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이현중 엄마로 더 유명하죠”

김종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2-01-03 18: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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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18)] LA올림픽 은메달 주역 성정아(상)

 

최근 농구계에서 농구인 2세 열풍이 거센 가운데 누구보다도 부러움을 사는 이들이 있다. 먼저 원주 DB 허웅, 수원 kt 허훈 형제의 부친 허재가 떠오른다. 현역 시절 ‘농구대통령’으로 불렸던 그는 아들 둘이 모두 소속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는 것을 비롯 리그를 대표하는 인기스타로 성장하며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폈다. ‘이제는 허재라는 이름보다 웅이와 훈이 아빠로 불러달라“며 너스레를 떨 정도다.


그런가운데 잘나가는 허재가 전혀 부럽지않은 농구인 엄마 아빠가 있다. 다름아닌 데이비슨대 이현중(21·201cm)의 부모인 이윤환, 성정아 부부가 바로 그들이다. 국내 2번째 NBA리거에 도전중인 이현중은 차근차근 자신의 꿈을 향해 다가가고있는 모습으로, 그로인해 일거수일투족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있는 모습이다. ’국내 농구 인기를 허웅, 허훈 형제가 책임지고 있다면 해외농구에 대한 관심은 이현중이 끌고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허재가 그랬듯 이현중의 모친 성정아(56‧184㎝) 역시 한시대를 풍미했던 여자농구 레전드중 한명이다. 삼천포여자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85년에 삼성생명 전신 동방생명에 입단해 농구대잔치 5회 우승에 기여했으며 1989년에는 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대 쾌거 중 하나인 1984년 LA올림픽 당시 여자농구 은메달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두고두고 회자되는 모습이다.


”주변 지인들이 그러더라고요. 성정아가 잊혀질만하니까, 아들이 뜨고 있다고. 이제는 과거의 스타 성정아보다는 현중이 엄마로 더 유명해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더 기분은 좋네요. 솔직히 엄마로서 다른 욕심은 없어요. NBA도 가고 잘되면 좋겠지만 그렇지않더라도 아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현중이의 NBA행을 바라는 것도 결과물에 대한 것보다는 아들이 원하는 꿈이니까 응원하는 이유가 커요.“


<농구人터뷰>에서는 2022년 새해 첫 인터뷰로 최근 가장 핫한 농구 모자 엄마 성정아, 아들 이현중의 이야기를 2부작에 걸쳐 다뤄보려고 한다. 1부에서는 이현중의 어머니 성정아의 농구인생, 2부에서는 어머니 성정아가 말하는 아들 이현중의 이야기로 구성했다.

Q.어떻게 지내십니까?
아시다시피 (이)현중이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고 있고 딸아이도 지난 9월에 미국에 공부하러간 상태인지라 지금은 살짝 여유가 생겼어요. 친정도 갔다가, 시댁도 갔다가 그러면서 잠시 쉬고있는 상태에요. 아들 농구 경기는 꾸준히 보고있고 농구장도 종종 다니고있어요.

Q.교직생활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24년 정도 하다가 지난해 2월에 명예퇴직을 한 상태에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니 시간 맞춰서 아들 경기 챙겨보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무릎이 아파서 안되겠더라고요. 선수시절 때 다쳤던 부위인데 여전히 속을 썩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어머니 농구대회 같은 곳도 나가서 조금씩 뛰고 그랬는데 자꾸 안좋아져서 지금은 마음 편하게 농구 한게임 뛰기도 쉽지 않아요. 명색이 체육선생인데 앉아서 지시만해서는 곤란하잖아요.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남편도 이제 그만 쉬어도 될 것 같다고 말해줘서 용기있게 그만두게 되었어요.(웃음) 그래도 선수 생활 끝나고 대학도 갔다가 교직생활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래저래 다행이고 감사한 일 같아요.

Q.과거의 스타로 가끔 회자되시다가 요새는 다른 쪽으로 언론에 노출될 일이 많아지셨어요.
아무래도 그렇죠. 현중이가 요새 관심을 많이 받고 있으니까요. 사실 저도 거즘 잊혀졌다가 현중이 덕분에 다시 언급되는 것 같아요.
 

