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 영입요?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김종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2-04-26 07: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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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33)] '가가멜' 안준호

 

 

‘개그 코드와 간지가 공존하는 남자’ 농구인 안준호(66‧190cm)에 대한 농구 팬들의 평가다. 80년대 농구 팬들에게는 국가대표 센터로, 이후 세대에게는 농구 감독으로 더 유명한 그는 권위적이지않고 소통을 중시하는 성향상 자신보다 한창 나이가 어린 이들과도 친구처럼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특히 서울 삼성 감독시절에는 그런 부분이 두드러졌는데 그로인해 ‘안어벙’, ‘가가멜’등의 별명이 붙기도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선수들의 의견에 일일이 귀를 기울여줬으며 반말에 가까운 대답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소통을 이어나갔다.


“허허헛…, 신경쓰지 않습니다. 서로 편해서 그런것이고 상대 쪽에서 진심으로 저를 무시하지않는 이상 겉으로 보이는 태도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더욱이 감독으로서 코트에서 작전지시를 할 때면 상황이 급할 때가 많아요. 다들 말이 짧게 나올 수밖에 없죠. 거기서 이러니저러니 신경쓸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승리라는 같은 목표를 위해 그 순간만큼은 동지가 되는 것이죠”


물론 거기에 더해 성적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사람만 좋은 무능한 지도자가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준호는 달랐다. 삼성에서 감독으로 있던 7시즌동안 7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 및 세 번의 챔피언결정전 진출, 1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삼성이 가장 안정적으로 강했던 시기가 바로 이때다. 안준호와 함께라면 삼성은 최소 플레이오프는 보장받았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성격좋은 삼촌같았을지 모르겠지만 그로인해 생길 수 있던 편견을 성적으로 지워버렸다. 더불어 2007년 12월 20일 인천 전자랜드와의 원정 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분노해서 몰수패를 각오하고 선수단을 벤치로 모두 철수시킨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니다 싶을 때는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내기도 했다.


안준호는 치밀한 전략가로도 정평이 높았다. 각 선수들의 색깔에 맞춰 팀을 구성하는 능력은 당시 탑클래스로 꼽혔으며 큰 경기에서 예상치못한 한수를 준비하고 나와 판을 뒤집기도 했다. 2005~2006 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서장훈과 올루미데 오예데지의 더블 포스트 봉쇄에 초점을 맞추고있던 현대모비스와 유재학 감독에게 강혁-네이트 존슨의 2 대 2 플레이 등 빠르고 섬세한 농구로 허를 찌르며 4-0으로 완승을 거둔 것이 대표적 예다. ‘안간지’라는 별명도 그런 모습을 통해 생겨났다.


“무게감이 떨어져보이는 사람? 카리스마가 부족한 사람? 남들이 저를 어떤 모습으로 봐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농구인으로서 부끄러움없이 지내왔고 늘 최선을 다했습니다. 프로는 억울해도 억울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적으로 증명해야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일평생 그렇게 살아왔고 지난 시간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코트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경기를 지켜보는 동작으로도 유명했던 안준호는 사자성어도 좋아한다. 옛 선현들의 지혜와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으로, 거기에 따른 수많은 길을 인생의 지침서로 삼고 살아왔다. 인터뷰하는 중간중간에도 상황에 맞는 사자성어를 통해 기자의 이해를 도와줬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한 후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

“선수, 지도자, 행정가 등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기에 큰 아쉬움은 없습니다”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감독 생활을 그만둔 후에도 나름 부지런히 이것저것 하면서 지냈습니다. KBL에서 행정일을 했고 한국프로스포츠위원회 전문위원으로 1년 정도 있었습니다. 스포츠 부정 방지 교육팀을 꾸려서 선수들에게 교육도 시켰고 모교인 경희대에서 겸임교수로서 스포츠 윤리와 체육 세미나를 가르치기도 했어요. 지난 해부터는 경희대학교 총동문회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나이도 있고해서 예전처럼 열정을 불태우는 정도는 아니고 쉬엄쉬엄 지내고 있다는게 맞을 것 같아요. 더불어 헬스는 빼먹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운동한 몸이라고 좀 쉬고 그러면 찌뿌등하거든요.(웃음)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죠. 최고였다고는 자평하지 못하겠지만 선수, 지도자, 행정가 등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기에 큰 아쉬움은 없어요. 여전히 저를 필요로하는 곳이 있다면 어떤 장소, 무슨 일이든지 도움을 줄 마음도 있습니다.

