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조, 마지막 자존심을 보이다
1997-1998시즌 준우승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점프볼=손대범 기자] 역대 최고의 챔피언에 대한 설문조사였는데, 준우승팀을 꼽은 기자가 둘이나 있었다. 다시 뽑아달라고 부탁할까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프로농구 역대 최고 명승부 시리즈를 연출한 ‘가장 위대한 준우승팀’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부산 기아다. 허재의 눈물겨운 부상투혼을 앞세운 기아는 ‘신성’ 현대를 7차전까지 몰고 가는 저력을 과시했다. 마치 ‘우리가 바로 기아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디펜딩 챔피언, 시작은 불안
프로원년 챔피언 자격으로 시즌을 힘차게 출발했지만 불안요소가 많았다. 부상자 탓이다. 개막전 주전 라인업에 허재와 김영만이 없었다. 두 선수가 전력에 합류해 비로소 라인업이 갖춰진 것은 개막한 지 20일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김영만이 돌아왔던 그날, 원주 나래에게 1점차로 지면서 기아는 9위(3승 5패)까지 추락하고 만다. 1라운드 마지막 경기부터 4연승을 달리면서 상승세를 보이나 싶었지만 이내 4연패를 당하면서 9위, 7위 등을 오갔다. 하지만 침체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허-동-만’ 트리오가 재시동을 걸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연승을 달렸다.
1997년 크리스마스에 치른 LG전은 그 신호탄과 같았다. 허동만 트리오가 무려 74점을 뽑아냈다. (김영만 30점/강동희 23점/허재 21점) 팀도 100-90으로 이겼다.
대전 현대가 11연승으로 일찌감치 독주를 굳히면서 1위는 포기한지 오래. 그러나 상위권 도약은 충분히 노릴 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3라운드를 8승 1패로 마치면서 2위까지 올라섰다.
기아는 마지막 라운드(2000-2001시즌까지 프로농구는 5라운드, 45경기로 진행됐다) 돌입 직전까지 2위를 유지했다. 1월 4일 부산서 가진 현대와의 맞대결에서는 100-77로 대승을 거두면서 자존심을 세웠다. 그런데 이게 웬일? 2월에 접어들자 귀신같이 승률이 떨어지기 시작, 결국 기아는 LG에게 2위 자리를 추월당한 채 3위(26승 19패)로 시즌을 마쳐야 했다. 30대 선수들이 많았던 기아 입장에서 4강 직행 티켓을 놓친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었다.
마무리는 아쉬웠지만 전문가들은 여전히 기아를 우승후보로 꼽았다. 관록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시즌 기아는 전반, 혹은 3쿼터까지 고전하다가도 베테랑들의 노련미를 앞세워 뒤집는 경기도 있었다. 큰 경기에 강한 승부사들은 그만큼 강한 신뢰감을 주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기아는 플레이오프에서 대우와 LG를 각각 4경기 만에 잡았다. ‘수비농구’로 대변되는 LG를 상대로 102점, 104점씩을 뽑아냈다. 이제 결승 상대는 현대. 김유택 SPOTV 해설위원은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다들 함께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사이였으니까요. 다만 나이를 들어가는 시점이었고, 은퇴가 다가오는 상황이었기에 주어진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건 서로들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돌아봤다.

예상외 승리, 자신감을 불어넣다
1~2차전은 기아가 가져갔다. 대전 원정에서 거둔 2승은 의미가 컸다. 당시만 해도 전문가들의 예상은 ‘젊음’과 ‘100% 컨디션’의 현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정규리그 전적도 1승 4패로 기아가 열세) 그러나 기아는 예상을 깨고 1차전을 99-90, 2차전을 87-78로 이긴다. 허재의 역할이 컸다. 1차전에서는 29점, 2차전에서는 30점을 올렸다. 놀라운 건 이미 시리즈가 시작할 당시부터 허재의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허재는 LG와의 시리즈 4차전에서 손등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재는 득점을 쏟아 부었다.
