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온 김태훈 부장 "잊고픈 32연패…또 맛보고픈 우승의 달콤함"

곽현 / 기사승인 : 2016-04-05 0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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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곽현 기자] 농구는 선수들 몫이지만, 선수들이 농구에 집중할 환경을 만들고, 그 활약상을 알리는 건 농구단 프런트의 몫이다. 그래서 구단 프런트와 선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 중에는 웬만한 선수들 이상으로 오랫동안 농구판에 남아 그들만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자리도 마련해봤다. 프런트 시각에서 보는 농구 얘기는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주인공은 18년간 고양 오리온에서 근무하며 농구단의 암흑기와 황금기를 모두 경험한 김태훈(45) 부장이다. 32연패 시절 아픔과 통합우승을 달성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2월호에 실린 기사로 인터뷰는 오리온 우승이 확정되기 전인 1월에 진행됐음을 알립니다.





낯설지 않았던 농구
김태훈 부장이 농구단에서 일을 시작한 건 1997년 9월부터였다. 1996년 오리온 그룹 동양 매직의 신입사원이었던 그는 계열사였던 농구단에도 자주 들르며 얼굴을 익혀왔다. 그러다 그를 눈여겨본 농구단에서 함께 할 것을 제의했고 김태훈 부장은 그 길로 농구단의 일원이 됐다. 그게 바로 오리온과 함께 한 19시즌의 시작이었다.


사실 김태훈 부장은 ‘농구’와 무척 가까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부친 덕분이다. 그의 부친은 실업농구연맹 김홍배 회장이다. 김 회장은 농구대잔치 시절 상무 농구단 감독이었다. (당시 코치는 LG 김진 감독이었다. 김진 감독은 오리온을 2001-2002시즌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봐온 게 농구다 보니 이쪽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죠. 위에서는 제가 어떤 아이인지 아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농구단에 들어오는 걸 제의하시지 않았나 싶어요. 어릴 때는 아버지가 농구장에 잘 데리고 오지 않으셨어요. 일터라고 생각을 하셨으니까요. 아버지 몰래 농구장을 갔었죠. 그런 걸 보면서 농구가 익숙했던 것 같아요.”


장안의 화제였던 32연패


오리온은 고려대 출신의 전희철, 김병철 같은 스타들을 앞세워 젊고 파이팅 넘치는 농구를 펼쳤다. 성적도 좋았다. 출범 후 2시즌에는 모두 4강에 진출했다. “(전)희철이, (김)병철이가 있을 때 재밌었죠. 창단할 때 LG와의 경쟁에서 저희가 앞서면서 고려대 멤버를 영입했거든요. 그 때 LG가 별로 안 좋아했죠(웃음). 팀도 괜찮았어요. 당시 연고지였던 대구가 농구를 잘 했거든요. 또 열광적이었죠. 그러다 1998-1999시즌을 앞두고 희철이와 병철이를 동시에 군대에 보내자고 했죠. 다 보내고 새로 하자고 했던 시즌이에요.”


요즘말로 ‘리빌딩’에 돌입한 오리온이지만, 그 선택이 KBL 역사에 남을 암담한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팀은 32연패를 당하며 KBL 역대 최다연패 기록을 새로 썼다. 국내선수 중 득점을 올릴 선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믿었던 외국선수 그레그 콜버트가 초반에 무단이탈해버렸기 때문. 이 시즌 최종 성적은 3승 42패. 아직까지 이 기록을 깬 팀은 없다. “콜버트가 좋은 선수였어요. 희철이나 병철이가 없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초반에 2연승도 하고 괜찮았어요. 근데 하루는 밤에 전화가 온 거에요. 콜버트가 갑자기 공항에 간다고 하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부인이 바람이 났다는 겁니다. 콜버트 친구의 친구와 바람이 난 거죠. 가만 안 두겠다며 갔어요. 자기는 돈이고 뭐고, 싫다면서요. 막무가내였죠. 결국 그 친구가 가버리고 나서 32연패를 당했죠.”


