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최연길 칼럼니스트] 2016-2017시즌 NBA 30개 팀 평균 득점은 105.6점이다. 경기당 110득점 이상 올린 팀이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 휴스턴 로케츠, 덴버 너게츠,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등 무려 4팀이나 있었다.
바야흐로 ‘공격 농구’ 시대를 맞은 것이다. 그렇다면 NBA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 평균 100점 이상을 넣으며 공격 농구 시대를 열었던 팀은 어디일까? 정답은 1954-1955시즌 보스턴 셀틱스다.
보스턴 셀틱스는 뉴욕 닉스와 함께 NBA 원년부터 존재했고, 한 번도 연고지와 명칭을 바꾸지 않고 명맥을 이어온 전통의 구단이다. 보스턴은 또한 NBA 역사상 가장 우승을 많이 한 명문 구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스턴이 처음부터 강팀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강팀이 아니라 최약체 중 하나였고 ‘최악의 구단’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런 보스턴을 바꾼 인물은 전설저인 감독 레드 아워백이었다.
‘최악의 구단’ 보스턴
1946-1947시즌 BAA(Basketball Association of America) 일원으로 창단한 보스턴은 보스턴 가든(Boston Garden)을 소유한 월터 브라운 구단주 지원 아래 야심차게 출발했다. 보스턴 지역에 아일랜드계 이민자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한 브라운은 네이스미스 기념 명예의 전당에 ‘팀’으로 이름을 올린 ‘오리지널 셀틱스(Original Celtics)’의 이름을 차용, 보스턴 셀틱스라고 팀명을 지었다. 브라운은 당초 월윈즈(Whirlwinds), 올림피언스(Olympians), 유니콘스(Unicorns) 같은 구단명도 고려했지만 오리지널 셀틱스의 구단주였던 짐 퍼레이에게 수천 달러를 주고 이름 사용권을 사들이며 셀틱스라 지었다.
보스턴의 초대 감독은 존 ‘허니(Honey)’ 러셀이었다. 러셀 감독은 초창기 프로농구 스타였고, 시튼홀 대학 감독을 지낸 명망 높은 인물이었다. 또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하지만 보스턴에서의 두 시즌 동안 러셀은 42승 66패라는 암담한 성적을 남겼다.
1946년 11월 2일(이후 현지시간) 원정에서 열린 프로비던스 스톰 롤러스와의 개막전에서 53-59로 패한 보스턴은 3일 후 홈에서도 시카고 스택스에게 55-57로 패하는 등 5연패로 시즌을 시작했다. 보스턴은 11월 16일 홈에서 토론토 허스키스를 53-49로 물리치며 비로소 창단 이후 첫 승을 신고했다. 이는 당시 11개 구단 중 가장 늦게 첫 승을 따낸 팀이었다.
보스턴은 시즌 중반 4연승을 달리기도 했지만 동부 지구(당시는 컨퍼런스는 없었음)에서 토론토와 나란히 22승 38패에 그쳤다. 다행히(?) 상대 전적에서 4승 2패로 앞선 덕분에 최하위는 면해 동부 5위에 머물렀다. 이는 리그 전체로는 11개 팀 중 8위였고, 6개 팀이 진출하는 플레이오프는 당연히 나가지 못했다. 또 보스턴은 경기당 60.1득점으로 리그 최하위에 그치며 실망만 안겼다.
다음 시즌 보스턴은 20승 28패로 동부 지구 3위로 플레이오프에 나갔다. 하지만 당시 동부 지구에는 4팀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플레이오프 진출이 그리 대단한 성과는 아니었다.
1948-1949 시즌 보스턴은 앨빈 ‘도기(Doggie)’ 줄리언이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줄리언 감독 역시 1947년 홀리 크로스 대학을 NCAA 토너먼트 우승으로 이끈 명장으로,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줄리언도 치욕을 피하진 못했다. 보스턴은 줄리언과의 2시즌 동안 47승 81패(승률 .367)에 그치며 플레이오프조차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만년 하위였던 보스턴에게도 서광이 비추기 시작한다.
