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수의 농구人터뷰⑨] ‘썬더볼’ 양희승 "노홍철씨에게 팔씨름 패한거요? 사실입니다"

김종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1-10-26 08:4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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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특별히 농구를 잘했다고는 생각 안 합니다. 농구 인기가 많았던 시대에 농구를 할 수 있어서 작은 이름이라도 얻었고 이래저래 업혀서 갔다는 기분을 지금도 받습니다. 함께 농구 했던 동료들이나 응원해주셨던 팬들에게나 이래저래 감사할 일이죠."

 

90년대 전성기 고려대의 베스트 5중 한명으로 신기성, 김병철, 현주엽, 전희철과 함께했던 ‘썬더볼’ 양희승(47‧195cm)은 당시에 농구를 했었다는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자신보다 잘하고 스타성 넘치는 선수들은 많았지만 이른바 때를 잘 타고 났다는 것이다.

 

물론 지나친 겸손이다. 인기가 많았던 만큼 빼어난 선수도 많은 시대였고 무엇보다 선수층 두껍기로 유명한 고려대에서 주전으로 뛰었다는 것 자체가 어떤 기량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입증 한다.

 

익히 잘 알려진 것처럼 대학까지의 승승장구와 달리 프로에서의 양희승은 운이 좋지만은 않았다. 프로 데뷔년도부터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고 선수 생활 내내 부상과의 싸움을 멈추지 못했다. 농구와 싸우는 것보다 부상과 싸우는게 더 힘들었을 것 같은 남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개팀을 오가며 12시즌을 뛰었다는 것은 양희승이라는 선수가 얼마나 지독한 투지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건강한 시즌이 거의 없었던 선수생활에도 불구하고 양희승의 기록은 썩 나쁘지만은 않다. 정규리그에서 486경기를 뛰며 평균 13.6점 2.3리바운드 1.9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거듭된 부상으로 완전히 망가져 버린 마지막 두 시즌을 제외하고는 10시즌 연속 두자릿수 득점을 올렸으며 은퇴 시즌 기록했던 7.8점이 커리어 최하득점이다. 득점력 하나 만큼은 타고났던 선수라 할 수 있다. 선수 생활을 위협했을 만큼의 부상이 없었다면 어떤 커리어를 남겼을지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맞습니다. 노홍철씨에게 진심으로 팔씨름 졌습니다"

 

Q_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냥 간간이 방송도 출연하는 등 이것저것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공중파 예능. 케이블 채널 골프 프로그램 그 정도에요.

 

Q_사업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아뇨. 그것은 예전에 누나일 좀 같이하다가 지금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는줄 아는 분도 꽤 계시더라구요.

 

Q_인스타그램 등을 보니 골프 관련 사진들이 많으세요. 골프를 즐기시는 것 같아요?

-그냥, 한 10년 정도됐어요. 할수록 재미있더라구요.

 

Q_그런데 골프는 참 어려운 종목인가 봐요. 골프를 치는 전 현직 스포츠 스타들은 많은데 프로자격증을 땄다는 얘기는 거의 못들어본 것 같아요.

-일단 본인들이 했던 것과는 다른 종목이니까요. 종목을 넘나드는 일을 누구에게나 어려울 것 같아요. 더불어 죽기 살기로 덤비면야 한 종목에서 일가를 이룬 분들은 그래도 가능성이 좀 있겠죠. 다만 즐기려고 하는 골프에서 누가 그렇게까지 할까 싶어요. 선수 생활하면서 스트레스 받으신 분들도 많으실텐데 현역 때처럼 생각하고 임하시는 분들은 거의 없을 듯 싶습니다.

 

Q_동시대 다른 농구인들과 다르게 은퇴 후 농구 쪽에서는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도자 쪽은 아예 생각이 없으신 것인가요?