 


Q.따님도 혹시 농구를 하고 있나요?
딸아이 같은 경우는 농구를 하다가 현재는 그만두고 다른 길을 가고있어요. 사실 처음에 농구를 시킬 때 고민을 많이했어요. 부모가 모두 선수 출신이고 키가 큰지라 딸도 적지않은 신장으로 자랄텐데, 그럴거면 농구를 하는게 좋지않을까 싶었거든요. 왜냐면 큰 사람이 그렇지않은 사람들 틈에 있으면 그것은 그것대로 스트레스가 될 수 있잖아요. 성장판을 검사해 봤을 때 187㎝가 나오더라고요. ’아,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농구를 하고 싶어도 키가 안되서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여자 키가 그 정도되면 일반적으로 다른 것을 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하지만 저도 너무 성급했죠. 한쪽으로만 생각했어요. 운동신경도 나쁘지않고 감각도 있는편이에요. 문제는 성향이죠. 동생 현중이와 달리 딸아이는 농구를 미친 듯이 좋아하지도 않고 성향도 잘 맞지 않았어요. 적어도 선수를 꿈꾸려면 정말 해당 종목에 애정이 깊던지 아니면 이를 악물고 끝까지 해낼 목적의식 등이 동반되어야해요. 단순히 키가 클 것 같아서? 다른 것보다는 농구를 하는 쪽이 나을 것 같아서? 그것은 아니었던 것이죠. 16세이하 대표선수로 뽑히기도했고 하은주 선수가 다녔던 일본 오호카고등학교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와서 유학도 가고 그랬을 정도로 재능은 어느 정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딸아이는 농구를 하는 과정 자체가 행복하고 즐겁지 않았어요. 그냥 해야되는 상황이니까 하는 정도였던 것이죠. 어느날 ’운동은 맞지않는 것 같으니 공부 쪽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더라고요. 본인이 원하는 쪽으로 선택하는게 맞겠다싶어서 그러라고 했어요.

Q.그럼 따님은 지금 187㎝까지 큰것인가요?
너무나 감사하게도 178㎝에서 멈췄어요.(웃음) 키가 많이 클것이다고 예상해서 처음부터 빅맨쪽으로 트레이닝을 받았는데 신장도 애매해졌고 그정도 신장이면 운동을 안해도 눈에 많이 띌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본인이 농구에 대한 애정이 컸다면 포지션 전환 등에도 노력을 했겠죠. 딸아이는 다른 길을 가고싶어 했고 일본에서 돌아와 국내 학교에 재입학해서 공부에 매진했어요. 다행히 경희대 스포츠의학과에 합격했고 스포츠 심리학 등에도 관심이 많아서 현재는 공부를 하러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본인이 자신의 길을 확실하게 설정해 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뿌듯합니다. 억지로 운동을 이어나갔으면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되었을 수도 있잖아요.

Q.지난 8월에 WKBL 재정위원장이 되셨어요. 재정위원장이면 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인가요?
선수나 심판 등 WKBL 소속 농구인들이 규정에 어긋난 행동 등을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한 논의 등을 다루는 자리라고 보시면 되요. ’어떤 문제에 대해서 재정위원회가 열렸습니다‘라는 말 가끔 들어보셨을거에요. 조금이나마 여자농구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Q.남편분과 함께 KBL 올스타전 덩크슛 콘테스트 심사위원으로 초청되셨어요.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보실 생각인가요?
사실 덩크슛은 크게 중요하게 눈여겨보고 그러지 않았던 부분이에요. 저희 현중이가 폭발적인 탄력으로 막 뛰어올라서 덩크슛 찍어대고 그런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그러다보니 덩크슛이 멋있어보여도 ’아니야 덩크슛이 중요한게 아니야‘라고 애써 외면할 때도 많았죠.(웃음) 올스타전 덩크슛 콘테스트는 팬 분들을 즐겁게 하는 자리잖아요. 그부분에 전문가는 아니지만 내눈에 멋있고 화려하게 잘들어오는게 최고가 아닐까요. 즐긴다는 마음으로 인상적인 장면에 점수를 줄 생각입니다.