구세주 아워백의 등장
1950-1951시즌 직전, 보스턴의 월터 브라운 구단주는 형편없던 구단의 변화를 위해 새로운 감독을 물색했다. 브라운은 보스턴 지역 스포츠기자들에게 “여러분, 저는 농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저에게 괜찮은 감독을 추천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의견은 레드 아워백이었다. 결국 브라운은 새로운 감독으로 레드 아워백을 임명했다. 아워백은 보스턴 합류에 앞서 워싱턴 캐피톨스와 트라이-시티스 블랙호크스를 이끌며 143승 82패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는 3번 올랐고, 1949년에는 워싱턴을 BAA 파이널까지 올려놓기도 했다. 아워백은 당시 블랙호크스 구단주 벤 커너와 갈등이 있었고, 결국 미련 없이 팀을 떠나 보스턴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아워백이 가세한 보스턴은 단번에 강팀으로 부상했다. 이전까지 승률 5할에 오른 적 없었던 보스턴은 39승 30패로 동부 지구 2위를 차지했다. 빈약했던 공격력도 눈에 띄게 상승, 경기당 85.2득점으로 이 부문 4위로 올라섰다. 보스턴은 1951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뉴욕 닉스에게 2전 전패로 탈락했지만, 충분한 가능성을 보였다.
아워백은 이후 보스턴에서 16시즌 동안 모두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빌 러셀’이라는 마지막 퍼즐이 가세한 1956-1957시즌에는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를 4승 3패로 제압하고 마침내 NBA 챔피언에 등극했다. 다음 시즌 보스턴은 세인트루이스에게 설욕을 당해 준우승에 그쳤지만 다시 1959년부터 1966년까지 전무후무한 8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NBA 최고의 명가로 자리 잡았다.
아워백은 보스턴에서 16시즌 동안 1,192승 795패(승률 60%)를 기록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150승 89패(승률 62.8%)를 기록했다. 아워백은 통산 9번의 우승을 기록해 필 잭슨에 이어 이 부문 역대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아워백은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단장으로써 명성을 떨쳤다. 래리 버드와 케빈 맥케일, 데니스 존슨, 로버트 패리시 등을 영입하며 보스턴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한 마디로 보스턴의 역사는 아워백 이전의 ‘암흑기’와 아워백 이후의 ‘황금기’로 나누어질 수 있다.

아워백의 첫 번째 과제 : 퍼즐을 모아라
다시 아워백이 보스턴에 부임할 당시로 돌아가 보자. 그의 목표는 바닥권에 머물던 팀을 재정비해서 강팀으로 변모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과제는 주축이 되어줄 선수들을 영입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보스턴은 1950년 4월 세인트루이스 버머스가 해체하며 남겨진 선수들에 대한 드래프트에서 세인트루이스 대학 출신 센터 에드 매컬리를 지명했다. 매컬리는 세인트루이스에서 16.1득점, 3어시스트를 기록한 센터 겸 파워포워드였다. 삐쩍 마른 체격(203cm, 84kg)에도 뛰어난 득점력을 지닌 선수였다.
다음은 신인 드래프트였다. 1950년 드래프트는 슈퍼스타들을 많이 배출한 NBA 역사에 남을 ‘황금 드래프트’였다. 지역연고 지명으로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에 입단한 폴 아리진, ‘득점 기계’ 조지 야들리, 전설적인 포인트가드 밥 쿠지, 교과서 같은 슈팅가드 빌 샤먼, 건실한 빅맨 래리 포스트 등이 1950년 드래프트를 통해 NBA에 입성했다.
또한 그 해 드래프트는 흑인 선수들이 사상 처음으로 지명됐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시 구단주와 감독 간에 이견이 많았지만, NBA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뉴욕 닉스와 보스턴 덕분에 흑인 선수들이 뽑힐 수 있었다. 그리고 보스턴은 1라운드 1순위로 볼링 그린 주립대학 출신 센터 찰리 셰어를 지명한 후, 2라운드에서는 듀케인 대학 출신 흑인 포워드 척 쿠퍼를 지명했다. 또한 9라운드에서는 워싱턴 캐피톨스가 웨스트 버지니아 주립대학 출신 흑인 포워드 얼 로이드를 지명하며 NBA에서 인종의 벽이 허물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수년간 NBA에서는 흑인 선수에 대한 명문화되지 않은 쿼터제가 있었고 역할도 제한적이었다.)
공격의 퍼즐을 맞추다
보스턴은 드래프트에서 매컬리, 쿠퍼, 던햄을 얻었고 블루컬러 포워드이자 워싱턴에서 아워백과 함께 했던 본스 맥키니(훗날 웨이크 포레스트 감독), 노장 가드 케니 세일러(최초의 점프슈터)를 영입했지만 아직은 2%가 부족했다. 이때 보스턴에게는 천운이 따른다.
NBA 포인트가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포인트가드 밥 쿠지를 얻은 것이다. 당초 아워백 감독은 쿠지를 원하지 않았다. 아워백은 훗날 “저는 쿠지가 대학에서 뛰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가 훌륭한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팀 명단을 봤을 때 가드는 필요가 없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물론 구단주인 브라운은 쿠지에 관심이 있었지만 아워백은 브라운에게 승리를 위해서는 빅맨이 필요하다며 찰리 셰어를 지명했다.