“이 부상 때문에 은퇴를 하더라도 난 뛰겠다”는 각오를 내비췄다. 신선우 당시 현대 감독(현 WKBL 총재)은 기자회견에서 “적이지만 정말 대단하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최인선 위원도 “예상 외 승리였습니다. 이제 홈인 부산으로 넘어가니 해볼 만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죠”라고 1~2차전을 돌아봤다.
하지만 허재의 부상만큼이나 큰 악재도 있었다. LG와의 4강 시리즈 3차전 이후 기아는 사실상 외국선수 1명으로만 경기를 치러야 했다. 저스틴 피닉스가 빠진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부상이었다. 그가 빠진 4차전 한 경기는 그래도 잘 버텼다. 김유택과 조동기 등이 사력을 다했다. 두 선수는 13득점 10리바운드를 합작하며 LG를 67점으로 묶고 챔프전 진출을 도왔다. 그러나 챔프전 시리즈는 달랐다. 조니 맥도웰과 재키 존스를 상대로는 시리즈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열세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도와는 달리 피닉스의 부진은 다른 사연이 있었다. “재계약을 해달라고 그러지 뭡니까. 사인을 하지 않으면 무리해서 뛸 수 없다고 했어요. 기가 찰 노릇이었죠.” 최인선 위원의 회고다. 피닉스는 챔프전에서 5경기 밖에 뛰지 않았다. 평균 출전시간도 12분 6초에 그쳤고, 4.0득점과 1.4리바운드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정규리그 14.3득점 7.0리바운드와 비교해 봐도 형편없는 성적이었다.
이러한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1차전과 2차전 모두 리바운드 싸움을 1~2개 차이로 대등하게 가져갔던 그들이지만 3차전부터는 우려했던 부분이 드러나고 말았다. 3차전에서 기아는 리드를 잡지 못한 채 4쿼터에 무너지고 만다. 93-95. 2점차의 아까운 패배였다. 조성원에게 내준 3점슛이 뼈아팠다. 현대에게는 이 슛이 터닝포인트가 됐고 반대로 기아에게는 치명타가 됐다.
최인선 위원은 여전히 그 3차전이 아쉽단다. “98년 챔피언결정전을 생각하면 아직도 3차전 밖에 생각 안 나요. 피닉스가 10분만, 아니 5분만 제대로 수비해줬어도 이길 수 있는 경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3차전만 잡으면 승산이 있다고 봤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맥도웰, 재키 존스를 잡아보겠다고 골밑만 치중하다 외곽을 맞았는데 조성원의 한 방이 너무 컸습니다.” (허재 역시 훗날 인터뷰에서 “피닉스 원망을 참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현대는 여세를 몰아 4차전을 101-88로 이기면서 시리즈를 원점으로 돌려놨다.

최초의 준우승팀 MVP
“허재, 부상은 꾀병이었나?”
당시 한 신문기사 헤드라인이다. 워낙 활약이 대단하니 부상자처럼 안 보인다는 의미에서 붙인 문장이다.
5차전부터 7차전까지는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중립경기로 치러진다. 기아는 5차전을 86-84로 이기면서 분위기 전환의 발판을 마련했다. 기아다운 레퍼토리로 이겼다. 1쿼터를 19-31로 밀렸으나 김영만과 리드가 폭발하면서 후반에 동점을 만들고 4쿼터 막판에 뒤집었다. 마무리는 허재 몫이었다. 종료 5초를 남기고 위닝샷을 넣었다. 허재의 이 경기 투혼은 많은 팬들을 감동시키고 열광케 했다. 붕대로 감은 오른손도 모자라, 경기 중에는 맥도웰과 충돌해 오른쪽 눈위가 찢어지는 부상도 당했다. 출혈도 있었다. 그러나 허재는 출장을 감행했다. 그의 생각은 1차전과 다를 바 없었다. “은퇴해도 좋다. 이 경기만큼은 이기겠다.” (그는 “관중들 앞에서 뛰면 다 잊게 된다. 경기가 끝난 뒤에 아플지 몰라도…”라고 말한 바 있다.)