 

 


”어릴 때는 너무 말라서 운동한다고하면 걱정부터 받았습니다 “

Q.육상으로 먼저 빠질뻔 했다면서요?
제가 어릴 때 엄청 말랐었어요. 학교를 가면 하얗고 마르고 하니까 선생님들께서 ’오늘 집에 가면 엄마랑 병원 한번 가봐‘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보기에만 그럴뿐 아픈데도 딱히 없었고 몸은 건강한 편이었어요. 달리기 같은 것을 하면 상당히 빨랐어요. 그러다보니 선생님들께서 육상 한번 시켜보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어요. 당시 저희 이모가 교직생활을 하고 계셨거든요. 그래서 이모 친구 중에 육상을 전공하신 분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육상 너무 힘들다. 힘든만큼 비전도 높지 않은 편이다‘며 부정적인 반응이셨어요. 그래서 부모님께서 생각하셨던게 농구였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전자제품 대리점을 하셨는데, 그 대리점 앞에서 어머니가 가져오신 비치볼 같은 것을 던지고 받고 했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가 진주 외갓집 동네에 농구를 하는 초등학교가 있었어요. 당시에 저는 농구가 뭔지 전혀 몰랐거든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농구를 하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이죠. 시골 아이들 불러서 대충 숫자맞추고 농구하던 상황에서 저처럼 농구를 위해서 전학까지 갔던 케이스는 매우 드물었다고 들었어요. 그때 코치 선생님께서 제 손목을 잡아보시더니 ’이 팔로 농구를 할수 있겠냐‘고 걱정어린 표정부터 지으시더라고요.

Q.몸은 말랐어도 열심히 하셨을 것 같아요.
맞아요. 제가 승부욕이 정말 강했어요. 몸은 말랐지만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밖으로 나가는 공도 잡아내려고 몸을 날리는 등 정말 열심히 했어요. 아버지께서 그런 저의 모습을 무척 좋아하셨어요. 추리닝 사다가 입히고 이런저런 얘기도 많이 해주시면서 관심을 보이시는 등 딸이 운동하는 모습이 흐뭇하셨나봐요. 엄마로서 아이 둘을 키워보니까 적성, 체질 이런게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껴요. 동적인 활동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고, 반대의 경우가 있어요. 저는 움직이는 것을 완전 좋아했어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놀러나갔다가 저녁에 어두워질 때 쯤 집에 들어올 때가 대부분이었을 정도로 나가서 뛰어노는게 즐거웠죠. 활동성이 강한 아이다 보니까 운동이 잘맞았어요. 그런 점에서 아이들에게 길을 만들어줄 때는 성향을 잘 파악하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활동성이 강한 아이는 많이 뛰고 돌아다녀야 하는데 부모 욕심에 공부시킨다고 억지로 책상에 앉혀놓으면 잘될 가능성도 떨어지고 일단 아이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해요.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겠고요. 엄마가 되다보니까 더욱 많이 생각하는 부분이네요.

Q.운동 선수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어머님께서 운동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지금 지나고나서 생각해보면 어머니께서 ’너는 운동을 해도 대학을 꼭 가야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요. 그러다보니 머릿속에서 운동을 하더라도 공부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박히게된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운동을 잘 알지는 못하셨지만 비전과 적성 등을 고려해서 육상보다는 농구를 추천하셨고 공부도 계속 강조하셔서 선수생활 마치고 대학도 가고 현재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셨죠. 아, 여기서 한말씀 드릴께요. 제가 자꾸 농구가 육상보다 낫다고 말한 것 같은데 그것은 저의 입장과 당시 상황이 반영된 것입니다. 같은 스포츠인데 뭐가 낫다 아니다가 있을 수 있겠어요. 육상도 잘하면 스타도 되고 돈도 많이 벌죠. 개인별로 다를 수 있는겁니다.

