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최연길 칼럼니스트] 한국에 한기범, 김유택, 표필상, 정경호, 이은호, 조동기, 김주성, 송영진, 오세근, 장재석 등 좋은 센터들을 배출한 중앙대가 있다면 미국에는 패트릭 유잉, 디켐베 무톰보, 알론조 모닝, 로이 히버트, 그렉 먼로 등을 배출한 조지타운 대학이 있다. 그리고 조지타운 대학이 센터 명가가 될 수 있었던 중심에는 존 탐슨 감독이 있었다.
※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1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조지타운 대학은 워싱턴 D.C.에 위치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사학 명문대학이다. 조지타운 대학은 또한 NCAA 남자농구에서도 ‘농구 명가’로 유명하다. 조지타운 대학은 1984년 NCAA 토너먼트 우승, 파이널 포 진출 5회 등 빛나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거구의 감독 존 탐슨 체제에서 1982년과 1984년 1985년 등 3번이나 NCAA 토너먼트 결승에 올랐다. 그 중 우승을 차지한 건 1984년 1번뿐이었지만, 그 한 번의 우승과 함께 존 탐슨은 대학농구에서 우승한 최초의 흑인 감독이 되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엘리트 빅맨 조련사
조지타운 대학은 미국을 대표하는 명센터들의 고향이다. 패트릭 유잉, 디켐베 무톰보, 알론조 모닝, 론 리드, 오델라 해링턴, 제롬 윌리엄스, 자히디 화이트, 루벤 붐체붐체, 마이크 스위트니, 로이 히버트, 그렉 먼로와 우리나라 KBL에서 뛰었던 자밀 왓킨스도 조지타운 대학 출신이다. 물론 조지타운 대학이 빅맨들만 배출한 것은 아니다. 현재 NBA에서 뛰고 있는 제프 그린(올랜도 매직), 오토 포터 주니어(워싱턴 위저즈) 등 스몰포워드와 레지 윌리엄스, 데이비드 윙게이트 등 전 NBA 스몰포워드 그리고 앨런 아이버슨, 슬리피 플로이드 등 전 NBA 포인트가드들도 조지타운 대학 출신이다. 하지만 워낙 뛰어난 센터들을 많이 배출했기 때문에 조지타운 대학 하면 센터 명가가 떠오른다.
조지타운 대학이 센터 명가가 된 이유는 단 하나, 명장 존 탐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208cm로 현역시절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던 센터였다. 1980년대 초반에는 자메이카 출신인 213cm의 패트릭 유잉을 조련해 1982년 준우승, 1984년 우승, 1985년 준우승을 차지하며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이후 탐슨은 콩고 출신 218cm의 장신 센터 디켐베 무톰보와 208cm의 블락샷의 명수 알론조 모닝까지 배출하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세 선수 모두 수비력이 좋고 NBA에서도 꾸준히 기량이 성장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존 탐슨 감독이 사임한 이후에도 조지타운 대학은 꾸준히 좋은 빅맨을 배출했고 현 감독이자 존 탐슨 감독의 아들인 존 탐슨 3세 역시 프린스턴 모션 오펜스를 구사하면서도 아버지의 영향이 있어서인지 그렉 먼로, 로이 히버트같은 좋은 빅맨들을 길러내고 있다.
항상 선수 편이었던 감독
존 탐슨이 이끄는 조지타운 대학은 흑인 어머니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학이기도 했다. 가장 큰 이유는 흑인 사회에서 탐슨 감독이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이유도 있었지만, 학업과 인성 교육도 중시하는 감독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은 유망주 어머니들은 아들을 조지타운 대학으로 보내고 싶어 했다. 1980년대 존 탐슨 감독은 듀크 대학의 마이크 슈셉스키 감독과 함께 4학년까지 졸업을 하지 않으면 NBA 진출을 허락하지 않은 감독으로 유명했다. 이런 경향은 1996년 앨런 아이버슨이 2학년을 마치고 NBA 진출을 선언하면서 깨지기도 했지만, 당시 아이버슨이 학업 문제로 힘들어했고 여동생의 수술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예외가 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듀크 대학의 마이크 슈셉스키 감독은 4학년까지 선수들을 잡고 있었지만 1990년 졸업생 중 아무도 졸업장을 받지 못하는 등 물의가 있었고 1999년 엘튼 브랜드부터 얼리엔트리를 허용한 이후에는 1학년만 마치고 NBA에 진출하는 원앤던(one-and-done)도 많이 허락하면서 이전의 정책을 무색케 만들었다. 반면 탐슨은 수업 출석을 철저히 관리했던 감독이었다.