Q.인터뷰 요청 연락드렸을 때 수원이라고 하셨는데, 농구는 꾸준히 보시는 것 같아요.
그럼요. 저같은 농구인에게 농구는 인생 그자체죠. 운명을 뛰어넘어서 숙명적으로 연결되었다고나 할까요. 언제 어떤 순간에도 관심을 끊지못하고 늘 함께 하고 있죠.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농구랑 떨어져서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최근 코로나 때문에 경기장을 못가다가 이제 조금씩 갈 수 있어서 숨통이 트이는 느낌입니다. 지금 한창 진행중인 4강 플레이오프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SK가 비교적 쉽게 챔피언결정전에 선착한 가운데 KGC와 KT는 승패를 주고받으며 겨루고 있죠. 양팀에게는 힘든 일이겠지만 지켜보는 팬들로서는 흥미진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올시즌 우승팀은 어디를 예상하고 계신가요?
특별할 것 있을까요. 다들 저랑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요. SK가 정규시즌에서 탄탄한 전력을 자랑했는데 아니라다를까 4강에서도 강력한 모습으로 쉽게 결승에 올라갔잖아요. 전력적으로나, 체력적인 문제나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고 볼 수 있겠죠. 문제는 KGC와 KT인데 승패의 분수령이 될 3차전을 KGC가 잡아내면서 흐름을 탄 듯 싶어요. 외국인선수 한명이 빠지면서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에 놓였을텐데도 불구하고 기타 선수들이 공백을 기가막히게 메워주고있는게 인상적입니다. 전성현은 정말 오랜만에 나온 강력한 슈터같아요. 슛의 정확성은 물론 만들어서 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어서 눈에 많이 띕니다. 오세근같은 경우는 나이를 먹으면서 활동량은 예전같지 않을지 몰라도 뭐랄까, 농구에 눈을 떠가고 있다고 할까요. 달인의 경지로 들어선 듯 보입니다. 분위기상 KGC가 유리해보이기는 하는데 KT도 허훈, 양홍석을 중심으로 정성우 등이 폭발하면 무서운 팀이니까 뒤집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죠. 어쨌거나 어느 팀이 올라오든 SK는 웃고 있겠네요. 승부의 세계는 그런 곳이니까요.

 

 

 

 

Q.교회 집사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신앙생활을 하셨나요?
대학교때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운동하다보면 부상이 많았어요.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었죠. 그런가운데 신앙을 가지게되니까 많은 의지가 됐어요. 운동이나 부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지게 됐고요. 개인적으로 운동선수들에게도 종교를 가지면 좋다는 말을 하고싶어요. 의지도 되고 정신적으로도 성숙되고 개인의 자존감을 높이는데도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교회 집사로 있다고 꼭 이쪽 종교를 믿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을께요.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어떤 종교든지 나쁜짓을 가르치지는 않잖아요. 열린 마음으로 종교의 좋은 부분을 받아들이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든든해지는게 많을 것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말씀을 듣다보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진리로 귀결되는 것 같아요.

Q.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혹시 아버님의 길을 따라 운동하고 있는 자녀들도 있나요?
저는 3남 4녀중의 막내고, 저희 가족은 아내 그리고 아들 둘이 있습니다. 운동같은 경우 큰아들이 농구를 했었는데 연세대 들어간 이후 몸이 안좋아져서 선수의 길은 못가게 되고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있어요.

대기만성(大器晩成‧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늦게 농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Q.농구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시게 된 것인가요?
제가 전남 담양출신이고 담양봉산남초등학교, 광주조선대부속중학교를 다녔어요. 그러다가 유학이라고 할까요. 광신상업고등학교로 갔죠. 그냥 수도권에서 공부하고 그럴 생각이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때 키가 부쩍 컸어요. 188cm정도 됐으니까요. 당시로서는 많이 큰거였죠. 당연스레 농구부 감독님 눈에 띄었고 1학년 10월달쯤인가 그때부터 농구공을 잡게됐습니다. 좀 많이 늦게 시작한 케이스죠.