쿠지는 1라운드 3순위로 트라이-시티 블랙호크스에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쿠지와 블랙호크스는 연봉에 이견을 보였고 결국 블랙호크스는 쿠지의 권리를 시카고 스택스에 팔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쿠지는 “제가 아놀드(아워백의 본명)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저는 보스턴에서 뛰지 못한다면 굳이 프로 농구 선수로 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홀리 크로스 대학에서 성적이 좋았고 제 파트너가 운전학원을 열었는데 연봉 1만 달러가 아니라면 굳이 그 일을 관둘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벤 커너(블랙호크스의 구단주)는 7,000 달러를 제의했죠”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쿠지가 보스턴에서 뛰길 원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매사추세츠州에 위치한 홀리 크로스 대학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쿠지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길이 열렸다. 시카고 구단이 해체하며 쿠지가 다시 시장에 나온 것이다. 그 시장에는 맥스 자슬로프스키, 앤디 필립이라는 올스타 가드들도 함께 나왔다. 당초 아워백은 1순위 자슬로프스키, 2순위 필립, 3순위 쿠지로 서열(?)을 정리했다. 그런데 순번이 3순위로 밀리고 만다. 1순위를 뽑은 뉴욕은 자슬로프스키를, 2순위 필라델피아는 필립을 뽑았다.
결국 쿠지는 보스턴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가 말해주듯, 쿠지는 그들보다 훨씬 더 위대한 포인트가드가 됐다.
부임 후 첫 시즌에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아워백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모험을 걸었다. 1951년 4월 26일, 포트웨인에 찰리 셰어를 보내고 빌 샤먼을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한 것이다. 1950년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워싱턴 캐피톨스에 뽑힌 샤먼은 185cm로 키가 크지 않지만 속공에 능하고, 당시로는 흔하지 않았던 점프슛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가드였다. 이로써 보스턴은 쿠지와 샤먼이라는 ‘역대급’ 백코트진과 에드 맥컬리라는 뛰어난 공격형 센터를 보유하며 공격농구 팀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공격 농구의 정점을 찍다!
쿠지-샤먼-맥컬리라는 삼각편대를 앞세운 보스턴은 1954-1955시즌에 그 화력에 정점을 찍었다. 보스턴은 1953년 볼티모어 불리츠에 험 헤데릭과 모 마호니를 보내고, 올스타 포워드 돈 박스데일을 영입했다. 198cm의 포워드였던 박스데일은 NBA, 아니 농구 역사에 남은 위대한 인물 중 하나였다. UCLA 출신인 그는 1948년 런던올림픽에 흑인 선수로는 최초로 미국 대표팀에 뽑혔고 1953년에는 NBA 역사상 흑인으로는 최초로 올스타에 뽑히기도 한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또 1954년 드래프트에서는 1라운드 5순위로 켄터키 대학 출신 프랭크 램지를 지명했다. 이어 3라운드 13순위로 역시 켄터키 대학 출신인 클리프 헤이건을 지명했다. 하지만 헤이건은 군복무로 당장 가세하지 못했는데 향후 헤이건의 지명권은 보스턴의 마지막 퍼즐 빌 러셀과 연관이 되는 중요한 선택이었다.
램지는 193cm의 스윙맨으로, 득점력이 매우 좋은 선수였다. 아워백은 전투력이 강한 램지를 벤치에서 출전시키며 즉시 득점원으로 활용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벤치에서 출전했다’는 것이다. 이전만 해도 NBA에는 ‘식스맨’의 개념이 없었다. 아워백이 램지를 오늘날의 식스맨처럼 활용하면서 팀은 늘 여력을 갖추게 됐고, 이는 이후 샘 존스, K.C. 존스, 존 하블리첵, 케빈 맥헤일로 이어지는 보스턴 식스맨 계보의 최선봉에 선 인물이 되었다.