탐슨은 선수들의 편이었다. 탐슨은 아이버슨이 고등학교 시절 폭력 사건에 연루되어 소년원에 가게 되었을 때 구명운동을 펼치기도 했고, 이는 아이버슨이 미식축구를 포기하고 조지타운 대학에 입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탐슨의 선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80년대 후반의 일이다. 그는 유망주 센터 알론조 모닝을 포함한 조지타운 대학 선수들이 워싱턴 D.C. 지역의 유명한 마약상 레이풀 에드먼드와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드먼드는 조지타운 대학 농구팀의 광팬이기도 했다. 탐슨은 에드먼드를 직접 만나 자신의 선수에게 떨어지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심지어 검지를 들어 에드먼드의 얼굴에 손가락질하는 등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행여 선수들이 나쁜 물에 들어 구설수에 오를 것을 걱정한 것이다. 이후 에드먼드는 조지타운 대학 선수들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탐슨이 말하는 빅맨의 역할
1994년 전미 농구 코치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Basketball Coaches 이하 NABC)에서 발행한 ‘코칭 바스켓볼(Coaching Basketball)’은 NABC 회원인 명장들이 NABC에서 발행하는 협회보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분야에 대해 명장들이 자신만의 방법과 철학이 담겨있다. 그 중 탐슨은 ‘포스트 플레이(Post Play)’라는 글을 실었다. 그 중 ‘빅맨의 역할(The Big Man’s Role)’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포스트맨은 자신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져야 한다. 그들은 눈에 잘 띄는 존재다. 그들의 신장이 크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2. 빅맨들이 공을 터치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들의 주된 임무가 수비와 리바운드더라도 공격에 관여하도록 해야 한다.
3. 빅맨에게 공을 어떻게 받는지 보여주어라.
4. 피봇맨은 항상 타이트한 수비를 받는다. 따라서 수비수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어느 위치로 패스해야 하는 지 결정된다.
5. 빅맨에게 수비수를 상대로 어떻게 자리잡는지 가르쳐라.
a. 등 뒤쪽은 수비수를 막는 지점으로 사용된다.
b. 밖으로 나와 공간을 만들고 몸을 굳히고 팔을 바깥으로 뻗어라.
c. 중요한 것은 밀지 않고 자세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반칙을 해선 안 된다.
d. 패싱 레인을 만들고 팔로 패싱 레인을 보호하라.
e. 어깨를 자유롭게 해서 유연성을 확보하라. 하체(등쪽)는 수비수와 접촉해야 한다.
6. 공을 잡는 한 가지 방법은 공에서 반대쪽으로 가서 공이 내가 있는 쪽으로 올 때까지 수비수를 등 뒤에 두는 것이다. 또는 적절한 시기에 스트롱 사이드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7. 슛 기회를 얻는 한 가지 방법은 볼 스크린을 걸고 수비가 스위치를 할 때 바스켓으로 롤하는 것이다.
8. 내가 바스켓 가까운 곳에 있을 때는 내 뒤쪽으로 스크린을 하고 내가 외곽에 있을 때는 앞쪽으로 스크린을 건다. 바스켓 가까운 곳에서 앞쪽으로 스크린을 걸면 바스켓까지 롤하기에 너무 멀다.
9. 공과 멀리 있을 때도 공에서 시선을 떼지 마라. 그리고 내가 공을 받고자 하는 곳에서 수비수를 떨어지게 하라.
10. 당신의 빅맨이 피봇을 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지 마라. 피봇 플레이플 가르쳐 주어라.
11. 빅맨도 드리블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12. 빅맨의 슈팅
a. 공격에서 중요한 것은 포스트맨이 팔을 계속 높이 들고 있는 것이다. 빅맨의 손이 활발히 움직인다면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다.
b. 훅샷은 훌륭한 공격 무기다.
c. 빅맨도 좋은 자유투 슈터가 되어야 한다.
13. 빅맨의 수비
a. 로우 포스트에서는 앞서려 하라.
b. 일단 포스트맨이 공을 잡으면 포워드와 가드들은 도움수비를 해야 한다.
c. 빅맨을 수비의 리더로 만들어라. 빅맨이 플로어 전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자부심에 도움이 될 수 있다.
d. 포스트맨은 수비에서 교통경찰이다. 말을 많이 함으로써 수비를 지휘해야 한다.
e. 계속 팔을 들고 패싱 레인과 커팅 레인을 막을 준비를 해야 한다.
챔피언의 피가 흐르는 탐슨
워싱턴 D.C. 출신인 탐슨은 카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탐슨의 훌륭한 인품은 어머니와 카톨릭 방식 교육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워싱턴 D.C.에 위치한 카톨릭계 학교인 아치비숍 캐롤 고등학교를 다닌 탐슨은 장신 센터로 워싱턴 D.C. 지역의 유망주였다. 그는 아치비숍 캐롤 고등학교를 1958년부터 1960년까지 3년 연속 워싱턴시 챔피언으로 이끌었고 48연승 신화를 만들었다. 또한 4학년 때는 24전 전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남기기도 했다.
