 때 종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면서부터에요. 그때 키가 192cm까지 자랐죠. 문경은, 전수훈 등이 이끌던 광신중학교하고 결승에서 붙었는데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어요. 그 당시는 몰랐는데 이미 그때 중앙대학교 정봉섭 감독님께서 눈여겨보고 계셨다고 하더라고요. 이후 고등학교에 올라가니까 중앙대 형님들께서 매년 전지훈련 때마다 오셔서 함께 훈련을 했어요. 당시 중앙대는 허재, 강동희 형님들이 계셨던 때니까 저희로서는 엄청난 경험을 쌓을 수 있었죠. 고교 시절에도 전국체전에서 준우승한적도 있었고 여러 대회에서 일단 출전하면 4강에는 들었어요. ‘농구는 센터놀음이다’는 말도 있잖아요. 팬들을 즐겁게 하는 화려한 플레이는 아무래도 가드 쪽에서 많이 나오겠지만 골밑이 튼튼한 팀이 좀 더 안정적인 성적을 내는 경우가 많죠. 시골 학교지만 좋은 빅맨이 하나 있고 후배들 중에 기량이 좋은 친구들이 함께해서 성적이 났던 것 같아요.

Q.당시 기준으로 신장은 좋은 편이었지만 센터를 보기에 웨이트가 약하다는 지적도 있어 왔어요.
그게 참 쉽지 않더라고요. 저같은 경우 운동을 하면 살이 빠지는 스타일이라 단순히 불리는 것도 어려웠어요. 그렇다고 모든 운동선수가 몸이 좋지는 않잖아요. 저도 골밑에서 몸싸움을 위해서라도 탄탄한 몸을 가지고 싶었어요. 하지만 체질이라는게 있나 봐요. 웨이트가 커지지 않았던 부분은 어쩔 수가 없어요. 하지만 선수에게는 각자의 체형이라는게 있는 것이고 거기에 맞춰서 플레이해야죠. 몸이 가벼웠던 만큼 기동성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경쟁했던 다른 빅맨들보다 좀 더 빠르게 뛸 수 있었던지라 그런 부분을 살려서 플레이하려고 했죠. 정통 센터하고는 살짝 거리가 있었지만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넓은 편이라서 지금으로 따지면 4번 파워포워드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Q.간혹 보여주시는 패싱센스가 남달랐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다른 빅맨들하고 많이 달랐던 부분이죠. 제 자랑같지만 패싱센스가 있는 편이었어요. 중앙대 시절에는 어지간한 가드보다도 어시스트를 많이 기록하기도 했으니까요. 추후 국가대표에 뽑혔을 때 정봉섭 감독님께서 ‘너는 이러이러한 부분에 강점이 있어서 대표팀에 뽑힌 것 같다’고 조목조목 찍어서 말씀을 해주셨던 기억도 납니다. 제 몸으로 정통센터처럼 플레이했다면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었겠죠. 거기에 고등학교 시절부터 감독, 코치님들께서 붙잡고 슛연습을 시켜주셔서 슈팅능력도 나쁘지 않았고요. 파워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을 기동력, 패싱센스, 슈팅력 등으로 커버해나갔죠. 저에게는 전화위복이 된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기자님들도 기사를 쓰실 때 ‘생각하는 센터’라는 표현도 종종 넣어주셨던 기억도 나요. 사실 제가 계속해서 체형이나 파워에 대한 얘기를 해서 되게 그런 쪽으로 비리비리했다고 오해하시면 안되요. 스스로 파워형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다른 쪽으로 발전했을 뿐이지 국내 무대에서 매치업할 때는 (서)장훈 정도 빼고는 힘이 부족해서 힘들다 그런 느낌은 받지못했던 것 같아요. 다만 국제대회에서는 달랐어요. 아시다시피 외국인 빅맨들은 신체조건, 운동능력 등에서 저희보다 월등한 것이 사실이잖아요. 한계를 많이 체감했죠. 힘은 물론 여러 가지면에서 힘들었습니다.

 

 

Q.말씀하신데로 패스도 잘하고 스피드도 빨랐잖아요. 혹시 포지션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신적이 있으실까요?
그러게요…, 지금 같으면 최대 3.5번까지도 해볼 것 같은데, 예전에는 그런 생각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중앙대는 일찍부터 틀을 많이 깨는 스타일이기는 했어요. 김영만, 양경민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주로 빅맨을 봤지만 대학에 와서 스윙맨 스타일의 3번으로 정착했잖아요. 물론 신장 자체가 애매했던 탓도 있겠지만요. 저같은 경우는 팀 내에서도 큰 편이었던지라 포지션 변경? 그런 것은 생각하기 힘들었죠. 특히 3학년 때는 저보다 큰 선수가 없어서 계속 빅맨을 봐야 했죠. 정경호 선배가 있기는 했지만 코트내 폭력사건에 휘말려서 징계를 받아서 개인적으로 부담이 좀 더 컸던 기억이 나요.