-솔직히 처음에는 쉬고 싶었어요. 근데 결과적으로 너무 많이 쉬었죠.(웃음) 20~30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잖아요. 부상으로 고생한 시기도 길구요.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고 싶은 생각도 들더라구요. 이것저것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많이 알고 잘할 수 있는 것이 농구 쪽이잖아요. 제가 성격이 많이 꼼꼼한 편이에요. 그래서 만약 하게 되면 대충은 안 할 것 같아요. 정말 열정적으로 파고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스로를 돌아 봤을 때 감독보다는 코치가 잘 어울릴 것 같기는 해요.

 

Q_과거 예능에서 윤동식 선수에게 팔씨름에서 졌는데요. 이것은 상대가 유도가 출신이니까 그렇다치지만 연예인 노홍철씨에게마저 패해서 깜짝 놀랐는데요. 진심으로 진 것인가요?

- 꽤 오래전 이야기네요. 아예, 진심으로 졌습니다. 저는 성격이 지는 것 별로 안 좋아하고 모든 일에 진심인 편이에요. 제가 어깨도 수술하고 골격 자체도 두껍지 않아요. 운동신경이 뛰어나서 농구를 한 것도 아니구요. 다만 성격 자체가 꼼꼼하고 안 지려고 하다보니 그러한 투지와 노력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간 것 같아요. 노홍철씨가 팔씨름이 강하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제가 그것을 평가는 못 하겠구요. 어쨌거나 당시 상태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임했습니다. 예능으로 웃기려고 일부러 지고 그런 것은 아니에요.

 

Q_예능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더불어 스포츠선수 출신들이 예능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무슨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하핫… 저도 그렇게 예능을 많이 하고 그러는 편이 아닌지라 해줄 조언이 전혀 없네요. 예능은 나가면 재미있게 즐기다 오는 것 같아서 섭외가 들어오면 웬만하면 출연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웃는 시간들이 참 좋더라구요. 하지만 저 역시 예능 쪽에서는 베테랑이 아닌지라 나가면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시키는 것 있으면 최대한 협조하려고 하고, 그냥 좋은 자리다 싶으면 진심을 다해 하는 것? 그것밖에 없지 않을까요.

 

 

 

"농구붐을 타고 좋은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Q_김영웅, 강준호, 최다윗, 닥터 J, 표왕수 등 기억나시죠? 농구붐이 한창이던 90년대, 신문연재만화, 단행본, 애니메이션 등으로 만들어졌던 <헝그리 베스트5>입니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을 당시 오프닝 주제가인 를 다른 고려대 동료들과 함께 부르셨습니다. 어떻게 부르시게 된거에요?

-하하핫…, 그냥 학교에서 하라니까 같이 한 것이죠. 당시 주전급 멤버들 불러다 시켜서 하게 됐는데 싫고 좋고가 어디 있어요. 재미는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농구 인기가 엄청났잖아요. 만화나 드라마도 나오고, 농구붐 타고 좋은 추억을 갖게 된거죠.

 

Q_언젠가 각종 매체 등에서 만화속 베스트5와 고려대 베스트5를 비교하는 글을 본적이 있는데 주인공 김영웅은 양희승 선수와 비슷하다고 적혀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래도 포지션이 같으니까요. 등 번호도 같을거에요. 11번인가? 제 기억으로는 그래요. 주인공과 같이 비교해주니까 저야 고마웠죠.

 

Q_애니메이션이 흥행에 참패했습니다. 그래도 오프닝 주제가도 불렀고 고려대와 계속 연관을 시키던 분위기가 있었던지라 아쉬운 부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슬램덩크의 인기가 너무 대단해서 묻힌 점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시기적으로 농구 인기가 대단했던 것은 맞지만 슬램덩크가 너무 막강했죠. 그렇다고 그것을 뛰어넘는 작품이 나온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구요. 막 엄청나게 아쉽고 그러지는 않았지만, 국내에서 나온 작품이기도 하고 잘되기를 바랬죠.

 

”박한 감독님 일화요? 말도 안되는 거짓말입니다“

 

Q_농구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된 것인가요?