Q.처음에 포지션은 어떻게 되었나요?
아무래도 키가 크니까 센터를 봤어요. 농구부에 들어가게된 계기도 키 때문이었으니까요. 경희대에서는 파워포워드를 봤는데 삼성으로 가서는 다시 센터를 봤어요. 팀에 센터가 없었거든요. 제가 아버님을 닮았던 것 같아요. 아버님께서 키도 크시고 기골이 장대하셨거든요. 농구를 하기 전까지는 살이 많이 쪘었어요. 그러다가 운동을 하면서부터 살도 빠지고 몸에 밸런스가 갖춰지더라고요. 농구를 안했으면 그냥 키크고 살만찐 그런 사람이 되지않았을까 싶습니다.

Q.선수 안준호의 플레이스타일은 어땠나요?
농구를 늦게 시작한 케이스라 다양한 스킬을 갖춘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나름대로 자신만의 확실한 색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대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 기량이 업그레이드된 것 같아요. 1학년때부터 스타팅으로 뛰었는데 그만큼 구력도 많이 쌓고 거기에 파워포워드 경험까지 더해지면서 전체적으로 훌쩍 성장했죠. 아무래도 체격이 좋은 편이었으니까 기본적으로 빅맨 본연의 플레이에 충실했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멀티 플레이어보다는 각자가 자신의 포지션에 충실한 시절이었어요. 가드는 게임을 지휘하고 앞선을 이끌고, 포워드는 득점에 치중하고 센터는 골밑에서 몸싸움하고 리바운드잡고 블록슛하고 그랬죠. 저도 거기에 맞춰서 시키는데로 했어요. 다만 저는 미들슛이라는 무기가 있었습니다. 상당히 정확했어요.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센터치고는 행동반경이 넓은편이었죠.

 

 

 

 

Q.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금메달 멤버에요. 당시 어떤 역할을 주로 하셨을까요?
영광의 시절이었죠. 그때는 선수들도 당연히 잘했겠지만 방열 감독님의 전략 전술이 정말 대단했어요. 명장으로서의 면모를 그때 제대로 보여줬죠. 사실 저같은 경우 궂은일 위주로하는 센터니까 팀에서 크게 돋보이는 역할은 하지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른쪽에서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팀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준다거나…, 솔직히 말해야죠.(웃음)

해납백천(海納百川‧수백 가지의 하천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

“배움에 두려움을 가지지않고 받아들임에 있어서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Q.은퇴후 코오롱 여자농구단 코치로 가셔서 10여년간 계셨어요.

맞습니다. 나름 오래했죠. 선수로 은퇴하자마자 정주현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가서 옆에서 보좌하면서 코치생활을 시작했고 감독생활까지해서 딱 10년을 채웠습니다. 86년 3월에 가서 96년 2월까지 했으니까 더도 덜도 아니고 딱 10년이네요.

Q.코오롱 시절 천은숙이 강제로 은퇴하게된 배경에 감독 안준호의 새판짜기가 있었다는 말도 들어본 것 같습니다.
아…, 이것은 뭔가 잘못 와전된 루머같아요. 저는 코치시절부터 천은숙의 성장과정을 잘 지켜봤고 좋은 시절도 함께 했습니다. 무엇보다 천은숙이 은퇴하던 당시에는 제가 이미 코오롱을 떠나있던 상황입니다. 팀에 없는 사람이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충분히 선수생활하고 어쩔수없이 몸상태 때문에 은퇴를 한줄 알았는데 강제은퇴라는 사연이 있는 줄은 저도 지금 알았습니다. 천은숙이라는 이름이 나오니까 오랜만에 그 선수를 생각하게 되네요. 천은숙은 몸도 탄탄하고 순발력 등 운동신경이 좋았어요. 거기에 시야도 넓고 슈팅력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뭐랄까 기량적인 면에서는 나무랄데가 없었죠. 스킬자체만 놓고보면 역대급선수에요. 다만 하나 아쉬웠던 것은 체중이 좀 나갔다는 부분이었어요. 그러다보니 발목이나 무릎 등으로 과부하가 걸릴 수도 있었고요. 그래서 다른 것은 신경안쓰고 ‘체중만 줄이면 넌 손볼 것이 없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체중 줄이고 바로 국가대표팀으로 불려갔던 친구에요. 정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죠.

