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아메리칸 바스켓볼

기자 / 기사승인 : 2022-01-24 15: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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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⑦
▲존 번의 내한 사실을 보도한 1955년 8월 6일자 경향신문 8면 기사 

한국농구의 역사에서 미국농구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미국인이 이 땅에 알린 농구가 한국농구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필립 질레트가 전파한 농구는 1916년 바이런 반하트라는 인물이 YMCA의 체육전문 간사로 부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겨우 명맥만 이어갔던 것 같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한국농구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반하트 부임 이후라고 보야 한다. (김재우) 반하트는 1915년 시카고 대학을 졸업하고, 일리노이 주 페오리아의 YMCA 소년부 간사로 일하다가 1916년 3월 4일 소년부 및 체육부 지도자(간사)의 자격으로 부인과 함께 내한했다. 그는 실내 체육을 비롯한 야구, 축구, 육상 등을 발전시킨 주역의 한 사람이다. 1907년 질레트가 보급한 농구를 발전시키고자 YMCA농구부를 창설하기도 했다. 반하트는 YMCA농구팀 농구 코치로서 크게 지도력을 발휘하여, 체계적이고 수준 높은 훈련을 실시함으로써 경기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윤태호)


현실적으로 일제강점기의 한국농구는 일본과의 교류가 주를 차지했다. 동등한 교류는 아니었다. 식민지의 판도 안에서 제국 일본의 내수 차원에서 농구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농구가 미국으로부터 직접 전래됐음에도 불구하고(또는 미국인에 의해 전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농구가 일제강점기 한국농구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인 편이다. 미국농구와 본격적으로 교류하지 않았기에 미국의 영향을 확인할 만한 사례도 많지 않다. 미국과의 농구 교류 내지 접촉은 광복 이후 본격화되었다. 한국농구가 미국농구와 접촉하는 방식은 미국 팀 또는 국내에 주둔한 미군 농구팀과의 경기 아니면 선교단체의 방한 경기 등이었다. 간헐적이기는 했으나 미국농구(내지는 미국인의 농구)와의 접촉은 꾸준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미국의 몇몇 농구지도자가 내한하여 국내 선수들을 상대로 기술 지도를 하는 사례도 있었다. 1945년 9월 30일 서울에서는 조선농구협회 주최로 해외동포 구호를 위한 미군과의 교환농구경기가 열렸다. 서울선발군과 미군의 첫 조우였다. 두 팀은 같은 해 10월 6일과 이듬해 1월 30일에도 경기를 하였다. (윤태호) 한편 농구의 도입과 민간 보급에 크게 기여한 YMCA는 1946년 11월 한미 친선을 목적으로 농구대회를 개최하였다. 한국 팀은 당시 가장 경기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은 백연(白燕), 미국 팀은 서울에 주둔한 미군 7사단 포병부대 장교들로 구성되었다. (김재우) 이 교류전은 1947년 2월 24~25일, 같은 해 12월 6일에도 열렸다.

미국 농구인들의 한국 선수 지도는 더 직접적으로 한국농구에 영향을 미쳤다. 최초의 미국대학농구 선수 출신 지도자는 한국인 2세로서 미국 워싱턴대학 농구팀의 센터였던 전봉운이다. 대한농구협회의 기록(한국농구100년사)에 따르면 그는 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광산회사에 취직하여 함경도 지역의 지질을 조사하기 위해 내한했다. 그때, 그는 부친과 절친했던 이춘호 연희전문 교수의 사택에 머물렀는데, 이 사실을 안 연전 선수들이 그를 찾아가 지도를 청한 끝에 허락을 얻었다고 한다. (이보다 20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농구80년 192~193쪽에는 다소 다른 기록이 보인다. 이 책에서는 “연전 농구부는 미국 워싱턴 대 농구선수로 활약한 바 있는 전봉운 씨가 모국을 방문하게 되자 이춘호 교수의 추천으로 우리나라 처음의 시스템 플레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연전 선수들에게 전수함으로써 1930년대 한국 농구기술의 전환기를 만들게 했다”고 기록됐다.) 전봉운의 지도 내용 가운데 특기할 내용은 맨투맨 수비와 스크린플레이를 처음으로 소개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가 미국 스프링필드대 교수 겸 감독이었던 존 번이다. 그는 광복 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선수들을 지도한 미국인 지도자다. 조동재(전 ABC사무총장, 대한농구협회 부회장)가 근무하던 아시아재단 초청으로 1955년 8월 4일 내한해 3개월 동안 대학생 선수들을 지도하였다. 존 번은 1921년 캔자스 대학을 졸업한 후 모교의 코치로 부임했으며 1930년에는 스탠포드 대학의 지휘봉을 잡은 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퍼시픽 코스트 컨퍼런스 우승을 이끌었고 미국농구심판협회 회장을 맡는 등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존 번은 유망한 학생들로 이뤄진 학생 군을 조직하여 농구의 팀 디펜스를 비롯한 기초적인 기술을 지도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학생군 선발선수로는 김영기, 백남정 등이 있다. 당시 선발된 대학 선수는 1차 30명, 최종 15명이었다. 1차로 연세대, 고려대, 국학대, 중앙대 등에서 30명을 선발했다. 이 선수들이 존 번의 1차지도를 받은 다음 재선발을 거쳐 15명으로 압축되었다. 이때 선발된 대학선수들은 전후 4, 5년에 걸쳐 멜버른올림픽까지 한국농구의 대를 이은 재목들이었다. 당시 우수학생으로 선발된 30명에 포함되어 존 번의 지도를 받은 염철호는 매우 상세히 지도 내용을 기억하였다. 염철호에 의하면 번은 주전 선수 몇 명에 의존하는 경기 방식을 버리고 한 팀 12명을 고루 기용하는 ‘토털 바스켓볼’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경기의 중심은 수비에 두되 시종일관 상대 선수를 따라붙어 강하게 압박하는 ‘올 코트 프레스’를 구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농구는 강한 체력을 요구했기 때문에 기초체력 훈련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존 번 선생님의 나이가 그 때 57세였는데, 트레이닝복을 입고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지도했어요. 이성구 선배님과 정상윤 선배님이 진행을 돕고. 존 번 선생님의 말씀이 “한국 사람들은 체격이 작기 때문에 정상적인 농구를 해서는 장신 선수들과 상대가 안 된다.”는 거예요. 당시 아시아에서는 대만, 필리핀, 일본이 강했는데 대만은 신장이 크고 필리핀은 빨랐어요. 한국은 일본한테도 안 되고…. 번 선생님은 토털 농구를 하기 위해서 체력 훈련을 엄청나게 시켰어요. 한 선수가 20분 동안 줄기차게 상대 선수를 압박하려면 체력이 필요하니까. 수비도 팀 디펜스를 많이 요구했고. 이런 걸 집중적으로 했지요. 수비할 때 상대를 바꾸는 스위치 기술도 익히고. 그때까지 배운 기계적인 일본식 농구 대신 미국식 농구를 한 거지. 난 그 때 존 번 선생님한테서 배운 걸로 평생을 써먹었는걸.’ (염철호)

