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최연길 칼럼니스트] 2016-2017시즌은 NBA의 70번째 시즌이다. 긴 역사만큼 NBA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리그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최고는 아니었다. 시작은 미약하고 보잘 것 없었지만 끊임없는 발전과 개혁으로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잡지 점프볼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1996-1997시즌 NBA 개막전은 캐나다 토론토의 스카이돔에서 열렸다. 28,457명이 입장한 이날 경기는 NBA 50주년을 기념하는 경기이자 NBA 사상 첫 경기를 기념하는 경기이기도 했다. 이날 토론토 랩터스와 뉴욕 닉스는 50년 전인 1946년 뉴욕 닉스와 토론토 허스키스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치렀다.
NBA의 태동
1946년 NBA(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가 창립되었다는 사실은 웬만한 NBA팬들이라면 알 것이다. 당시 명칭이 NBA가 아니라 BAA(Basketball Association of America)였다는 사실도 웬만한 NBA팬들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 최초의 프로농구 리그는 BAA였을까? 아니다. BAA 이전에도 수많은 농구 리그가 있었다. BAA에 합병된 NBL(National Basketball League)도 그 중 하나였다. NBL은 BAA보다 더 역사가 길었다. 또, ABL(American Basketball League), 이스턴 리그(Eastern League) 등 수많은 리그가 있었다. 그럼에도 NBA만이 살아남아 최고의 리그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NBA도 초창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많은 팀들이 창단했다 사라지기도 했고 관중들의 외면으로 위기를 맞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다른 리그들과 달리 NBA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로는 경기장을 들 수 있다. BAA 구단주들은 대부분 NHL(National Hockey League), AHL(American Hockey League)의 구단주였고 대부분 아이스링크를 소유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소유하고 있던 네드 아이리시였다. 안정적인 구장 덕분에 불필요한 지출을 줄일 수 있었고 마케팅도 유리했다. 두 번째는 AHL이라는 리그를 이미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제도를 마련하며 안정성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다른 중소 리그와 달리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 대도시를 연고지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후 BAA는 NBL을 흡수했고 조지 마이칸 같은 슈퍼스타들이 등장하며 점점 성장할 수 있었다.
수많은 리그들이 실패했고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프로농구 리그 창설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대학 농구의 인기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대학 농구의 인기를 잘 살린다면 프로 농구도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유혹은 쉽게 떨치기 어려웠다.
이때 두 명의 젊은 사업가가 새로운 프로 농구 리그를 만들기 위해 나섰다. 한 명은 메디슨 스퀘어 가든과 NHL 소속 뉴욕 레인저스를 소유하고 있는 네드 아이리시였다. 아이리시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대학 농구를 통해 많은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농구팀 창단에 관심이 많았다. 또 다른 한 명은 보스턴 가든을 소유한 월터 브라운으로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인 브라운은 1951년에는 NHL의 명문 보스턴 브루인스를 인수하기도 했다.
1930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보스턴 가든 코퍼레이션을 물려받은 브라운은 보스턴 가든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여러 아이스 링크 소유주들과 교류를 했고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했다. 동시에 브라운은 아이스하키팀처럼 지속적으로 팬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프로구단의 창단이 필요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이 두 인물이 의기투합하고 여러 인물들이 이 계획에 동참하며 BAA의 창설이 가시화 되었다.