Q.신장은 어릴 때부터 좋으셨나요?
아니요. 어릴 때는 키가 크지 않았어요. 나중에 큰거죠. 초등학교 시절 농구를 할 때 시합을 나가서 실내체육관 등에서 중 고등학교 오빠들과도 종종 마주쳤거든요. 그때 오빠들이 저를 불러서 ’너는 지금은 작지만 나중에 180㎝이상으로 클 것 같다‘고 말해줬던 기억이 나요. 사실 농구하는 사람들은 딱보면 어느 정도는 파악이 되거든요. 당시 저는 마르고 작았지만 다리가 길고 그런 체형이어서 키가 안클거라는 생각은 들지않았어요. 어쨌든 오빠들이 그런 말을 해주면 기분은 참 좋더라고요.

 

 


”앞이 안보이던 그 당시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Q.어릴 때 영양실조로 시력을 잃으뻔한 일도 있었다면서요?

부모님이 너무 마음 아파하셨죠. 지금보면 진주하고 삼천포가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닌데 당시에는 굉장히 멀게 느껴졌어요. 하숙을 했는데 그때 몸이 좀 망가졌던 것 같아요. 운동량은 어마어마한데 잘 챙겨먹지도 않고 그러다보니 이상이 온거죠. 어머니가 옆에 있었으면 억지로라도 뭘 챙겨먹이고 그러려고 하잖아요. 부모님하고 떨어져 있다보니 그렇게 정성스럽게 챙겨줄 사람도 없고 저도 몸관리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어요. 힘들게 운동을 하면 그만큼 잘 먹어주고 그래야 하는데요. 나중에는 시력이 확 떨어지면서 공도 흐릿하게 보이고 플레이가 잘 안되고 주말에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되는데 번호판까지 안보이는거에요. 어찌어찌해서 집에 갔다가 그날 저녁은 그냥 보냈는데 다음날 아침에 밥을 먹는데 안갯속에 있는 듯 시야가 뿌옇더라고요. 그래서 ’엄마, 집이 왜 이렇게 어두컴컴해‘라고 말했더니 부모님이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하신거죠. 동전을 보여주면서 ’이것 보이냐?‘고 물어보시는데 그것도 안보이는거에요. 당시 진주에 하나 밖에 없는 안과를 데려가서 일주일 정도 치료를 받았던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도 ’농구 그만하자‘고 진주로 다시 전학을 시키셨어요. 딸이 맹인이 될수도 있는데 농구가 문제였겠어요.

Q.다행히 치료가 되셨네요. 농구도 다시 할 수 있었구요.
당시 안과에서도 ‘이러다가 시력을 영영 잃을 수도 있겠다’고 말했고 아버지께서 깜짝 놀라셔서 저를 데리고 부산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셨어요. 전자대리점 문도 닫아놓고 동분서주하셨죠. 다행히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하다보니까 시력이 돌아왔어요.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지자 삼천포에 계신 감독 선생님께서 다시 저를 데리러와서 농구를 재개할 수 있었어요. 그때를 계기로 영양상태 등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됐어요. 사실 지금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죠. 당시니까 일어나 해프닝이었고,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Q.본래부터 포지션이 빅맨이었나요?
키가 늦게 자란 편이라 어릴 때는 가드나 포워드로 주로 뛰었어요. 내외곽을 오가고 패싱게임하고 이것저것 다했죠. 생각해보면 전화위복이 된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빅맨으로 고정되면 할 수 있는게 한정적이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같은 경우 자라면서 키가 큰 케이스인지라 이것저것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었죠. 그렇게 안 크던 키가 중학교 올라가면서 10㎝정도씩 크고 중3 정도 되어서 성장이 멈추더라고요. (박)지수만 봐도 그래요. 지수가 저희 딸보다 2년후배거든요. 지수도 어릴 때는 키가 크지 않았어요. 저희 딸보다도 작았거든요. 그러다보니 볼핸들링 등 작은 선수들이 주로하는 플레이부터 경험했고 차츰 신장이 좋아지면서 기술까지 겸비한 빅맨이 될 수 있었죠. 저같은 경우 중학교 들어가면서 키가 확 커지니까 선생님께서 센터를 시키시더라고요. 처음에는 적응이 잘안되었어요. 가드나 포워드는 림을 보면서 플레이하는데 빅맨은 림을 등지고 하는 거잖아요. 생소하기도하고 몸싸움도 많아지다보니까 겁이 덜컥 나더라고요. 하지만 하다보니까 점점 적응이 됐어요. 특히 가드, 포워드를 보면서 익혔던 시야와 패싱능력이 빅맨이 되어서도 장점으로 작용했어요. 플레이에 여유가 생기면서 적응해가기 시작했죠. 정통센터는 아니지만 이것저것 다하게 되면서 대표팀에서도 4번 역할까지 할 수 있게 됐어요.