Q.정경호 선수요? 엄청 순둥순둥한 성격같아 보이던데요.
개인 성격을 떠나서 안 할 수가 없어요. 지면 죽으니까요.(웃음) 경기에서 지고 돌아가는 날에는 밤늦게까지 지옥훈련이에요. 그때는 경기 승패보다 살기 위해서 이기려고 했죠. 그러다보니 경기에 질 것 같으면 몸 안에서부터 피가 막 끓어오르는거에요. 승부욕에 생존본능(?)까지 함께 들어가는거죠. 조그만 충돌에도 발끈해서 같이 신경전 벌이다가 여차하면 서로 막 치고받고 패싸움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어요, 당연히 징계 같은 것이 뒤따랐고요. 그런 상황이 오면 설사 경기에 진다해도 ‘이것들이 그래도 승부욕은 있네’라고 생각해주시니까요.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매한가지다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이기려고 하는 거죠. 질 것 같으면 패싸움도 불사하고요. 저희만 그런게 아니라 다 비슷했을거에요. 거기에 특정 대학 인사들이 많을 경우 심판의 휘슬이 불공정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어요. 정감독님께서 그런 부분 때문에라도 자주 싸우고 그러셨어요. 저희도 덩달아 피가 뜨거워졌고요. 참 많이도 싸웠던 시절이네요.

Q.중앙대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표필상, 정경호 등 센터자원이 많았던 중앙대보다는 다른 대학이 출장시간 등에서 더 낫지 않았을까요?
이미 중학교때부터 친분이 쌓인 탓도 컷죠. 정감독님께서 오셔서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시고 가끔 운동화 선물도 해주시고 그랬어요. 이후 고등학교 때 연세대, 고려대 등에서도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지만 부모님께서 ‘힘들게 운동할 때 관심 가져주고 그런 분들을 배신하고 다른 곳을 가는 것을 도리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제 생각도 비슷했고요. 더불어 당시에 중앙대가 워낙 돌풍을 일으키던 시절이었잖아요. 선 후배 관계도 좋고 비교적 자유스럽다는 말도 들려왔던지라 더 호감이 갔죠. 장발에, 유니폼도 힙합식으로 입고 이모조모 좋은 요소가 많아보였어요. 물론 자유스러운 분위기, 좋은 선후배 관계와는 별도로 훈련 등에 있어서는 매우 강하고 엄격했다는 사실을 직접가서 느끼게 됐지만요. 정감독님께서도 훈련할 때 만큼은 완전 무서우셨어요. 하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당시 대부분 감독님들이 맹장이셨어요.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경희대, 명지대 등 안 무서운 감독님 없었을걸요. 센터가 많아서 후회된 적은 없었고요. 훈련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어요. 안성 2캠퍼스에 체육관이 있었는데요. 거기는 식사 때가 아니면 먹을게없어요. 외진 곳이라 뭘 사러갈 수도 없고요. 저같은 경우는 땀이 많이 나는 스타일이라 힘들 때는 조금 쉬어야 입맛이 돌아오는데 운동 끝나고 식당에서 바로 먹지 않으면 그 다음에는 다 치워버려서 먹을게 없어요. 제대로 식단조절이 안됐죠. 체질도 그렇지만 살이 찔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지금처럼 개개인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맞춤형 관리가 들어가는 시대가 아니었고 정신력, 투지만을 주로 강조했잖아요.

Q.정봉섭 감독 후임으로 강정수 감독이 부임하면서 주전센터로 올라섰다고 들었어요. 농구스타일 적인 측면에서 선수 조동기를 더 잘 활용하는 스타일이었던 것이죠?
저의 체형이나 플레이 스타일에 맞춰서 많이 뛰게는 해줬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은 정감독님도 마찬가지였고요. 두 감독님 모두 많이 가르쳐주시고 배려도 해주셨어요. 당시 강감독님은 최강팀 기아자동차에서 가드로 뛰다가 바로 지도자로 온 케이스에요. 28살 때라 선수급 나이였죠. 그러다보니 전술적인 부분이라던가 여러가지면에서 프로급 디테일을 보여주셨어요. 대신에 훈련량이나 그런 것에서 장난아니었죠. 하지만 그렇게 훈련을 했기에 당시 잘나가던 연세대, 고려대한테도 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전성기요? 부상관리에 실패했죠”