BAA의 출범
새로운 프로 리그를 창립하기 위해서는 리그를 대표하고 조율할 인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임된 인물은 모리스 포돌로프였다. 우크라니아 이민자였던 포돌로프는 명문 예일 대학 출신 변호사로 당시 AHL의 회장이었다. 포돌로프는 농구라는 종목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법률과 리그 운영에 해박했고 AHL 정관을 바탕으로 BAA의 정관을 만들었다. 1946년 6월 16일 뉴욕의 코모도어 호텔에는 BAA의 창설을 위해 디트로이트의 제임스 모리스, 클리블랜드의 알 섯핀, 뉴욕의 네드 아이리시, 인디애나폴리스의 딕 밀러, 보스턴의 월터 브라운, 워싱턴의 M.J. 율라인, 프로비던스의 조셉 페이, 토론토의 해럴드 섀넌, 버팔로의 제임스 알린저, 필라델피아의 에디 고틀립, 시카고의 모리스 하트, 피츠버그의 제임스 발머, 세인트루이스의 에머리 존스 등 13명의 인물과 포돌로프가 모였다. 당시 모인 14명 중 농구에 대한 제대로 된 식견을 가진 이는 고틀립 단 한 명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운 프로 농구 리그 창설에 대한 열정은 같았다. 여기서 포돌로프는 AHL에 기초를 둔 정관을 발표했다. 이날 자리에 모인 예비 구단주들은 포돌로프가 발표한 정관의 항목에 대한 논의를 주고받았고 수정과 동의 절차를 거쳐 BAA의 탄생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당시 인디애나폴리스의 딕 밀러는 흑인 선수들을 포함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다른 구단주들 반대로 무산된다.
이로써 BAA는 뉴욕 닉스, 보스턴 셀틱스, 필라델피아 워리어스(現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등 여전히 건재한 구단 3개를 포함, 디트로이트 팰컨스, 클리블랜드 레블스, 워싱턴 캐피톨스, 프로비던스 스팀 롤러스, 토론토 허스키스, 시카고 스택스, 세인트루이스 버머스, 피츠버그 아이언멘 등 11개 팀으로 구성된 리그로 출범했다. 버팔로와 인디애나폴리스는 의견 충돌로 합류하지 못했다. 이날 창립 모임에 참가한 인물 중 아이리시, 브라운, 고틀립, 포돌로프는 훗날 네이스미스 기념 농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하키의 도시에서 NBA 첫 경기가 열리다
캐나다는 아이스하키의 인기가 대단한 나라다. 다른 그 어느 종목보다 하키에 대한 열정이 크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州)의 토론토 역시 하키 인기가 대단한 도시였다. 특히 1917년 창단한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명문구단이다. NHL에서 13번이나 스탠리컵을 들어올랐다.
메이플 리프스의 공동 구단주 중 한 명인 해롤드 섀넌은 BAA 창립 모임에 참가한 인물이다. 메이플 리프스 가든스를 소유한 에릭 크래독과 섀넌, 벤 뉴먼은 새로운 프로 농구 리그 창설에 관심이 있었고 BAA 원년에 유일한 비(非)미국 팀으로 BAA에 참여한다. 그들이 프로 농구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농구를 발명한 제임스 네이스미스 박사가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어쨌든 토론토 허스키스는 BAA에 초대 회원으로 가입했고 홈구장 메이플 리프스 가든스에서 BAA 첫 시즌 첫 개막경기라는 역사적인 행사를 치르는 영광의 기회를 얻었다. 당시 토론토의 상대는 뉴욕 니커보커스였다.
개막전이 열리기 4일전인 1946년 10월 28일 토론토 지역신문인 『토론토 글로브 앤 메일』에는 토론토 대 뉴욕의 개막전 광고가 실렸다. 당시 광고에 따르면 개막전 티켓의 가격은 최저 75센트에서 최고 2.5달러였다. 또한 토론토 허스키스 구단의 최장신 선수였던 조지 노스트랜드의 신장인 203cm보다 큰 사람에게는 무료입장을 허용한다는 광고가 실렸다.
역사적인 개막전이 열리기 이틀 전인 1946년 10월 30일 원정팀 뉴욕 닉스는 기차를 타고 캐나다로 이동했다. 뉴욕 닉스 선수들이 탄 기차는 나이아가라 폭포 역에 정차해 캐나다 입국 심사를 받게 되었다. 당시 뉴욕의 감독이던 닐 코할란은 자랑스럽게 그리고 떳떳하게 캐나다 이민국의 입국심사관에게 “우리는 뉴욕 닉스 선수단”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캐나다 입국심사관은 “뉴욕 레인저스는 아는데 비슷하냐?”라고 되물었다. 코할란은 다시 “레인저스는 하키팀이고 우리는 농구팀이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입국심사관은 “캐나다에서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섞인 대답을 했다.