 

 


”어이, 너 나중에 포장마차하면 잘하겠다.“

Q.어린나이에 국가대표가 되셨어요.

처음 대표팀에 뽑혔을 때 가장 좋았던 것은 식당이었어요.(웃음) 사실 저희 어릴 때 불고기나 스테이크 같은 것 쉽게 접할 수 없었잖아요. 80년대 초반이니까요. 식당에 가보니 난생 처음 보는 음식도 많고 정말 입이 떡 벌어지더라고요. 고등학교 때였으니까 먹고 싶은 것도 실컷 먹고 웨이트트레이닝도 체계적으로 하게되고 그랬어요. 언니들같은 경우 연륜이 있으니까 적당히 조절도 하고 그랬는데 저는 어리니까 뭘 알겠어요. 시키면 시키는데로 무식하게 했죠. 결과적으로 좋은 쪽으로 작용했어요. 잘먹고 운동 열심히하니까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워낙 열심히하니까 트레이너 선생님께서 우스갯소리로 ’너, 선수 생활 마치면 내밑에 와서 일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요. 몸이 좋아지면서 힘도 붙고 신기했어요. 다른 종목 선수들 사이에서 ’여자 농구에 성정아라고 있는데 힘이 장사다‘는 말까지 돌 정도였으니까요. 제 평생에 그런 소리를 다 들어볼 줄은 몰랐죠. 몸에 근육이 생기면서 골밑에서 버틸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현중이도 저랑 비슷한 체질같아요. 처음에는 말랐다가 웨이트 트레이닝 등을 체계적으로 하다보니까 힘이 많이 붙었잖아요. 선생님께서도 그러시더라고요. 마르긴했지만 힘이 없는 몸이 아니라고. 근육량이 늘고 힘이 세지다보니까 몸싸움이나 버티는 동작 등에서 자신감도 생기게 됐죠.

Q.선후배문화가 존재하는 한국 농구계에서 너무 이른 나이의 국가대표 발탁도 좋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래도 선배 언니들이 막내라고 많이 챙겨주시고 잘해줬어요. 저보다 9살 많은 홍혜란 언니와 한방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전 프로농구선수 이광재 어머니로도 잘 알려져 있는 분이죠. 언니들이 그러길 ’정아는 눈치가 빠르다‘는 말을 종종 하셨어요. 뭐가 필요한지 잘 보고 있다가 말이 나오기 전에 미리미리 하려고 노력했죠. 그러다보니 혼이 나거나 나쁜 소리 들을 일이 별로 없었어요. 단 훈련할 때는 많이 힘들었어요. 누가 괴롭혀서 그런게 아니라 제가 훈련시에 요령이 부족했던거죠. 아무래도 언니들은 노하우가 있다보니 힘을 줄 때 주고 뺄 때 빼고하면서 완급조절을 하는데 저는 무작정 풀파워로 뛰어다니니까 아무리 젊어도 체력적으로 힘들더라고요. 그런 것은 누가 가르쳐서 되는게 아니죠.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깨우쳐야 되는 부분입니다. 어쨌든 훈련적인 부분은 경험 부족으로 어렵기도 했지만 그 외 생활적인 부분에서 언니들이 선배라고 괴롭히거나 힘들게 한 것은 없었어요.