Q.선진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셨다고 들었어요.
제가 여자농구 쪽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때는 지금처럼 다양한 전략 전술이 활용되던 시기가 아니었어요. 때문에 뭔가 새로운 기술이나 방식을 배울 루트가 많이 부족했죠. 저는 그게 항상 아쉬웠어요. 그래서 택한 방법이 미국행이었습니다. UCLA에 옵저버로 가는 등 수시로 미국을 드나들며 여러 가지를 배워나갔죠. 우선 당시 국내농구는 감독과 코치의 역할분담이 거의 되지 않던 시기에요. 감독이 주섬주섬 거의 다하고 코치는 조수 역할 정도 밖에 안했죠. 그러다보니 감독은 감독대로 힘들고 정신없고 코치도 정확한 업무의 방향성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지 않았나 싶어요. 자신이 뭘해야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그와중에도 잘하는 사람이 있기는 했겠지만 그건 그 사람이 뛰어난 것이지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간 것은 아니니까요. 반면 미국은 코치진들이 각자의 파트별로 자연스럽게 돌아가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영역이 있다는 것은 곧 전문화를 의미하기도 하거든요.

Q.아, 지금은 당연스레 여겨지는 모습들이 과거에는 제대로 되지않았었군요.
그런 모습들도 일장일단은 있었을거에요. 세상에 일방적으로 나쁜 것이란 없고 만약 그랬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이어지지 않았을테니까요. 하지만 미국같이 농구가 발전한 나라의 시스템이나 운영방식은 분명 참고할 부분이 많겠다 싶더라고요. 다른 팀 지도자들에게는 강요할 수 없는 일이고 일단 가져와봐서 제가 써보는 것이죠. 그게 효과적이다 싶으면 그들도 언젠가는 할테니까요. 원 핸드 슛같은 경우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어요. 당시 대부분 여자선수들은 투 핸드 슛을 썼어요. 일단 양손으로 쏜다는 점에서 비거리는 투 핸드 슛이 나을지 몰라도 타점이나 슛의 속도 등에서는 확실히 원 핸드 슛이 낫거든요. 거기에 슛이라는게 빈자리에서 저격수처럼만 쏘는게 아니거든요. 드리블치다가 순간적으로 딱 멈춰서서 점프슛을 때릴 때도 있는 등 다양한 상황을 산정해야 되잖아요. 당장은 원 핸드 슛이 몸에 적응하기는 쉽지않았겠지만 일단 익혀놓으면 효율성 측면에서 차이가 좀 많이 나는게 사실이죠. 그 외 ‘아메바 디펜스(The Amoeba Defense)’ 등 다양한 공수 전략 등을 가져다가 도입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분명 국내시장에도 필요한 부분이 많아보였고 저 역시도 개인적으로 배우는게 좋았던 시절이니까요.


 

 

 

Q.감독으로서 여자농구판에 얼마있지않고 남자프로농구로 옮기셨어요. 그만큼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지만 모험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하셨을까요?
모험이라고까지는 생각은 안해봤던 것 같아요. 어차피 저도 남자부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사람인데요. 다만 여자농구와 남자농구는 다른 점도 상당하니까 그런 부분에 있어서 적응은 필요하다는 생각은 했어요. 여자농구는 흔히 아기자기하다고 표현하는데 그런만큼 디테일한 지도방식이 필요해요. 왜, 어떻게 등 일일이 설명해주고 이해시키는 과정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남자농구는 선이 굵다고 할까요. 여자농구처럼 꼼꼼하게 지시할 필요는 없어요. 물론 그런만큼 또 다른 부분에서 신경쓸 것도 있겠지만요. 일장일단이 있는거죠. 같은 농구라고는 하지만 그 차이를 인지하고 접근하는 것하고 그냥 들어가는 것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좀 있습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되어 돌아온다)

“이상민을 보상선수로 선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정이었습니다”