1946년 11월1일 드디어 역사적인 BAA의 첫 경기인 토론토 허스키스 대 뉴욕 닉스의 개막전이 메이플 리프스 가든스에서 열렸다. 입국심사관의 우려와 달리 당시 경기장에는 7,090명의 관중이 몰렸다. 물론 이들 중 아무도 노스트랜드보다 크지는 않았다.
역사적인 첫 번째 골
토론토와 뉴욕의 개막전은 NBA 역사상 첫 경기였기 때문에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다양한 기록들이 탄생한다. 그 중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첫 번째 골일 것이다. 당시는 리바운드, 어시스트 기록이 없어 득점과 자유투 시도 기록만 남아있다.
8시 30분. 드디어 토론토와 뉴욕 경기의 팁오프가 있었다. 처음 공격권을 따낸 쪽은 토론토였다. 토론토는 주공격수였고 감독 겸 선수였던 에드 사도스키가 첫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사도스키의 슛을 불발되었고 뉴욕은 장기인 속공을 시도한다. 3대1 상황이었다. 리오 고틀립에게 패스를 한 오지 세츠맨은 코트 가운데를 달리며 패스를 받았고 림까지 들어가 투핸디드 스쿱샷을 시도한다. 세츠맨의 손을 떠난 공은 그물을 갈랐다. 역사적인 NBA의 첫 득점이었다. 이후 두 팀은 치열한 공방전을 치렀다. 세츠맨의 득점 이후 뉴욕은 6점을 몰아넣고 6-0으로 앞서나갔다. 토론토도 반격을 했지만 1쿼터는 뉴욕이 16-12로 근소하게 앞선 채 마무리했다. 뉴욕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뉴욕은 전반 한때 33-18, 15점차로 달아나며 승기를 잡는 듯 보였다. 하지만 토론토 사도스키의 득점포가 가동되며 추격에 성공했고 전반을 29-37, 8점차로 좁힌 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토론토는 후반 초반 위기를 맞았다. 후반 3분 여경 사도스키가 5번째 반칙을 범해 5반칙 퇴장을 당한 것이다. 5반칙으로 물러날 때까지 사도스키는 18득점을 올렸고 이는 이 경기 양 팀 통틀어 최다 득점이었다. 당시 BAA는 경기 시간을 대학농구의 경기시간 40분 보다 8분 더 긴 48분을 도입했다. 40분을 유료로 보기에는 너무 짧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경기 시간이 8분 늘어났다고 개인에게 허용되는 반칙수를 늘리면 경기가 거칠어질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초창기에는 5반칙 퇴장제를 유지했다. 5반칙으로 물러날 때까지 사도스키는 18득점을 올렸고 이는 이 경기 양 팀 통틀어 최다 득점이었다.
토론토는 사도스키가 퇴장 당했지만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토론토 추격의 중심에는 노스트랜드가 있었다. 이날 16득점으로 사도스키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득점을 올린 노스트랜드의 활약 덕분에 토론토는 44-43으로 역전에 성공했고 3쿼터까지 48-44, 4점차로 앞서며 첫 승의 주인공이 되는 듯 보였다.
역사적인 첫 승의 주인공
이날 경기 4쿼터는 피 말리는 접전이었다. 이날 심판을 맡은 팻 케네디와 냇 메신저는 경기의 흐름을 위해 웬만한 반칙은 불지 않았다. 따라서 경기는 거칠어졌다. 경기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메이플 리프스 가든스에 모인 관중들은 한 선수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비아세티! 비아세티!” 바로 이날 경기의 유일한 캐나다인 선수였던 행크 비아세티의 이름이었다. 야구선수 출신이었던 비아세티의 농구실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도스키 감독은 경기 종료 3분 여를 남기고 비아세티를 투입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결국 비아세티의 어설픈 수비는 뉴욕 추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뉴욕은 딕 머피와 타미 바인스가 득점포를 올리며 역전에 성공했고 결국 뉴욕이 68-66, 2점차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이렇게 NBA 역사상 첫 경기는 뉴욕의 극적인 승리로 돌아갔다. 첫 단추치곤 나쁘지 않은 경기력이었고 흥행성적표도 기대 이상이었다.