Q.중앙대 시절에 이어 실업팀마저도 김유택-한기범이 버티고 있는 기아자동차로 가셨어요. 주전 센터를 바로 보장받을 수 있는 팀은 없었을까요?
기아로 간다고해서 경기를 못 뛸 것이라는 생각은 크게 안했어요. (한)기범형이 노쇠화가 오던 시기라서 (김)유택이형이랑 뛰면 되겠다 싶었죠. 물론 다들 아시다시피 이후 기범이 형이 잠시동안 말년을 화려하게 불태우셔서 예상이 빗나갔지만요.(웃음) 심리적으로 기아가 편하기도 했어요. 허재형, (강)동희형, 유택이형, 기범이형 모두 친했거든요. 기아에서도 적극적으로 스카웃 제의를 해주셨고요. 

 

 

Q.상무 입대 이후 날개를 펴기 시작한 것 같아요.
기아에서 첫해에 농구대잔치 우승할 때 적게 뛰지는 않았어요. 이후 상무에 가서 주전 센터로 뛰게 됐죠. 뛸 수 있을 만한 빅맨이 많지 않았어요. 저하고 김재훈 선수 정도? (이)상민이, (홍)사붕이, (김)승기, (문)경은이, (조)성원이 등 선수구성도 좋았죠. 아쉬운 것은 제가 전성기가 짧았던게 상무에서 1년 정도 뛰었을 무렵에 무릎을 다쳤어요. 올림픽은 뽑혀서 나갔는데 그리 심각한 부상이라고는 생각을 안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악수가 된거죠. 여러 가지로 무지했고요. 당시에는 아프다고 하면 ‘뛰면 나아’ 그런 시절이었어요. 그러다가 기아로 복귀해서 제대로 검사를 해보니 반월판이 손상됐다고 하더라고요. 수술을 하고서 3년 정도 제대로 기량도 못 펼치고 고생만 하다가 은퇴하게 된거죠.

Q.97~98 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김유택과 함께 골밑을 지키셨어요.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센터 저스틴 피닉스가 태업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서 저와 (김)유택이형이 골밑을 지켜야했죠. 저같은 경우 정상적인 컨디션으로도 외국인 빅맨을 막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버거운데 몸까지 아팠으니 많이 어렵더라고요. 점프같은 것도 제대로 안 되던 때였거든요. 그 당시부터 농구를 보신 분들께는 제가 참 못했다고 기억될 수도 있는 거죠. 대학교 3, 4학년. 기아에서 1년, 상무시절 정도만 전성기였던거죠. 부상이 있다 보니 무슨 동작을 하려고만 하면 극심한 통증이 몰려와서 저도 모르게 자세가 무너지거나 안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레이업슛 각도도 잘 안나오고 포스트업할 때 턴 동작도 안되더라고요. 욕도 참 많이 먹었습니다.(웃음) 저도 아쉽고 팬분들께도 죄송했죠.

Q.당시 허재 선수의 투혼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어요. 옆에서 보신 모습은 어떠셨을까요?
챔피언결정전 준우승팀에서 최우수선수(MVP)가 나온 것은 당시에도 최초지만 이후에도 없지 않나요? 그것만으로 다 설명이 되죠. 베스트5 중에 외국인 선수가 2명이 뛰던 시절인데 거기서 외국인 선수가 한명이 사실상 뛰지 못했던지라 전력손실이 엄청났죠. 그런 상황에서 허재형이 없었으면 7차전까지도 많이 어려웠을거에요. 피닉스 선수가 기본만 해줬어도 우승팀은 달라질 수 있었다고 봅니다. 어렵사리 나왔다가 잠깐 뛰고 못 뛰겠다고 들어와 버리니 분위기만 망쳤다고 볼 수 있죠.

Q.함께 뛰어본 외국인 선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누구일까요?
클리프 리드하고 제이슨 윌리포드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리드는 첫 시즌부터 함께했고 윌리포드는 나래에 있다가 나중에 트레이드로 기아로 와서 같이 뛰어봤죠. 탄력이나 운동능력 등으로 팬들을 즐겁게 하던 화려함은 리드였지만 굉장히 지능적으로 영리하게 플레이했던 선수는 윌리포드였던 것 같아요. 각자가 자신의 장점으로 좋은 경기력을 보여줘서 아직도 많이들 기억하는 외국인 선수들이 아닌가 싶어요.