Q.그래도 막내 신분인지라 운동 외적으로 할 것은 많았을 것 같아요.
아, 그런 것은 어쩔 수 없죠. 이런저런 잡일은 엄청 많이 했습니다. 누가 시켜서라기보다는 당연히 후배가 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지금처럼 매니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후배가 알아서 맡아서 하고 나이가 차면 자연스럽게 안하게 되고 그랬죠. 제가 대표 선수 생활을 9년을 하는 동안 막내만 7년이었어요. 스텐으로 된 무거운 가방이 있어요. 짐으로 못보내고 가지고 다녀야될 상황도 많았는데 그것 들고, 제 가방들고 거기에 작전판이나 물통 등 이것저것 챙기다보면 장난아니죠. 언젠가 생수 회사에서 생수가 지원이 들어왔는데 플라스틱 박스로 꽉꽉 채워졌는데도 양이 엄청났어요. 1층 바닥에 내려져 있는 것을 들고 올라가서 하나하나 닦아서 윗층 냉장고에 채워 넣어야 하는데 하나씩 들고가자니 엄두가 안나는거에요. 그래서 리어카를 하나 빌려서 다섯박스씩 실어서 옮기고 그랬어요. 어린 선수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다른 종목 선수들이 지나가다가 ”야, 너 나중에 포장마차하면 잘하겠다“고 놀리고 그랬던 기억도 나네요. 그렇게 냉장고 가득 채우고 빈병은 정리해서 다시 가져다 놓고 정말 일이 많았어요.

Q.빨래도 해야 됐을 것 아니에요?
당연하죠. 저녁에는 빨래를 해야 되죠. 팀 스포츠다 보니까 타월, 조끼 등 빨랫감이 얼마나 많아요. 많은 양을 매일매일 빨아야 되는데 선수촌이다 보니 각 종목 별로 저같은 친구들이 가득할 것 아니에요. 세탁기 앞으로가면 줄지어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사용하기가 힘들어요. 어쩌겠어요. 시간은 정해져있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잖아요. 당시 목욕탕은 대중 목욕탕하고 비슷하게 생겼어요. 거기에 주저앉아서 직접 손으로 빨았어요. 제가 다한 것처럼 말씀드렸는데, 진짜 다했어요.(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일을 다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이 산더미였어요. 지금은 선수들이 얼마나 행복해요. 운동만하면 되니까요. 다른 종목도 마찬가지였을거에요. 막내들은 정말 잡일하다가 시간 다갔어요. 개인 시간은 생각하기 힘들었죠.

 

 


Q.그럼 정작 중요한 운동 경험은 많이 못쌓았을 것 같아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저는 시합도 많이 뛰었어요. 고1때는 백업으로 뛰었지만 고3부터는 주전으로 활약했어요. 체력이 한창 좋을 때는 정규게임은 물론 가비지게임까지 다 소화했어요. 고등학교 남자팀이랑 연습경기 할 때도 있었는데, 어찌보면 저랑 같은 또래잖아요. 하지만 주눅들지않고 남자부 선수들 뒤에서 몸싸움하면서 리바운드도 걷어낼 정도로 힘, 체력 다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발목이 돌아가기도 했는데 조금 쉬었다가 다시 뛰고 막 그랬어요. 그 정도 아픈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부분도 있었어요. 기계도 어느 정도 돌리면 쉬어줘야하잖아요. 하물며 사람 몸인데요. 젊은 것만 믿고 막 그렇게 하는게 아니었어요. 쉴 때 쉬면서 해야 능률도 있는 것인데요. 독이 된 부분도 있죠.