아쉽게도 토론토는 이후 흥행 성공을 이어가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성적이었다. 토론토는 1946-1947시즌에 22승 38패로 보스턴 셀틱스와 함께 동부 지구 최하위에 그쳤다. 결국 1946-1947시즌 이후 토론토는 구단을 해체했고 1995년 토론토 랩터스와 밴쿠버 그리즐리스가 창단할 때까지 캐나다에는 NBA 구단이 없었다.
비하인드 스토리 : 괴짜 선수 사도스키
1940년 시튼 홀 대학을 졸업한 사도스키는 196cm, 109kg의 거구로 유명했다. 기동력은 떨어지지만 왼손잡이라 막기 힘들었고 훅슛도 좋았다. 디트로이트 이글스와 포트웨인 피스톤스에서 뛰었던 사도스키는 BAA가 출범하면서 토론토 허스키스의 감독 겸 선수 제의를 받았고 한 시즌 동안 감독으로 22승 38패라는 저조한 성적표를 받아들었고 이후 감독을 맡지 못했다.
하지만 사도스키는 이후 클리블랜드 레블스, 보스턴 셀틱스, 필라델피아 워리어스, 볼티모어 불리츠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1947-1948시즌 보스턴에서 경기당 19.4득점(리그 3위), 1.6어시스트를 기록한 사도스키는 보스턴 선수로는 최초로 올 NBA 퍼스트팀에 선정되기도 했다. 사도스키가 괴짜였던 이유는 NBA 첫 경기에서 볼 수 있었다. NBA 첫 시즌 토론토 구장의 림은 별명이 ‘하수구’였다. 그만큼 공이 잘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도스키가 일부러 림과 백보드를 연결하는 볼트를 느슨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사도스키 본인이 잘 시도하는 훅슛이 더 잘 들어가게 하기 위한 꼼수였다. 하지만 이런 꼼수는 상대팀 선수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사도스키가 부렸던 꼼수는 또 있었다. 사도스키는 육중한 몸 때문에 기동력이 떨어졌다. 따라서 백코트가 느렸다. 사도스키는 토론토 구장의 그물을 좁게 만들어 놓았고 슛이 성공하면 공이 그물에 한 벌 걸렸다가 떨어지며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이런 꼼수에도 토론토는 뉴욕에게 패하며 NBA 첫 승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FACT 정리
1. NBA의 첫 시즌 리그 명칭은? BAA(Basketball Association of America)
2. NBA의 초대 커미셔너는? 모리스 포돌로프
3. NBA 원년부터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팀은? 뉴욕 닉스, 보스턴 셀틱스, 필라델피아 워리어스(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4. NBA 원년에는 몇 팀이 참가했을까? 11개(동부 6팀 : 워싱턴 캐피톨스, 필라델피아 워리어스, 뉴욕 닉스, 프로비던스 스팀 롤러스, 보스턴 셀틱스, 토론토 허스키스, 서부 5팀 : 시카고 스택스, 세인트루이스 버머스, 클리블랜드 레블스, 디트로이트 팰컨스, 피츠버그 아이언멘)
5. NBA 첫 경기가 열린 장소는? 캐나다 토론토의 메이플 리프스 가든스
6. NBA 역사상 첫 득점을 올린 선수는? 오지 세츠맨
7. NBA 첫 경기의 티켓 가격은? 75센트~2.5달러
8. NBA 첫 경기의 승자는? 뉴욕 닉스 68-66 토론토 허스키스
9. NBA 첫 경기의 최다득점자는? 에드 사도스키 18득점
10. NBA 첫 경기의 홈팀 토론토 허스키스의 유일한 캐나다 선수는? 행크 비아새티
11. NBA 첫 경기의 홈팀 토론토 허스키스의 최장신 선수는? 조지 노스트랜드(203cm)
사진_손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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