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곽현 기자] 조우현(41)은 한국을 대표하는 슈터였다. 청소년 대표시절부터 기대를 많이 받았다. 1995년 열린 아시아청소년선수권에서는 득점상, 3점슛상, 베스트5 등 3관왕을 차지하며 한국을 11년 만에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프로에서는 LG, 전자랜드, KCC를 거치며 리그 최고 슈터 중 한 명으로 꼽혔다. 현재 성남중학교 코치를 맡고 있는 그는 현역 시절 얘기를 꺼내며 참 우여곡절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돌아봤다. 은퇴 후 한동안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조우현이 오랜만에 점프볼 독자들에게 안부를 전했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3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홧김에 한 은퇴, 자존심이 뭐라고…
조우현 코치는 2010년 KCC에서 은퇴하며 선수생활을 마쳤다. 당시 나이 서른다섯. 선수로서 적지 않은 나이지만, 사실 그는 1년 더 선수생활을 연장할 수 있었다. 계약기간이 남아있었기 때문. 그때는 밝히지 못 했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구단에 섭섭한 마음이 있었어요. 당시 허재 감독님께서 부친상을 당하고 미국으로 가셨을 때 은퇴를 했어요. 구단에서 방침을 얘기하면서 2군으로 내려가거나 은퇴를 얘기하더라고요. 당시엔 더 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죠. 그래서 구단 제의에 자존심이 상했어요. 어떻게 보면 야반도주처럼 나왔죠. 지금 생각해보면 자존심을 좀 굽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수긍하고 기회를 더 찾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죠. 불명예스럽게 은퇴를 했는데, 허 감독님께도 굉장히 죄송했죠. 장문의 편지로 용서를 구하기도 했어요. 제자로서, 후배로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을 했죠. 좀 더 넓게 생각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팀을 나온 그는 막막했다. 늘 집을 떠나 있던 그가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 가족들과도 어색했다고 한다. 일부러 집에서 나와 고시텔에서 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가족들이 제 눈치를 너무 보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잘 안 있었어요. 거의 노숙자 생활을 했죠. 고시텔에도 있었어요. 몸이나 정신이 다 지치더라고요.”
바닥부터 시작한 지도자의 길
방황의 시간이 계속되면서 조우현은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평생을 해왔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농구의 길을 계속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중국으로 가려고 했어요. 상하이 대학 농구부가 있었는데, 무턱대고 유학원을 찾아가 상담도 받았죠. 그러다 제물포고등학교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를 구한다고 해서 처음으로 코치를 시작하게 됐어요.” 그는 제물포고를 거쳐 2011년엔 천안 성성중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정식으로 팀을 맡아 자기 색깔대로 팀을 꾸렸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 “그 때 안 해본 게 없어요. 직접 선수 구인 전단지를 만들어서 붙이기도 하고, 그러다 쫓겨나기도 해봤어요(웃음). 선수가 6명밖에 없었거든요. 각 학교에 찾아가 키 큰 애들을 좀 모아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이어 2011년 낙생고, 그리고 2014년부터 성남중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어떤 팀이든 어려움은 다 있어요. 성남중은 김정인 코치님, 김상현 부장님께서 잘 만들어놓은 팀이에요. 전 이기는 것보다는 아이들이 농구를 잘 이해하고, 기초를 중요시 여기는 스타일이에요. 특히 수비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요즘 아이들은 공격은 좋아하지만, 수비는 싫어하죠. 저도 선수 때 공격적인 스타일이었지만, 지도자를 하면서 수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예전과 달리 농구를 늦게 시작하는 선수들도 많아지고 있고요. 그래서 더더욱 기초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청소년선수권 우승의 기억
조우현 코치가 농구팬들에게 이름을 알린 건 1995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 우승 당시부터였다.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한국은 결승에 올라 중국을 55-48로 꺾고 11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조우현은 결승전 맹활약을 비롯해 득점상(163점), 3점슛상(34개), 베스트5를 차지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3점슛을 많이 넣었던 기억이 나요. 중국에는 왕즈즈(216cm)라는 엄청난 장신센터가 있어서 우승은 당연히 중국이라고 했죠. 한국은 그냥 슛이 좋고 조직력이 좋다는 평가가 전부였어요. 우승후보라고는 생각을 안 했을 거예요. 그런데 시소게임이 되니까 중국이 많이 당황하더라고요. 우리의 지역방어를 잘 깨지 못 했어요. 그때 슛까지 잘 들어가면서 이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조우현은 이 활약을 인정받아 1996년에는 20세 이하 세계청소년농구 올스타게임에 아시아 지역 대표선수로 선발되기도 했다. 당시 미국선발과 세계선발의 경기에도 출전했다. “아시아에서는 왕즈즈와 제가 뽑혔어요. NBA 전용기를 탔던 게 가장 기억에 남고, 아침에 빵을 주니까 힘을 못 냈던 기억도 있어요. 제가 배고프면 잘 못 뛰거든요(웃음). 그리고 미국팀의 작은 친구가 엄청나게 빠르더라고요. 근데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앨런)아이버슨이었어요(웃음).”