Q.1984년 LA 올림픽을 앞두고 프레올림픽에서 성적이 엄청 안좋았어요.
그때 정말 안풀렸어요. 중국한테 74-34인가? 40점차 정도로 완패를 했고 다른 경기들도 제대로 해본 것이 없다고 느껴질만큼 축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죠. 왜 그랬는지 뭘해도 안될 정도로 최악이었어요. 다행히 공산국가들 보이콧으로 인해 저희가 나가게 됐는데 다들 ’뭐하러 나가냐? 국가망신 또 시키려고‘그런 분위기가 가득했어요. 만약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된 시기 같았으면 말 그대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을거에요. 저희로서는 다행이라고 해야할까요.(웃음)

Q.LA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하며 대반전 드라마가 만들어졌어요.
어차피 저희한테 기대한 사람도 거의 없고 마음을 비우고 있었죠. 하지만 당시 감독님, 코치님 그리고 언니들까지 그대로 주저앉기는 싫었던 것 같아요. 올림픽 나가기 한달 정도는 말 그대로 죽을만큼 열심히 훈련했어요. 뛰다가 근육이 파열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때 (박)찬숙 언니가 주장이었는데 감독님과 얘기해서 오전 운동을 쉬었는데 그게 정말 꿀맛 같았을 정도로 훈련량이 어마어마했어요. 저야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궂은일 전문이었죠. 어차피 막내인데 하자는데로 열심히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고 언니들이 많이 이끌어줬죠. 당시 조영란이라고 엄청 잘하는 언니가 계셨는데 대표팀을 나가게 되면서 제가 대신 빈자리를 채우게 됐어요. 핵심 선수가 빠진 빈자리가 딱 제 포지션이었고 이래저래 타이밍도 잘 맞았던 것 같아요.

Q.당시 미국 외에 어떤 나라가 많이 힘드셨나요?
호주는 당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호주 정도야 뭐‘라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으니까요. 호주가 만만했다기 보다는 더 센팀이 많았던 이유가 커요. 언급하신 미국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그 외 유고슬라비아, 캐나다 등이 특히 버거웠어요. 잘하기도 했지만 워낙 큰 선수들이 즐비하니까요. 제가 맨발 신장이 181.6cm에요. 키크고 비율좋은 서구 빅맨들과 매치업될 경우 상대 선수 엉덩이가 제 가슴 쪽에 닿을 때가 있을 정도로 격차가 컸어요. 쿠바에도 흑인선수들이 많은데 매치업시 몸을 부딪히면 특유의 미끌미끌한 느낌이 맨살에 전해지는데 이질적이었던 기억도 나요. 더 큰데다가 힘도 좋고 탄력도 좋고 정말이지 ’어떻게 막아야 하지‘ 막막했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악으로 깡으로 수비하고나서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면 온몸이 맞은 것처럼 아프더라고요. 솔직히 말하면 다 힘들었습니다. 더 힘들고 덜 힘들고의 차이만 있었을 뿐 세계대회에서 저희팀이 쉽게 볼만한 팀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죠. 아시잖아요. 세계 무대에서의 격차를.

 



”부상으로 지긋지긋하게 고생했어요“

Q.실업무대에 들어오기전 스카웃 경쟁이 치열했다고 들었어요.

이미 그때는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으로 결정이 난 상태였어요. 시끄러웠던 것은 중학교 2학년, 3학년 그때죠. 결국 고등학교 2학년때 스카우트 파동으로 징계를 받게 됐어요. 프레올림픽으로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1983년 브라질 세계선수권대회도 못나갔어요. 태평양과의 가계약이 잘못되면서 생긴 문제였죠. 고등학교때 태평양에서 저를 데려가고 싶어 했고요. 현대도 비슷했어요.

Q.정작 들어오셔서는 부상으로 엄청 고생하셨죠?
앞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기계도 너무 많이 쓰면 고장나는 것이잖아요. 확실히 몸에 과부화가 걸렸던 것 같아요. 프레올림픽 갔다와서 바로 세계청소년여자농구선수권대회를 나갔거든요. 예선에서 미국, 소련, 호주도 이기고 잘나갔어요.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석연치않은 심판 판정 등이 겹치며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어요. 청소년대회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심판콜 등이 나오게되면 당장의 손해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거든요. 어쨌거나 거기까지는 마무리를 잘했어요. 다만 당시 동방생명과 동료들에게 미안한 부분이 있어요. 본래는 고등학교 3학년생도 팀에 입단을 한 상태에서는 경기를 뛸 수가 있었어요. 안타깝게도 딱 저희 학년만 뛰지못했어요. 아마도 저로 인해서 그랬겠죠. 스카우트 파동으로 인해서요. 그렇게 한시즌을 날려버리고, 세계청소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도 준우승이라는 성적까지 거두고 돌아왔는데 정작 저를 데려온 팀에는 제대로 보탬을 주지 못했어요. 여름훈련기간에 크게 다쳐버리고 말았죠.