탐슨은 프로비던스 컬리지에 입학했다. 208cm의 장신 센터였던 탐슨은 훗날 보스턴의 시장으로 당선되었고 NBA 시라큐스 내셔널스에도 드래프트되었던 레이 플린과 함께 프로비던스 컬리지를 강호로 만들었다. 3학년이던 1963년에는 NIT(National Invitational Tournament)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4학년이던 1964년에 탐슨은 프로비던스 컬리지 역사상 처음으로 NCAA 토너먼트에 진출시키며 진가를 발휘했다.
대학에서 맹활약한 탐슨은 1964년 NBA 드래프트 전체 25순위로 보스턴 셀틱스에 지명을 받았다. 당시 보스턴은 빌 러셀을 축으로 왕조를 이룬 상태였다. 탐슨은 보스턴에서 비록 두 시즌만 뛰며 74경기에서 경기당 3.5득점, 3.5리바운드를 기록했고 플레이오프 6경기에서 2.2득점, 2.7리바운드에 그쳤지만 두 차례 우승으로 두 개의 우승반지를 얻었다. 또한 보스턴에서 명장 레드 아워백에게서 수비와 팀플레이의 중요성을 배웠다. 탐슨은 일반 농구팬들에게는 명센터의 조련사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는 강력한 맨투맨 디펜스를 중심으로 5명이 고르게 뛰는 팀플레이를 강조한 감독이었다.
또한 탐슨은 NBA 최고의 수비형 센터이자 보스턴 왕조의 중심 빌 러셀의 백업으로 뛰며 포스트 수비력과 리더십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탐슨의 별명은 러셀의 백업이자 보조자라 ‘캐디(the Caddy)’였다.
실패를 넘어 성공으로
1966년 NBA에서 은퇴한 탐슨은 고양인 워싱턴 D.C로 돌아와 세인트 앤서니 고등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탐슨은 1972년까지 세인트 앤서니 고등학교를 122승 28패라는 좋은 성적을 거둬 감독으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 능력을 인정받아 1972년에는 조지타운 대학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조지타운 대학은 1943년 NCAA 토너먼트 준우승팀이지만,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심지어 탐슨이 와서 다시 NCAA 토너먼트에 오르기 전까지 32년 동안 3월의 광란에 진출하지 못했다. 탐슨이 부임하기 바로 전 조지타운 대학의 성적은 3승 23패였다.
1972-1973시즌 탐슨이 이끄는 조지타운 대학은 12승 14패로 아깝게 승률 5할을 달성하지 못했고, 이후 탐슨이 은퇴한 1998-1999시즌까지 27년 동안 단 한 번도 승률 5할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1975년 NCAA 토너먼트에 진출하는데 성공한 조지타운 대학은 이후 1998년까지 24년 연속 NCAA 토너먼트 혹은 NIT에 진출하며 매년 포스트시즌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81-1982시즌 탐슨은 걸출한 수비형 센터 패트릭 유잉을 영입했다. 4학년이 된 민완가드 슬리피 플로이드와 탐슨, 토니 존슨을 앞세운 조지타운 대학은 빅 이스트컨퍼런스 우승을 차지하고 AP 폴 8위에 오르며 NCAA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서부 지역 1번 시드를 받은 조지타운 대학은 와이오밍 대학, 프레즈노 주립대학, 오레곤 대학을 연파하며 1943년 이후 처음으로 파이널 4에 올랐다. 파이널 4에서 강호 루이빌 대학을 50-46으로 제압한 조지타운 대학의 결승 상대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은 탐슨의 친한 친구이자 명장열전의 주인공이었던 딘 스미스가 지휘봉을 잡고 있었고, 패트릭 유잉의 절친이 될 마이클 조던과 제임스 워디, 샘 퍼킨스 등이 포진한 강호로 AP 폴 1위인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두 팀은 NCAA 토너먼트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펼친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승리의 여신이 조지타운이 아닌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손을 들어준다. 조던의 결승골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이 63-62로 우승한 것이다. 하지만 조지타운 대학은 실패를 극복하고 1983-1984시즌에 다시 우승에 도전한다.