엄청난 3점슛으로 스타덤에 오른 조우현이었지만, 정작 그는 슛감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말한다. “고등학교 때는 슈터가 아니었어요. 힘이 좋아서 드라이브인 하는 걸 더 좋아했죠.”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슈터로 나선 것은 중앙대 진학 이후부터였다.
“강정수 감독님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저를 슈터로 키우셨거든요. 대학 신입생으로 입학하자마자 연습경기를 많이 뛰었어요. 감독님께서 하프라인을 넘어서 한두 발 걸으면 무조건 슛을 던지라고 했어요. 신입생이 선배들도 많은데 그런 슛을 던지기 쉽지 않잖아요. 근데 안 던지면 엄청 혼났죠. 그러면서 슈터로서 책임감도 많이 느꼈고, 시기도 많이 받았어요. 제 슛을 위해 센터가 스크린을 걸어주고, 가드가 패스를 주니까 확실히 책임감이 생겼죠. 제가 실패하면 팀이 무너진다는 생각을 가졌어요. 한 번은 저를 괴롭히던 형이 연습경기 때 ‘우현아 잘 해라. 너만 믿는다’라는 얘기를 했을 때 희열을 느끼기도 했어요.” 그러한 압박감과 책임감 속에 피나는 노력이 수반되면서 그는 대학 최고의 슈터로 거듭날 수 있었다. “전 천재는 아니에요. 타고났다는 말은 많이 듣기도 했지만, 노력해서 좋아진 거죠. 남들 쉴 때 운동을 했고요. 슛 잘 던지는 형들이 그러더라고요. 슛 연습을 많이 하면 언젠가 링이 크게 보일 때가 있을 거라고요. 저도 그걸 느껴봤어요. 슛 연습을 계속 하다 보니 링이 크게 보이더라고요.”
재미나게 농구했던 LG 시절
프로에서 조우현은 리그 정상급 슈터로 인정받았고, 국가대표로 선발돼 태극마크도 달았다. 그런데 조우현에게 선수생활은 어땠냐고 묻자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첫 마디가 나왔다. “주위에서 농구도 잘 했고, 우승도 하고 대표팀도 하지 않았냐고 해요. 근데 힘들 때가 많았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혈압으로 쓰러지셔서 농구를 그만 뒀었어요. 대학교 3학년 때는 허리 디스크 때문에 수술 판정을 받고 10개월 동안 농구를 접기도 했죠. 프로 와서도 1년차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긴 했는데, 적응을 못 해서 많이 힘들었어요. 슬럼프가 많았던 것 같아요. 부상도 많았고요.”
그는 1999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오리온에 지명됐다. 경기당 14.4점. 신인치고는 득점력도 괜찮았다. 한데 첫 시즌을 마치고 그는 LG로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원래 트레이드는 깜짝 발표잖아요. 감독님 간의 의견이 맞아서 이뤄지는 거죠. 서로 윈-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김태환 감독님(당시 LG)이 대학 때 은사였고, 누구보다 절 잘 아는 분이셨어요. 절 살려주신 거죠. LG에서 재미나게 농구 했던 것 같아요.”