-초등학교 때 4학년때 시작하게 되었어요. 학교에 농구부도 없었고 체육관에서 놀 기회도 거의 없었어요. 주로 운동장에서 친구들이랑 놀았는데 그래서인지 체육관에서 노는 시간이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일주일에 한번씩 하는 특별활동시간이 있었어요.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저는 문예부, 농구부를 적었어요. 집에다가는 문예부를 들었다고 하고 실질적으로는 친한 친구들이랑 농구를 한거죠. 그러다가 호응이 좋으니까 교장 선생님이 ‘우리 농구부 한번 만들어보자’하게 되었고 체육관에서 지내는 시간이 좀 더 많아지게 됐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는데 나중에 부모님에게 걸려서 집에서 혼도 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다행히 초창기 농구부 감독님을 맡았던 선생님이 저희 형 6학년 때 담임이셨어요. 집까지 찾아오셔서 ‘농구 한번 시켜보자’고 말씀하셨고 그제야 허락을 맡게 됐었죠. 감독 선생님은 농구선수 출신은 아니셨어요. 그냥 농구협회에서 전무이사인가? 하는 직함은 있으셨던 것 같아요. 한데, 1년 조금 지났었나. 교장 선생님이 바뀌고 농구부를 폐지시키셨어요. 다행히 저 농구 시켜 주셨던 선생님께서 농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보내주셨어요. 저희 학교빼고 광주에서 유일하게 농구부가 있는 학교였어요. 생각해보면 참 농구부가 귀했네요.

 

Q_고려대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선수층만 따진다면 당시 고려대가 제일 높았다고 보거든요.

-중앙대, 연세대, 한양대 등에서도 오라고는 했었는데, 이런저런 인연으로 고려대를 택했던 것 같아요. 임정명 당시 고려대 코치님께서 광주를 자주 오셨어요. 강정수 중앙대 코치님께서도 입학권유를 하시는 등 ‘어디를 가야 되나?’ 살짝 고민을 하기는 했었지만 최종적인 마음에서 고려대를 가고 싶더라구요. 당시 저희 고등학교에서 고려대를 졸업한 케이스가 거의 없었어요. 제가 테이프를 제대로 끊어보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임정명 코치님께서도 워낙 열정적이셨어요. 그래서 2학년 때 도장을 찍게 되었죠.

 

Q_90년대에는 190대 초반 빅맨도 많던 시기입니다. 신장이 큰 편이었는데 슈터를 보셨습니다.

-평균신장이 높지 않던 시절이었죠. 저도 고등학교 때는 센터도 주로 보고 그랬어요. 아무래도 전력이 강하지 않은 지방팀이다 보니 팀에서 원하는 것은 이것저것 다했어죠. 어쩌다 보니 올라운드 플레이어같이 뛰게 된 것이죠. 대학에 가서는 워낙에 좋은 선수들이 많았으니까 제가 이것저것 할 필요도 없었고 그냥 딱 제 역할만 정해놓고 하게 됐던 것 같아요.

 

Q_슈터도 종류가 많습니다. 문경은같은 정통슈터, 조성원같은 빠르고 변칙적인 슈터 등 당시 본인은 어떤 스타일의 슈터였을까요?

-저요? 저는 뭐…허허헛, 이것도 저것도 아닌 짬뽕형?(웃음) 그때 당시로는 신장에서 이점도 있었던 것 같구요. 그런데 슈팅가드로 보면 모르겠지만 스몰포워드 봤을 때는 경쟁학교였던 연세대의 우지원, 김훈 선수 등과 별반 차이도 안났어요. 기껏해야 몇 센티?

 

Q_역시 슈터를 맡고있었던 김병철 선수와 역할이 겹치거나 그러지는 않았나요?