KBL과 미디어는 ‘흥행 대박’에 쾌재를 불렀다. ‘전통의 강호’, 그리고 여기에 도전하는 ‘젊은 명가’의 대결은 스토리라인만큼이나 경기 내용도 흥미진진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김유택 위원은 다르게 봤다. “그때 우리는 노장들이 많았어요. 서로들 이야기했죠. 흥행은 흥행이지만, 시리즈가 길어지면 우리가 체력적으로 힘들 거라고.”
예상대로 6차전은 현대가 이겼다. 대등하게 버텼던 기아였지만 4쿼터에 11점에 그쳤다. 7차전에서는 현대가 이겼다. 101-90. 11점차 승리였다. 전반까지는 오히려 기아가 49-43으로 앞서갔지만 후반에 밀렸다. 조성원이 3쿼터에만 12점을 폭발시켰고, 제이 웹은 외국선수 1명이 빠진 기아 골밑을 휘젓고 다녔다. 기아는 김영만이 분투했지만 승부를 뒤집지 못했다. 시즌 마지막 경기가 될 수 있었던 만큼 피닉스도 나왔지만, 이날 22분 59초간 그가 잡아낸 리바운드는 단 1개에 불과했다. 결국 ‘신만이 안다’는 1997-1998시즌의 마지막 주인공은 조금 더 건강하고 에너지가 남아있었던 현대가 됐다.
허재는 7경기에서 23.0득점 4.3리바운드 6.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기록만으로는 감히 판단하기 힘든 맹활약이었다. 부상을 이겨내고 마지막까지 현대 아성을 무너뜨리고자 했던 허재는 결국 챔피언결정전 MVP로 선정(총 37표 중 19표)됐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었다. 이상민(삼성 감독)도 “돌이켜보면 그때 정말 MVP가 안 될 수 없는 활약이었던 것 같아요. 끝나고 찾아뵙고 축하드린다고 말씀드렸던 기억도 나네요”라고 돌아봤다. (허재가 7경기에서 보인 투혼은 여전히 ‘챔프전 명경기’를 꼽을 때 빠지지 않고 있다. ‘부상 투혼’, ‘MVP’ 등의 키워드도 허재가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MVP 트로피만으로는 웃을 수 없었다. 패배 직후 라커룸에 방송 카메라가 들어갔지만, 선수들은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다. 최인선 위원도, 김영만도 다들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허재는 이 시즌을 끝으로 나래로 이적한다. 트레이드 요청에 따른 이적이었다. 이미 시즌이 시작될 때부터 떠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상황. 그는 훗날 점프볼 「올드스쿨」코너 인터뷰에서 1998년 챔프전 우승을 기아와 동료들, 팬들을 위한 마지막 선물로 생각하고 투혼을 발휘했다고 고백했다.
“경기는 항상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최선을 다하면 누가 이길지 모르는 거잖아요. 마지막으로 우승하면서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습니다.”
# 사진 = KBL
투표참여자
손대범, 한필상, 곽현, 김선아, 최연길(이상 점프볼), 김태환, 김동광, 현주엽, 정용검(이상 MBC 스포츠 플러스 해설 및 캐스터), 조성원, 김기웅(이상 KBS N 스포츠 해설위원 및 캐스터), 박상준(SBS 스포츠 캐스터), 조현일, 이재범(이상 월간 루키 기자), 김우석, 손동환(이상 바스켓 코리아 기자), 박상혁(더 바스켓 기자), 노주환, 류동혁(이상 스포츠조선 기자), 최용석, 정지욱(이상 스포츠동아 기자), 이웅희(스포츠서울 기자, KBL 인터넷중계 해설위원), 김동찬(연합뉴스 기자), 박세운(CBS 노컷뉴스 기자), 박지혁(뉴시스 기자), 우충원, 서정환(OSEN 기자), 서민교(MK스포츠 기자), 김진성, 최창환(마이데일리 기자), 주건범(네이버 스포츠), 이선영(다음 미디어), 이동환(팟캐스트 '버저비터' 운영자), 김승현(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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