세 번째는 1959년 11월 아시아재단의 후원으로 한국을 방문한 내트 홀맨이다. 홀맨은 ‘미스터 바스켓볼’이라 불린 인물로서, 1964년 미국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초창기 프로농구의 스타였다.(Bronx Science-CCNY, 2005) 1920년대 오리지널 셀틱스에서 선수와 지도자로 활동했고, 현역시절에는 패스와 드리블 능력에 있어 혁신을 가져온 인물이었다. 홀맨은 3주일에 걸쳐 고등학교 및 대학 선수들에게 농구의 기본기와 속공 등의 기술을 지도했다. 그 당시 선수들로는 1969년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와 1970년 아시안게임 우승의 주역이 된 김영일, 이인표, 신동파, 김인건 등이 있다. 그러나 홀맨이 한국 선수들을 가르친 기간은 매우 짧았으므로 그가 한국 농구에 미친 영향은 크다고 보기 어렵다. 다만 나중에 일부 팀에서 실제 경기에 적용한 점프 패스 등 기술의 일단만이 남게 되었다.

주목해 보아야 할 미국인 농구 지도자로는 1966년 남자대표팀의 코치를 맡은 미8군의 찰리 마콘(Charlie Marcon; 그의 이름은 한국농구 100년 151쪽에 ‘찰스 마콘’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마콘의 대학 재학 시절 활동을 기록한 신문 기사, 현재 미국에서 발행되는 신문 및 인터넷 매체에서 대부분 ‘찰리 마콘’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마콘 역시 이메일에 자신의 이름을 ‘찰리 마콘’으로 표기하고 있다.)과 1967년 마콘의 후임을 맡은 제프 고스폴(Jeff Gausepohl)이 있다. 서울에 주둔한 미군 소속 장교가 한국의 대표선수들을 지도한 사례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 기록할 수 있다. 마콘과 고스폴이 한국 선수를 지도하게 된 데는 한국 농구와 미8군의 협조 및 유대 관계가 기초가 되었다. 농구는 미군의 여가 스포츠 활동의 주요 종목이었고, 다른 분야에서는 흔치 않은 한국 민간인과의 교류 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그러나 미군 진주 초기의 농구 교류는 어쩌다 미군 측에서 교섭해오면 친선경기에 응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형태로서 비정기적이었고 따라서 체계적인 교류로 보기는 어렵다. 이에 비해 마콘과 고스폴은 미국식 훈련과 경기 스타일을 한국 선수에게 전수해 한국농구가 기술적으로 발전하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었다.


한국농구는 이들에게서 미국식 훈련 방식과 기본기, 공격과 수비 기술을 본격적으로 배웠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의 지도를 받은 대표 선수들의 기량이 크게 향상되면서 한국 남자농구는 아시아의 정상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69년 태국의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와 1970년 역시 방콕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우승하는 주역들은 마콘과 고스폴의 지도를 받은 선수들이었다. 대표적인 선수들로는 김영일, 하의건, 이인표, 김인건, 신동파, 최종규, 박한, 이병국, 김무현, 신현수, 이병구 등이 있다. 이들은 한국인 지도자들과는 매우 다른 스타일의 지도 방식과 새로운 기술을 습득한 경우였다. 이들이 새로운 지도방식과 기술을 습득하면서 한국농구는 급격한 기량 향상을 이루게 되었다. 마콘과 고스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설명하겠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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