Q.SK의 초대 감독으로 KBL 커리어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렇죠. 정확하게 말하면 진로농구단이었다가 SK로 바뀐 것이었죠. 당시 농구의 인기가 워낙 좋았고 거기에 힘입어 프로화도 되었잖아요. 그로인해 여러 기업에서 프로농구단 창단에 뛰어들었고요. LG와 제가 감독으로 있었던 진로도 창단을 결정했습니다. 이전 대우(현 한국가스공사)와 동양(현 오리온)이 그랬듯 진로와 LG도 하나의 대학교를 통째로 지명할 수 있었어요. LG는 고려대를, 저희는 서장훈이 있는 연세대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변수가 생겨버렸어요. 서장훈이 난데없이 유학을 떠나버린거에요. 저희같은 경우 서장훈 딱 하나보고 연세대를 선택한 것인데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죠. 가뜩이나 창단팀인데, 전력이 어쩌고 저쩌고를 떠나 선수 구성 자체가 힘들더라고요.

Q.학교를 통째로 지명하는 것은 선수들 입장에서는 반갑지않은 부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마도 그랬을거에요. 이전까지는 자유경쟁체제였잖아요. 거액의 스카웃비가 오가고 그랬어요. 한데 학교를 딱 정해서 그 학번을 모조리 데려올 수 있으면 그렇게 큰 돈을 쓸일이 없어지는것이죠. 더불어 두 번째 시즌부터는 신인드래프트가 진행됐고요. 구단입장에서는 좋았겠지만 내심 큰돈을 바랬던 선수들로서는 아쉬움이 컸을 수도 있었것 같아요. 그러다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진로가 창단 1년 정도만에 SK로 합병되어버렸고 저의 프로지도자 생활은 SK감독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Q.SK에서의 두 번째 시즌에서 너무 시즌초에 경질되었어요.
정말이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상황이었습니다. 시즌 시작하고 9경기만에 나가게됐죠. 솔직히 당시로서는 충격이었습니다. 서장훈, 현주엽을 가지고도 하위권으로 처진게 가장 큰 이유였는데 정작 두 선수는 당시 국가대표로 차출되어 팀에 있지도 않았어요. 다들 아시다시피 창단팀이었어요. 두 선수빼고는 팀에 변변한 전력이 없었던 상황에서 할수 있는게 거의 없었죠. 어쨌거나 프로의 세계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떠나 감독은 성적에 책임을 져야되는 자리이고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되었든 이후 유학을 떠나 더 많은 공부도 했고 또 하나의 인생을 개척하는데 도움이 되지않았나싶어요. 세상 모든게 다 그렇겠지만 잃는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죠. 

 

 

 

 

Q.삼성 감독을 맡고있는 동안 플레이오프에 모두 나갔어요. 꾸준한 강팀을 만든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구단, 코칭스태프, 선수들까지 ‘삼위일체(三位一體)’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이 세가지 중 하나만 삐걱거려도 팀이 잘 돌아가기 힘들거든요. 당시 좋은 선수가 많았어요. 주희정, 강혁, 이규섭에 나중에 이상민까지 들어오는 등 센스있고 전술수행능력 좋은 선수들이 쭉 있으면 감독이 뭔가를 하기가 참 편해져요. 거기에 구단도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줬고요.

Q.아, 마침 이상민 언급을 해주셨네요. 삼성시절 이상민을 보상선수로 데려오셨잖아요. 부담스럽거나 그러지않으셨나요?
전혀요. 그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선수를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했습니다. 감독은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요. 어떻게하면 팀 전력을 강하게 할 수 있을까 거기에만 집중해야죠. 그럴 기회가 있는데도 이런저런 요인으로인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게 더 문제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성과 현대가의 관계, 경쟁팀 프랜차이즈 스타 등 다들 저희가 이상민을 영입하기 어려울 것이다고 예상했나봐요. 그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상민이 누굽니까. 대한민국 최고의 정통파 포인트가드잖아요. 비록 전성기는 지나가는 시점이었지만 보상선수로서는 나오기 힘든급의 선수였습니다.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죠. 단순히 기량적인 것을 떠나 이상민같은 선수는 벤치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후배들이 보고 배울게 많아요. 더불어 상대팀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도 선택에 영향을 줬습니다. 연세대 시절에 서장훈과 이상민의 호흡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어린시절부터 손발을 맞췄던 선수들이라 서로 합치게되면 시너지가 상당할 것 같았어요. 막아야죠. 우리팀도 강해지면서 상대팀의 전력상승에도 제동을 걸 수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물론 이전의 정서? 그런 것과는 안맞을 수도 있었을거에요. 이상민 본인도 당황스럽고 잠시 동안은 삼성에서의 생활 자체가 낯설기도 했을 것이고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선수로서 마무리를 잘했고 해당팀에서 감독까지 했잖아요. 나쁘게 풀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육지책(苦肉之策‧제몸을 상해가면서까지 꾸며내는 방책)