34승 3패로 AP 폴 2위로 오른 조지타운 대학은 서부 지역 1번 시드로 파이널 4에서 샘 부이가 버틴 켄터키 대학을 53-40으로 꺾고 우승에 재도전했다. 당시 조지타운 대학의 상대는 아킴 올라주원(당시는 개명 전), 마이클 영, 앨빈 프랭클린이 버틴 AP 폴 5위의 휴스턴 대학이었다. 조지타운 대학도 플로이드는 없었지만 마이클 잭슨, 데이비드 윙게이트, 레지 윌리엄스 등 향후 NBA 진출하는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당시 결승은 유잉과 올라주원이라는 NBA를 호령할 대형 센터들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다. 유잉은 이 경기에서 10득점, 9리바운드, 3어시스트, 4블록슛을 기록했고 올라주원은 15득점, 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비록 유잉은 기록상에서는 올라주원에게 졌지만, 승부에서는 84-75로 승리를 이끌며 조지타운 창단 이래 처음이자 유일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이후에도 조지타운 대학은 수많은 슈퍼스타들을 배출하며 NCAA 토너먼트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올림픽에서의 성공과 좌절
탐슨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딘 스미스 감독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미국 대표팀을 맡게 되었다. 1972년 뮌헨올림픽 결승에서 논란의 경기 속에 처음으로 소련에게 금메달을 내준 미국은 다시 금메달을 찾기 위해 각오를 다졌다. 당시 스미스 감독은 월터 데이비스, 필 포드, 미치 컵책, 탐 라가드 등 자신의 제자 4명과 에이드리언 댄틀리, 퀸 버크너, 필 허바드, 어느 그런필드, 스캇 메이 등 스타들을 앞세워 7전 전승을 거둬 다시 금메달을 찾아왔다. 다만 소련에게 복수할 기회는 갖지 못했다. 준결승서 소련이 유고슬라비아에게 패해 탈락했기 때문이다.
이후 미국은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을 보이콧했고 1984년에는 소련이 올림픽을 보이콧하면서 두 팀은 한동안 재대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리고 1972년 이후 16년 만에 서울올림픽에 미국과 소련이 참가하며 ‘복수’의 기회가 주어진다.
두 팀이 만날 남자 농구는 최고의 관심 종목이었다. 당시 소련에는 221cm의 괴물 센터 아르비다스 사보니스, 사루나스 마루치울리오니스(196cm), 알렉산더 볼코프(208cm) 등 향후 NBA 진출하는 스타들과 발레리 티코넨코(207cm), 리마스 쿠르티나이티스(196cm) 등 내외곽이 탄탄한 강호였다. 이에 맞서는 미국은 데이비드 로빈슨(216cm), 미치 리치몬드(196cm), 허시 호킨스(191cm), 댄 멀리(198cm), 대니 매닝(208cm)가 있었지만 다른 대표팀들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았다. 로빈슨이 있었지만 210cm 이상이 단 한 명이었고 스테이시 킹, 션 엘리엇, 데릭 콜먼 등 당대 대학농구 스타들이 제외된 것도 아쉬웠다.
당시 미국팀의 지휘봉을 잡은 인물은 바로 탐슨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흑인으로 대표팀 감독이 된 탐슨은 강력한 수비를 통해 예선에서 전승을 거두며 4강에 올랐다. 반면 소련은 예선에서 블라데 디바츠, 드라젠 페트로비치, 토니 쿠코치, 디노 라자, 자르코 파스팔리, 스토이코 브랑코비치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에게 79-92로 완패해 4강에서 미국과 상대하게 되었다. 미국은 로빈슨과 함께 팀을 이끄는 매닝이 전반에 파울트러블에 걸리며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로빈슨이 사보니스에게 밀리며 76-82로 패해 1972년 설욕에 실패했다. 이날 패배로 탐슨 감독은 많은 질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패배는 미국이 NBA 스타들이 포진한 드림팀을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존 탐슨 어록
“선수가 가장 배우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언제 드리블을 시작하고 언제 드리블을 멈춰야 하느냐다.”
“단순함을 유지해라. 나는 선수들에게 내가 천재라는 것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허슬플레이를 하고, 루즈볼에 몸을 날리고, 롱 리바운드를 잡으려 달려가고, 수비에서 소통을 할 수 있도록 강인해야 한다.”
“시체를 일어나게 하는 것보다 바보를 조용히 만드는 것이 쉽다.”
존 로버트 탐슨 2세 프로필
1941년 9월 2일 워싱턴 D.C. 출생
1964년 프로비던스 대학 졸업(1963년 NIT 챔피언)
1964년 NBA 드래프트 25순위 보스턴 지명(~1966년)
1972-1999년 조지타운 대학 감독(통산 596승 239패)
- 1965, 1966년 NBA 챔피언
- 1984년 NCAA 토너먼트 챔피언
- 1982, 1985년 NCAA 토너먼트 준우승
- 1985년 NABC 올해의 감독상 수상
- 빅 이스트 컨퍼런스 올해의 감독상 3회(1980, 1987, 1992)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미국 대표팀 어시스턴트 코치(금메달)
1988년 서울올림픽 감독(동메달)
1999년 네이스미스 기념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6년 대학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왼쪽부터 패트릭 유잉, 디켐베 무톰보, 알론조 모닝, 앨런 아이버슨. 탐슨 감독이 배출한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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