-특별히 겹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제가 2, 3번을 오가기는 했지만 3번 스몰포워드가 딱이었죠. 대학 초년생 때는 신문 등에서 ‘최장신 가드’ 그런 표현도 쓰고 그랬는데 가드보다는 포워드가 적성에 잘 맞았어요. (김)병철이형이야 전형적인 슈팅가드잖아요. 겹칠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1학년 때는 잠깐 포인트 가드도 보는 등 가드 포지션에서 뛰다가 다음 해에 신기성이라는 뛰어난 1번이 들어온 후에 제가 스몰 포워드로 갔죠. 가드에서 뛰기에는 스피드도 좀 약했구요.

 

Q_이전 신기성 해설위원 편에서 들어보니, 당시 고려대 멤버들은 하나같이 개인 기량이 뛰어나서 득점 경쟁 같은 것도 있는 분위기였다고 하더라구요.

-득점 경쟁이라기보다는 그날 컨디션이 좋았던 선수를 밀어주는 경향은 있었어요. 멤버들이 모두 기량이 좋았잖아요. 구태여 특정 선수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날 몸놀림이나 슛감이 좋은 선수가 나서는게 제일 효율적이죠. 일각에서는 제가 기복이 심하다는 말도 듣고 그랬는데 그게 참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그날 슛감이 아무리 안좋다 해도 슛 40~50개 던져대서 10개 못 넣을까요? 그러면 20점, 30점 금방 나와요. 하지만 그래서는 안되죠. 특히나 멤버가 약한 것도 아니고 저 말고도 득점할 선수들이 많은 상태에서.

 

Q_박한 감독님의 전설적인 일화가 인터넷에 떠돌잖아요. 경기중 작전타임을 걸어 선수들에게 ‘지금 너희 들이 안되는 것은 딱 두 가지야. 그것만 잘하면 돼. 공격과 수비’라고 말한 것을 비롯 작전판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가운데를 펜으로 가리키면서 ‘넣어’라고 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내용인데 혹시 이거 사실인가요?

-그렇지않아도 이것 물어보는 사람이 꽤 됐어요. 무슨 최불암시리즈처럼 종류도 많고 한때 되게 많이 유행처럼 떠돌더라구요. 결론만 말하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감독님의 능력은 둘째치고 그렇게 작전 지시하는 감독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대학교 농구부를 이끄는 수장이셨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감독님이 사람이 좋으셔서 그렇지, 저 같았으면 최초 유포자를 꼭 찾았을 것 같아요. 본인은 웃자고 만들어낸 말이겠지만 거의 인격모독 수준이잖아요.

 

”인기가 많았던 시대에 뛸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Q_드래프트 세대는 아니신데, LG는 어떤 과정으로 입단하게 되신 것인가요?

-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당시 창단팀 우선 지명권이 있었때라, 가게된게 아니라 갈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게 맞아요. 저희 학번하고 윗선배 학번이 그게 있었어요. 윗 선배들은 대우하고 동양, 저희는 LG하고 진로였을거에요. 사실 현대, 삼성 등에서 계속해서 러브콜이 있었어요.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어디가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하필 거기에 딱 묶여서 선택 자체를 할 수 없었던 상황은 많이 아쉬웠습니다.

 

Q_또 다른 최대어 추승균 선수는 현대(현 KCC)를 갔어요.

- 아, 그게 특정 선수를 찍는게 아니라 대학 하나를 통째로 지명하는 시스템이었어요. 신생팀이니만큼 선수가 많이 필요하니까요. 당시 LG는 고려대를 택한 것이고, 추승균 선수는 한양대였죠.

 

Q_5개팀을 오가셨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 잉? 잠깐만요. 4개팀일거에요. 5개팀이 아니라…

 

Q_앗! 다시 확인해보니 그렇네요. 지금도 기억하고 계시네요? 역시 꼼꼼하십니다.

-아니…, 이건 꼼꼼을 떠나서, 하하핫, 제가 뛰었던 팀인데 몇 개였는지 기억 못하는게 더 이상하죠. 팀이 몇십개씩 있어서 다 옮겨 다닌 것도 아니고.

 

Q_정정 할께요. 4개팀을 오가셨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던 팀이 있으실까요?