“서장훈을 달래줘야하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Q.2005~06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서장훈을 많이 활용 안하고도 우승을 차지했어요. 팀조직력 차원에서 그게 더 좋다고 판단하셨던 것일까요?

정말 그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앞서도 여러번 얘기했지만 감독은 어떻게하면 팀이 이길가에 모든 신경을 기울이는게 맞다고 생각해요. 서장훈이 팀의 대들보임은 맞았지만 이길 수 있는 더 좋은 길이 있으면 거기를 택해야죠. 당시 현대모비스가 정규리그 1위를 하고 저희가 2위를 했어요. 양측의 전력이 그야말로 팽팽했죠. 저희는 서장훈과 올루미데 오예데지 그리고 네이트 존슨까지 있었던지라 높이가 좋았고 현대모비스는 크리스 윌리엄스라는 역대 최고 외국인선수의 리딩과 해결사 능력이 발군이었습니다. 일단 현대모비스는 윌리엄스가 최장신일 정도로 당시 높이가 낮았어요. 때문에 빠른 템포의 농구를 즐겨구사했는데 정규리그에서도 거기에 말려서 저희가 꽤 고전했어요. 서장훈과 오예데지를 다 써서는 속도전에서 못따라갈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해야되나? 고심 끝에 서장훈을 빼고 빠른 템포에도 어느정도 따라갈 수 있는 멤버구성을 만들었습니다. 어차피 그렇게해도 높이는 밀리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죠.

Q.서장훈 입장에서는 화가 많이 났을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죠. 이후 서장훈이 팀을 떠나게되는 이유로도 작용 했으니까요. 저희팀이 현대모비스를 3-0으로 이기고 있던 상황에서도 고심이 컸습니다. ‘충분히 유리한 상황이니까 이제 서장훈을 넣어서 마음을 달래주는게 어떨까’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감독인지라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농구라는게 흐름의 영향을 참 많이 받는 스포츠입니다. 열가지 중 아홉가지를 잘 풀었다 싶다가도 한가지 때문에 흐름을 빼앗겨서 상황이 뒤집어지는 경우도 왕왕있죠. 서장훈을 달래준다는 명목으로 4차전을 다르게 운영했다가 자칫 팀이 패하고 흐름이 넘어가게되면 시리즈 승패는 알 수 없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책임은 누가집니까. 한팀의 수장으로서 너무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냉정을 잃지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상황이 신기하게 돌아갔던 것 같아요. 하승진이 나오기 전까지 서장훈은 가장 큰 선수였잖아요. 프로필 키(207cm)보다 실제로 더 큰 선수에요. 그런 빼어난 기량을 가진 거인을 쓰지못하는 상황이 찾아왔다는게 아쉽고 씁쓸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Q.감독님하면 자유분방한 작전타임 분위기를 떠올리는 팬들도 많아요.
저는 꽉 짜여진 틀안에 선수들을 가둬놓는 절제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각자가 가지고있는 색깔을 살려서 조화를 시키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팀에 스며드는 것이 최상이죠. 자유가 모였다고 혼란이 오는 것은 아니거든요. 어떤 방식으로 합쳐지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뿐입니다.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죠.