보스턴은 램지를 지명함으로써 마침내 쿠지-샤먼이라는 막강한 백코트진과 매컬리-박스데일, 파워포워드에 잭 니콜스, 식스맨에 프랭크 램지라는 화려한 공격 라인업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면면은 대단했다. 쿠지 이전까지 NBA는 화려한 스타가 부족했다. 물론 밥 데이비스같은 화려한 포인트가드도 있었지만 조지 마이칸 같은 센터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더 집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킨 주인공이 바로 쿠지였다. ‘하드우드의 후디니(Houdini of the Hardwood : 후디니는 미국의 전설적인 마술사)’라는 별명처럼 현란한 드리블 실력과 패스로 관중들을 매료시켰다. 또한 빌 샤먼은 폴 아리진, 케니 세일러스, 조 퍼크스 등 점프슈터가 귀했던 시기에 점프슛으로 득점포를 가동시켰고 속공에도 능했다. 또한 대부분 구단들이 벤치 멤버들을 단순히 주전들의 체력 안배용 혹은 상대 선수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수비수로만 썼던 반면 보스턴은 램지를 통해 공격력을 끌어올리는 새로운 개념으로 득점력을 배가시켰다. 매컬리, 박스데일, 니콜스 등의 득점력과 기동력 또한 보스턴의 런앤건 농구에는 잘 들어맞았다.
아워백의 런앤건 농구는 대단했다. 보스턴은 72경기 중 100득점 이상 올린 경기가 무려 39경기로 절반을 넘겼다. 또한 110득점 이상 올린 경기도 16경기였다. 저득점에서 24초 공격제한시간으로 득점이 오르던 시대에서 보스턴은 한 시즌 평균 101.5득점을 올리며 NBA 역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 평균 100득점의 벽을 넘은 팀이 되었다. 한 마디로 보스턴의 등장은 요즘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공격농구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이런 화려한 농구로 보스턴은 인기구단이 되었고 매년 관중은 증가했다. 1954-1955 시즌 보스턴은 홈에서 열린 36경기에서 총 175,675명(경기당 평균 4879.9명)의 관중을 동원해 1위를 기록했다.
공격의 선봉은 쿠지였다. 경기당 21.2득점, 6리바운드, 7.8어시스트를 올리며 득점을 주도했고 샤먼이 18.4득점, 4.4리바운드, 4.1어시스트, 매컬리가 17.6득점, 8.5리바운드, 3.9어시스트, 램지가 11.2득점, 6.3리바운드, 2.9어시스트, 박스데일이 10.5득점, 7.6리바운드, 니콜스가 9.9득점을 올리는 등 6명이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다.
화려한 공격농구의 이면에는 아쉬움도 있었다. 보스턴은 36승 36패로 승률 5할을 기록하며 동부 지구 3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랐다. 1라운드에서 라이벌 뉴욕 닉스를 2승 1패로 제압한 보스턴은 동부 지구 결승전에서 시라큐스 내셔널스에게 1승 3패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보스턴은 화려했지만 승률은 5할에 턱걸이했고 결국 궁극의 목표인 우승에는 모자랐다. 그 원인은 바로 득점도 많지만 실점도 많다는 것이었다. 보스턴은 경기당 101.5실점으로 실점 부문 꼴찌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언젠가 이 코너에서 다뤄질 빌 러셀라는 마지막 퍼즐이 끼워지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 팩트 정리 +
1. BAA 출범 이후 원년부터 연고지를 바꾸지 않고 있는 구단은?
뉴욕 닉스, 보스턴 셀틱스
2. 1946-1947 BAA 원년에 보스턴의 승률은?
22승 38패, 동부 지구 5위
3. BAA 원년에 가장 늦게 첫 승을 신고한 팀은?
보스턴 셀틱스(11월 16일 토론토 허스키스에게 53-49로 승리)
4. 레드 아워백 감독이 보스턴 셀틱스에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회수는?
0번(16시즌 모두 플레이오프에 올랐고 9번의 우승. 1959년부터 1966년까지 8연패 달성)
5. 보스턴의 전설적인 가드 밥 쿠지를 드래프트에서 지명했던 팀은?
트라이시티 블랙호크스(현 애틀랜타 호크스)
6. 보스턴이 빌 샤먼을 얻기 위해 포트웨인 피스톤스에 넘긴 선수는?
찰리 셰어(1950년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한 211cm의 센터)
7. NBA 역사상 처음으로 100득점의 벽을 넘긴 팀은?
1954-1955 시즌 보스턴 셀틱스 경기당 101.5득점(총 7305득점)
8. NBA 역사상 처음으로 100실점의 벽을 넘긴 팀은?
1954-1955 시즌 보스턴 셀틱스 경기당 101.5실점(총 7309실점, 리그 8개 팀 중 8위)
9. NBA 최초의 식스맨으로 꼽히는 전설적인 보스턴의 선수는?
잭 램지
10. 보스턴 공격농구의 일원으로 최초의 흑인 올스타였고, 최초의 흑인 올림픽 남자 농구 대표였던 선수는?
돈 박스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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