- 애착이라기보다는 아무래도 LG하고 KTF(현 KT)가 아쉬움? 그런 것이 남죠. 미안한 부분도 많구요. LG는 데뷔팀이고, KT는 마지막에 뛰었던 팀인데 두팀 다 부상으로 기대치만큼 못했던게 많이 안타깝습니다. 알려졌다시피 선수 시절 내내 부상을 달고 살았는데 특히 그 시절이 최하점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LG와는 처음부터 사이가 썩 좋지 않았어요. 제 선택으로 간 것도 아니고 제도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간 것인데, 초기부터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계약금 받은 것을 토해내야 하는 상황에 몰렸죠. 시작부터 그래 버리니 맥이 확 빠지더라구요. 그래서 팀을 나와서 혼자서 개인 운동 식으로 훈련을 했어요. 그리고 시즌이 시작된 후 몇게임이 지나고 합류를 했어요. 설상가상으로 경기중 부상을 당해 버렸죠. 굉장히 난감했어요. 하지만 늦게 합류한 입장도 있고 해서 아프다는 말을 못하겠더라구요.

 

Q_구단도 구단이지만 함께하는 동료들에게도 미안했어요.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동료들은 비시즌간 쭉 팀훈련을 소화했는데 저는 밖에서 개인훈련만 하고 돌아왔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몇 게임 지나고 들어왔음에도 주전으로 경기를 뛰구요. 특별히 뭐라고 한 사람은 없었지만 제 스스로가 미안하고 눈치가 보이더라구요. 그런 상황에서 ‘부상을 당했다’고는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충하는 성격도 못되고 주사 맞아가면서 참고 뛴거죠. 제가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선수 생활 내내 고생했는데, 사실 아킬레스건이 한 번에 끊어진 것은 아니에요. 한가닥, 한가닥 다시 한가닥… 그런 식으로 끊어졌죠. 중간에 멈추는게 맞았는데 계속 무리하다가 결국 게임 중에 마지막 한가닥까지 끊어져 버렸어요. 그렇게 2년이 날아가 버렸죠. 아킬레스건이 끊어지고도 돌아온 것 자체가 기적이었는데 부상 여파는 선수 생활 내내 따라다녔어요. 이후에 또 아킬레스건이 끊어지기도 했고 거기에 신경 쓰다 보니까 다른 곳도 연쇄적으로 망가져버렸구요.

 

Q_LG하고는 여러모로 인연이 아니었던 것 같네요. 그럼 KTF는 몸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에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으셨던 것인가요?

-아무래도 그런 부분이 많죠. 추일승 감독님께서 우승을 하시겠다고 FA 이전부터 트레이드 요청을 하셨더라구요. 저의 가치를 크게 봐주신 것이죠. 그런데 이전 소속 팀에서 거부를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감독님은 꾸준히 저를 원하셨고 결국 FA자격을 얻어서 KTF로 가게 됐습니다. 하필 제가 갔던 해에 외국인 선수 제도가 바뀌어서 이전해 좋았던 필립 리치, 애런 맥기와 함께 할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자유계약제에서 드래프트 제도로 다시 바뀌어버린 것이죠. 이전 해에 성적이 좋았던지라 드래프트에서도 순번은 확 밀려버렸습니다. FA로 새로운 팀에 왔던지라 좋은 외국인 선수들과 함께 뛰며 최대한 팀에 공헌하고 싶었는데 실망스럽더라구요. 이후 시즌이 시작되었는데 어깨가 너무 아픈거에요. 잠을 못 잘 정도로 고통스러웠어요. 어쩔 수 없이 수술을 했죠. 그 다음년도에는 무릎 수술하구요. 하하핫…, 저에게도 불행이었지만 팀에도 너무 미안했어요. 운대가 좀 안 맞았던 것 같아요.

 

Q_KCC로 갔던 당시, 신선우 감독님이 토탈바스켓에 많은 공을 들이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토털바스켓은 어떤 것이었나요?