Q.미국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셨는데 그것과 연관이 있을까요?
맞습니다. 본래 제 성향에 거기서 배우고 느낀 것이 합쳐졌다고 할 수 있죠. 좋은 것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죠. 미국 지도자들의 작전타임 풍경을 보면 전략이나 그런 부분보다도 선수들과의 소통하는 자세나 마인드가 더 인상깊었습니다. 선수들을 최대한 편하게 해줘야 제 기량을 발휘 할 것 아닙니까. 윽박지르고 그런다고 못하던 선수가 갑자기 잘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실책이 발생할 공산만 높아지죠. 더불어 저는 아무리 큰경기라고해도 부상이 심각한 선수는 절대 기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전부터 있던 진통제 투혼? 이런 것 정말 싫어합니다. 그 한두경기 잡아보겠다고 선수 무리시키면 결국 얻는 것보다 잃는게 많아져요. 선수수명도 깎여나가고 그러면 팀 입장에서도 손해잖아요. 감독 욕심으로 선수가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선수가 아프고 그런 문제에 있어서 크게 간섭은 안하는 편이었어요. 미국에서는 트레이닝파트에서 선수부상 등을 관리해요. 감독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거기를 거치는게 상태를 좀더 정확하게 알 수 있고 여러모로 좋잖아요. 선수에게도 좋고요. 예전에 보면 선수는 아파죽겠다는데 감독이 눈대중으로 대충보고 ‘뭐야, 딱 보니까 괜찮아보이는구만. 어디서 엄살이야?’라는 경우도 종종 있었어요. 아니 무슨 감독이 화타입니까. 어떻게 쓱보고 알아요. 그냥 자기 욕심인거죠. 그런 것을 예방하기위해서라도 분업화는 더 세세하게 이뤄지는게 맞다고 생각해요.

Q.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반말로 대꾸하는 선수들에게도 크게 개의치않았어요. 기분 안나쁘셨나요?
나쁘지 않았습니다.(웃음) 상황이 급하다보면 말들이 짧아져요. 반말이라기보다는 짧은 말인 것이죠. 선수들도 말이 짧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경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이것저것 신경쓸 겨를이 어디 있겠어요. 다만 그런 모습이 시청자들이 볼 때는 ‘어라, 반말하네?’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Q.그렇게 좋은 성적을 올리셨는데도 팀을 나가셨어요. 자의에 의한 것이었나요?
사실 자의에 의한 것은 거의 없어요. 상황이 그렇게 되었고 감독은 지도자로서 책임을 지는 상황인 것이죠. 구단도 철저히 상황을 판단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요. 삼성에 있는 동안 즐겁게 지도자 생활을 해서 별다른 미련은 없습니다. 다만 이후의 성적이 좋지 않아서 마음이 아픈 부분은 있어요. 제가 선수, 코치, 감독으로 모두 삼성에 있었습니다. 삼성이라는 팀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요. 아무쪼록 앞으로 잘 풀려서 명가의 자존심을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Q.선수로서, 지도자로서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삼성이 최근 많이 부진합니다. 현재 삼성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실까요?
예전에 비해 팀의 방향성이 잘 안보이더라고요. 팀이 추구하는 전력의 기준, 전력 강화의 기한 등에서 이해가 안될 때가 많습니다. 다만 이것은 제가 외부에서 보는 시선일뿐이니까 구단은 구단대로 고충이 많을 수도 있겠죠. 더불어 요새 사고가 많이 터지고 있는데 그것은 정말 문제가 있는 듯 싶습니다. 프로선수는 공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수는 사람아니야’라는 생각을 가지기 전에 팬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신분임을 자각해서 도덕적 기준이 더 높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하는 것이죠. 선수 한명 한명의 행동은 팀의 분위기가 되고 구단의 문화가 되요. 팀스포츠의 특성상 톱니바퀴처럼 하나가 되어서 돌아가야하는데 사고치고 일탈하는 선수가 생기면 제대로 움직이겠어요. 자신은 팬의 사랑을 먹고사는 프로 선수이고 삼성그룹의 이미지도 가져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어요.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안준호를 기억하고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기억해주시는 팬분들에게는 항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농구라는 스포츠가 지속되고 있는 것도, 또 우리같은 농구인들이 그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팬분들의 사랑과 관심 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간혹 사고도 터지면서 실망을 끼쳐드리고 있지만 모든 농구인들이 위기상황을 자각하고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가기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조금더 지켜봐주시면 분명히 나아질 것입니다. 팬분들의 사랑으로 하나하나 쌓아온 벽돌이 튼튼한 성이 되어 농구의 부흥을 일으켰으면 좋겠습니다. 늘 감사드리고 다 함께 힘내자고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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