2000-2001시즌의 LG는 KBL 역사상 가장 화력이 뜨거웠던 팀으로 꼽히고 있다. LG의 평균 득점은 103.3점이었는데, 정규리그 경기가 21경기로 치러졌던 1997시즌 나래(104.86점)를 제외하면 역대 가장 높은 득점이었다. 경기당 3점슛은 무려 11.42개. 그 중 8할은 조성원-에릭 이버츠-조우현 삼각편대에게서 나왔다. 덕분에 LG는 창단 후 처음으로 챔프전 준우승을 차지했다. 시련도 있었다. 바로 다음 시즌, 대학 후배 송영진의 입단으로 식스맨으로 밀리고 만 것이다. “높이를 중시하다보니까 제가 식스맨으로 밀려났어요. 결국 2라운드 무렵에 감독님을 찾아가 독대를 했어요. 말씀을 드렸죠. 뭐든 시켜만 주시면 잘 해내겠다고. 기회를 달라고요.” 이런 조 코치의 용기에 김 감독은 기회를 줬고, 그는 포인트가드로 포지션 변경을 했다. 정통 포인트가드는 아니었지만, 빠른 스피드와 정확한 외곽슛을 앞세워 백코트를 이끌었다. “감독님께서 한 선수가 공을 오래 가지고 있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으세요. 빨리 패스를 연결해주길 바라셨죠. 가드를 보면서 성원이형, 이버츠한테 패스도 뿌려주고 찬스나면 제가 던지기도 하고…. 재미난 농구를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전문적으로 가드를 봤던 선수는 아니지만, 젊었고, 달리는 거 하나는 자신이 있었거든요.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죠.”
잊을 수 없는 팀 KCC
LG에서 전성기를 보낸 그는 전자랜드를 거쳐 KCC에서 선수생활 마지막을 보냈다. 2008-2009시즌에는 프로 첫 우승도 경험했다. “아마추어 때 우승은 몇 번 해봤지만, 프로에서 우승은 처음이었죠. ‘우승이란 게 이런 거구나’라고 많이 느꼈어요. 전 조연이었지만, 제 역할이었기 때문에 제가 뛰는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 했습니다. 참 보람되고 추억이 많았던 시기였죠. 하승진이라는 큰 선수도 만나보고, (추)승균이 형의 플레이나 성실함도 많이 배웠고요. 노하우나 심리 상태에 대해서도 후배들한테도 많은 얘기를 해줬죠.”
주전으로 코트를 누비던 그는 벤치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달라진 역할에 적응하고, 팀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식스맨들은 ‘왜 나는 안 뛰게 해주나’하는 불만도 있을 수 있고, ‘어차피 경기에 못 나가니까’라며 농담 따먹기를 하는 경우도 있어요. 전 선수, 코칭스태프, 구단이 삼위일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앉아 있는 선수들도 경기에 집중할 수 있게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요즘 선수들은 쇼맨십이 있어서 벤치에서 박수도 쳐주고, 하이파이브도 많이 해주더라고요. 저희 때도 벤치까지 단합이 잘 된 덕분에 우승까지 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일까. 조우현은 KCC에서 보낸 2년이 선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전자랜드에 있을 땐 코트에 많이 못 나왔었어요. 그때도 은퇴를 생각했죠. 근데 허재 감독님이 불러주시면서 한 번의 기회가 더 왔다고 생각했어요. KCC에서 우승도 하고, 벤치에서든 코트에서든 희망을 갖고 운동을 했던 기억이 나요. 저한테 몰렸던 수비자들이 다른 선수들에게 몰리면서 찬스가 났죠. 그러면서 알토란같은 활약을 했던 기억이 있어요.”
조우현은 이제 선수 생활의 기억을 뒤로 하고 지도자로서의 길을 충실히 걷고 있었다. ‘코치 조우현’으로서 말이다. 그런 그에게 앞으로의 포부를 물었다. “지도자로서의 목표는 제 스타일과 지도 방식으로 좋은 선수를 배출하는 거예요. 다양한 팀에서 지도자를 해보고 싶고, 프로에 가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지금은 밑에서 단단하게 다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색깔을 낼 수 있는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조우현 코치는…
1976년생인 조우현 코치는 부산 출신으로 대신초-토성중-동아고-중앙대를 졸업했다. 청소년 대표 시절인 1995년 아시아선수권 우승을 이끌며 대회 득점상, 3점슛상, 베스트5, 3관왕을 차지했다. 1999년 KBL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오리온스에 지명됐고, 2000-2001시즌 LG로 이적해 공격농구를 이끌었다. 2008-2009시즌에는 KCC에서 뛰며 프로 첫 우승의 영광을 누렸다. 정규리그 통산 5,294점 907리바운드 1,371어시스트 460스틸을 기록했다. 3점슛은 971개로 역대 8위다. 2010년 현역 은퇴 후 천안성성중, 낙생고를 거쳐 현재 성남중에서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 사진_신승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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