-이른바 포지션 파괴죠. 포인트가드 (이)상민이형 빼고는 누구나가 돌아가면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특정 포지션을 정해놓고 하지 않는 농구였습니다. 신장도 어느 정도 갖춘 상태에서 포지션에 관계없이 움직이니까 한단계 빠른 농구가 가능해지구요. 어찌보면 굉장히 획기적인 스타일이었죠.

 

Q_코트에서 선수들에게 요구하는게 많은 지도자로 알려지셨는데 신선우 감독님과는 잘 맞으셨나요?

-개인적으로 너무 고마운 분입니다. LG에서 아킬레스건 끊어지고 재기를 했지만 크게 두각을 나타내고 그러지는 못할 때였어요. 그런 상황임에도 저를 믿고 불러주셨고 팀에 와서도 ‘급하게 마음먹지 마라. 내년을 보고 너를 데려온 것이지, 당장 큰 활약을 바라고 있지는 않다’며 심리적으로 편하게 해주셨어요. 다만 제가 의욕이 앞서다 보니까 빨리 올라오게 됐죠. 감독님께서는 재촉하시지 않았어요. 개인적으로 지금도 죄송한게 있어요. 이후 FA자격을 얻었을 때 감독님께서 저를 따로 불러서 중화요리집으로 데려가셨어요. 감독님은 본래 선수들과 따로 식사나 술자리를 안 하시는 것으로 유명했어요. 그런 감독님께서 ‘가지마라. KCC하면 양희승이라는 이름이 떠오를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 하시더라구요. 솔직히 저도 그대로 KCC에 남고 싶었어요. 하지만 당시 KCC에는 좋은 선수가 너무 많아서 한정된 샐러리캡에서 한계가 있었어요. 주축선수들이 한꺼번에 FA 자격을 얻기도 했구요. 저라도 빠져줘야 어느 정도 정리가 되겠더라구요. 어찌보면 너무 앞서 나갔나 싶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Q_만약 조성원 선수와 트레이드되지 않고 LG에 그대로 있었다는 가정하에, 당시 김태환 감독님의 닥공농구, 3점농구에도 잘 적응 할 수 있었을 것 같나요?

-아니요. 웬지 잘 못했을 것 같아요. 스타일이 저랑은 안 맞았을 것은 느낌이 들어요. 김태환 감독님이 나빠서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구요. 서로간에 합이라는게 있잖아요. 저는 신선우 감독님과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신감독님은 당시에도 잘 풀어주시기는 스타일이기는 하셨어요. 하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했죠. 예를 들면 한 두번 슛을 쏴서 안 들어갔는데 슛이 짧았어요. 그러면 다음에 던질 때는 슛이 길어야 맞다는 것이죠. 계속 슛이 짧아 버리면 생각할 줄 모른다고 말씀하셨어요. 패스미스를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면 뭐라고 안하셨는데, 말도 안되는 패스미스를 하게 되면 용납을 안 하시는 분이셨죠.

 

Q_함께 뛰어본 외국인 선수 중 인상적인 선수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저는 KCC에서 함께 뛰었던 재키 존스입니다. 굉장히 영리하면서도 자기 욕심보다는 팀플레이를 먼저 생각했던 선수로 기억되요. 센터 포지션을 맡았으면서도 기동성이 좋아서 내외곽을 오가면서 공격과 수비를 했어요. 특히 속공시 시원하게 나가는 장거리 패스가 매우 정확해서 다들 도움을 많이 받았죠. 마치 럭비선수가 공을 뿌려주는 느낌이었어요. 언론 같은데서도 ‘베이스볼 패스’라고 봤던 기억도 납니다. 당시 KCC 토탈바스켓은 다같이 달리고 다같이 슛 쏘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농구에 최적화된 선수였죠.

 

Q_조성훈, 김훈, 김영만 등 당시 쟁쟁했던 선수들이 부상으로 전성기를 짧게 가져갔는데 양희승 선수도 그런 케이스같아요. 부상관리나 치료, 재활 등 지금과 비교해 시스템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이 컸던 시대같습니다.