 


“여자친구요? 희선이와 함께 영화보러 다닌 기억 밖에 안나요”

Q.현재 KBL팀중에서 ‘선수 시절의 내가 뛰면 잘 맞겠다’는 팀이 있으실까요?
허허헛…, 글쎄요. KGC는 친구가 감독으로 있어서 가기가 그럴 것 같고요.(웃음) KCC는 많이뛰는 팀컬러라는 점에서 제가 가면 송교창 선수와 잘 맞으려나요? 라건아도 있으니 속공상황에서 2m에 가까운 선수가 셋이나 동시에 뛰어 들어가면 상대팀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기는 하겠네요.

Q.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아들 녀석이 하나 있어요. 지금 중1이고요. 서울 삼선중학교에서 농구하다가 지금은 몸이 안 좋아서 춘천에 함께 있어요. 신장은 180cm정도되요. 강원사대부고 김희선 감독 밑에서 농구를 배우고 있는데 선수의 길을 걸을 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요.

Q.김희선 감독님 얘기가 나와서 여쭤보는 것인데, 두분이 많이 친하신 것 같아요.
고향 후배고, 학교 후배고 하니까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냈죠. 제가 중앙대를 가면서 (김)희선이를 땡기기도 했고 여자농구계로 갈 때도 함께 했죠. 제가 중앙대 3학년 때 1학년으로 희선이가 들어왔어요. 토요일에 오전 운동 끝나면 오후에 농구단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고 춘천에 가서 일요일에 만나 교회도 가고 영화도 함께 보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음악도 좋아하고해서 CD도 사고 새벽에 만나서 팀에 복귀하고 그렇게 돌아다녔어요. 건전하게.(웃음)

Q.두분이서 영화를 보셨다고요? 여자분들은 안만나셨나요?
당시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운동하기 바빴죠. 합숙 생활을 하고 잠깐 시간이 나면 춘천으로 내려가니까 연예를 할 상황은 아니었어요. 미팅은 해봤지만 잠깐의 만남으로 좋은 사람을 만들기는 어려웠다고 봐야겠죠.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고요.

Q.36세때 결혼을 하셨는데 사모님께서 11살이 어리셔서 ‘도둑이다’는 소리도 들었다면서요?
은퇴를 하고 중앙대 대학원을 가려고 준비를 했다가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도 좋지 않겠냐’는 얘기도 있고 해서 은퇴 바로 다음 해인 2003년 1월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어요. 미국에 외가 식구들도 많이 살고 해서요. 4년 동안 미국대학팀에서 외국인코치로도 있었는데 거기서 아내를 만나게 됐죠. 당시 아내는 대학생이었어요.

Q.앞으로 계획하고 계신 일 등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글쎄요. 지금 하고있는 일부터 잘하는게 가장 우선이고요. 휠체어농구 국가대표 감독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데 기회가 주어진다면 열심히 하고 싶어요. 비장애인이기는 하지만 현장에서 지도를 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이번에 공고가 나서 지원서를 넣었는데 자격이 조금 부족하더라고요. 휠체어농구팀 선수로 7년 혹은 지도자로 5년 이상을 해야 된다는 자격요건이 있는데 아쉽게 아직 못 미치는 상황입니다. 매년 정관개정을 한다고 하는데 혹시 개정된 룰에 포함될 수 있다면 기회를 받는 것이고 아니면 조금 더 기다리면서 경력을 쌓아나가야겠죠. ‘내가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면 어떻게 선수구성을 하고 전략을 짜봐야겠다’는 생각은 종종 해봤습니다.(웃음)

Q.마지막으로 여전히 선수 조동기를 기억하고 있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농구대잔치 시절 등 인터뷰를 하다 보니 옛날 생각이 많이나네요. 정말 좋은 추억이 많았던 것 같아요. 더 오랫동안 선수 생활하면서 좋은 모습 보여줬으면 좋았을 텐데 살짝 아쉽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는 크리스찬입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나 생각해요. 선수 생활 그리고 이어진 지도자 생활 현재의 휠체어 농구팀 감독까지, 나이를 먹다보니까 여전히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계시고 지도자로서 코트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져요. 더불어 다시금 농구의 중흥기가 찾아와서 농구대잔치 시절의 폭발적인 인기를 되찾았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코로나로 인해 겨울이 더욱 추워지고 있지만 다들 함께 기운 내시고 따뜻한 연말연시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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