Q.치명적인 부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실 것 같아요.
그렇죠. 당시 체육관 바닥에 니스칠을 한 것 같았어요. 연습경기를 하면서도 뭔가 빡빡하다는 느낌을 받았죠. 속공상황이었어요. 제가 공을 잡는 순간이었는데 옆으로 작은 선수가 근접해서 휙 지나가더라고요. 연습경기잖아요. 충돌이 일어날 것 같아서 순간적으로 스톱을 했는데 무릎이 뒤로 확 꺾여버린거에요. 그뒤 깁스를 하고 다니다가 다시 훈련을 재개했어요. 실수한거죠. 괜찮을줄 알았는데 또 다치고 또 다치는거에요. 그래서 이후에 알아봤더니 무릎 속에서 부서진 뼈조각 하나가 돌아다녔더라고요. 부상의 고통보다 이제 실업팀에 들어와서 뛰고싶은데 뛸수가 없게된 마음의 고통이 더 컸어요. 혈기왕성한 젊은 선수가 3년을 내리 수술과 재활로만 보내려니 미칠 노릇이었죠.

Q.실업 4년차때 MVP를 받으며 어느 정도 명예회복을 하셨어요.
88서울올림픽이 끝난 이후 치러진 시즌이 사실상 첫 시즌이었어요. 무릎보호대를 하고 뛰었는데 쉽지 않았지만 경기에 나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왼쪽 무릎이 아팠는데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오른쪽 무릎에 힘을 많이줬나봐요. 결국 오른쪽 무릎도 안좋아져서 은퇴하고 거기도 수술했죠. 당시에는 지금처럼 몸관리가 체계적이지 않아서 7년차쯤되면 은퇴를 많이하던 시기에요. 비록 제대로 뛰지는 못했지만 4년차에 접어드니 경기를 보는 시야도 더 넓어지고 노련미도 올라왔던 것 같아요. 부상 전처럼 풀파워로 코트를 휘젓고 다니지는 못했어도 경험에서 오는 완숙한 플레이는 만들어졌지않나 싶습니다.

Q.빅맨으로서 어떤 플레이 스타일의 선수였을까요?
삼천포여고시절에는 제 위주로 경기가 진행되는 경우가 잦다보니 득점 등 화려한 플레이를 많이했어요. 그러다가 일찌감치 대표팀에서 경험을 쌓으면서 플레이 스타일이 바뀌게 된 것 같아요. 일단 막내다보니까 활동량을 많이 가져가고 수비등 궂은 일에 힘을 쏟았죠. 볼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도 계속해서 빈자리를 찾아 움직이며 하이 로우 게임 등에 열심히 참여했어요. 패스를 받아 먹는 것도, 뿌려주는 것도 모두 능했던 것 같아요. 더불어 키가 크지도 탄력이 썩 좋은 편도 아니었지만 리바운드도 잘 잡았어요. 볼이 떨어지는 낙하지점 등을 포착해서 영리하게 플레이했던 것 같아요. 현중이도 그런 스타일이에요. 신체능력, 운동능력 등은 썩 뛰어나지않지만 본능적으로 볼을 따라가는 감각이 좋거든요. 언젠가 현중이 관련 글을 보니까 재미있는게 달려 있더라고요. ’볼냄새를 잘 맡는다‘는 댓글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2부 ’엄마가 보는 제 아들 이현중은요‘편으로 이어집니다.(내일 오전 9시 업데이트)>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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