-아유, 부상이라면 다들 지긋지긋 할거에요. 저 같은 경우 아킬레스건 2번 수술에, 무릎 수술 3번 거기에 어깨 수술 1번까지 수술은 정말 많이 했어요. 아파도 아프다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던지라 오히려 부상을 키운 부분도 있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시스템적인 부분에서도 그때와 비교가 안되고, 선수들도 아픈데 억지로 뛰려고 하지 않죠. 주변에서도 부상 투혼을 권유하지 않구요. 최상의 몸 상태로 뛰는게 선수도 구단도 이익이라는 것을 알게 된거죠.

 

Q_그정도로 많이 다치시고 수술을 하셨으면 지금도 생활하는데 영향이 있으실 것 같아요.

-당연히 있죠. 사실 아킬레스건 때문에 무릎을 3번이나 수술하게 된거에요. 경기를 뛸 때 체중이 다치지 않은 쪽으로 자꾸 쏠리다 보니 과부화가 간거죠. 거의 왼쪽 다리로만 버티면서 농구를 했다고 보면 됩니다. 아킬레스건 다쳤던 부위는 까치발도 안되요. 종아리 두께도 양쪽 다리가 다르구요. 실제로 보기에도 확연하게 차이나요.

 

Q_선수 생활을 하는게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요.

-이상적인 것은 즐기면서 농구를 하는게 최고인데, 현실은 좀 다르게 흘러갔죠. 저희 집이 부유한 것도 아닌데 대학 졸업하고 프로 들어가서 효도 좀 해보려고 했더니 바로 들어가자마자 덜컥 부상을 당해 버렸고 선수 생활 내내 고생했잖아요.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환경 자체가 즐길 여유를 주지 않았죠. 그렇다고 농구를 그만둘 수도 없었죠. 이전까지 쭉 해온게 농구이고 가장 잘할 수 있는 것도 농구인데 거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잖아요. 이를 악물고 계속 앞으로 나간거죠. 사실 아킬레스건만 2번이 끊어지는 등 그 몸으로 그 정도 뛴 것만 해도 기적인 것 같아요. 대한민국 최초 족부정형외과의사 이경태 박사님께서 그러시더라구요. ‘아킬레스건 2번 끊어지고 재기한 케이스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정말 치열한 세월이었던 것 같아요.

 

Q_그때 당시에 유명했던 농구선수 중에 몇 안되는 총각이신 것 같아요.

-몇안되는게 아니라 저 혼자만 총각이 아닌가 싶어요.(웃음) 갔다 오신 분들은 몇 명 있는데 그냥 결혼을 안한 사람은 저 말고는 생각이 안나요. 결혼을 해야겠다는 계획은 있지만 해야하는 것이니까요. 한치 앞도 알 수 없는게 사람 인생이잖아요.

 

Q_마지막으로 여전히 선수 양희승을 기억하고 있는 팬분들에게 인사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 으하하하하…, 쑥스럽네요. 당시에 농구 인기가 좋아서 그 좋은 시대에 농구를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것 때문에 제가 아직까지도 조그만 이름이라도 가지고 예능도 출연할 수 있고 그런 것 같아요. 부상도 있었지만 농구를 썩 잘했다고는 생각을 안해요. 그때 농구가 워낙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묻어간 부분도 있습니다. 때문에 그러한 농구 인기를 만들어준 팬분에게 지금도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앞으로 농구 인기가 더 좋아져서 농구를 하는 선수나 응원하는 팬분들이나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글 / 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 본인제공

 

◇ 필자는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농구를 사랑하던 오랜 팬으로 2002-2003년 본지에 농구 무협소설 '해동전설(海東傳說)''을 연재한 바 있으며 데일리안, 홀로스, 올레, 오마이뉴스 등 다양한 인터넷 매체에서 스포츠 객원기자로 활동한바 있다. [김종수의 농구人터뷰]를 통해 전현직 농구인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시각으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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