콜버트는 당시 최고 센터로 평가받았다. 시범경기에서는 삼성 버넬 싱글튼을 1대1로 압도하기도 했다. 만약 그가 남았더라면 32연패라는 참극도 없지 않았을까? “콜버트의 대체선수로 최악의 선수들만 왔어요. 지금처럼 네트워크가 발달돼 있던 때가 아니니 에이전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너무 준비가 안 돼 있다 보니 힘들었어요.”


오리온의 연패 행진은 뜨거운 이슈가 됐다. “15연패를 했을 때 지상파 방송 3사에서 다 달라붙었어요. 아마 홍보효과는 최고였을 거예요(웃음). 동양이란 그룹을 엄청나게 알린 거였죠. 이길 때까지 밀착 취재를 한다고 했었으니까요.”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그때 속이 얼마나 쓰렸을 지는 이루 다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설움 날린 김승현&힉스 콤비
2000-2001시즌 다시 한 번 최하위에 머물며 고난의 시간을 겪은 오리온은 2001-2002시즌 비로소 도약의 날갯짓을 했다. 중심은 신인드래프트 전체 3순위로 선발한 가드 김승현과 외국선수 1순위로 선발한 마르커스 힉스였다. 오리온은 기존 전희철, 김병철에 김승현, 힉스, 라이언 페리맨이 가세하며 화려한 라인업을 구성하게 됐다. 김승현의 환상적인 패스와 힉스의 고공플레이, 페리맨의 리바운드가 곁들어지며 승승장구했고, 결국 통합우승까지 달성했다.


“김진 감독님이 테크니션 외국선수를 뽑고 싶은 생각이 있으셨어요. 신체능력이 좋은 선수가 필요했고, 분업화된 농구를 하길 원하셨죠. 그 때 정태호 단장님께서도 외국선수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책상에 외국선수 자료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죠. 단장님이 추천한 선수가 페리맨이었어요. 페리맨이 어디를 가도 리바운드가 1위라는 거예요. 뭐 볼 필요가 있냐고 하시더라고요. 데려왔는데 진짜 리바운드 1위를 하더라고요(웃음).” 당시 오리온은 화려한 공격농구로 프로농구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덕분에 프런트들도 신바람을 냈다.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가 힉스라 한다.


“시즌 전에 연습경기를 하는데, 영 아닌 거예요. 비실비실해서 어디에 써먹겠냐고 했죠. 그 때 교체도 고민을 했었어요. 힉스가 기다려 달라고 하더라고요. 본 경기 때 잘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요. 시즌 때 맞추겠다고 약속을 했죠. 믿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다가 믿고 가보기로 했죠. 시즌이 다가오면서 심판들 사이에서 얘기가 많이 나왔어요. 점프가 살벌하다고요. 농담으로 한 번 올라가면 라면 끓여먹고 내려오겠다고 했죠. 시즌에 들어가니까 정말로 ‘뭐 이런 놈이 다 있냐’고 했죠. 블록슛으로 트리플더블을 하기도 했잖아요. 끼도 많았고요.”


당시 프로농구의 인기는 지금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지방 구단 같은 경우, 프로농구 선수는 연예인급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 땐 모든 선수들이 인기가 많았어요. 농구 자체가 인기가 많았으니까요. 힉스가 노는 것도 좋아했어요. 가끔 나이트 웨이터들한테 연락이 와요. ‘왔는데 어떡할까요?’라고요(웃음). 대구가 넓지 않아서 다 알고 지냈거든요. 뭐 시켰나 물어보고, 맥주 말고 딴 거 시키면 전화하라고 했죠(웃음). 감시를 하기보다는 무슨 일이 생기면 대처는 해줘야 하니까요.”


당시 김승현은 오리온은 물론 프로농구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였다. 구단 마케팅에도 큰 도움이 됐을 터. 하지만 김 부장은 지금 되돌아보면 아쉬운 부분이 더 많았다고 한다. “지금 같았으면 엄청나게 마케팅을 했겠죠. 근데 프로 초창기라 그런 걸 모를 때였어요. 스타 마케팅이 정립되지 않았을 때였죠. 그 땐 무조건 경기장에 팬들이 많이 오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니까요. 아쉬운 부분도 있죠.”




우승할 수 있을 때 모두 쏟아 부어야
2002-2003시즌 역시 오리온은 승승장구 했다. 정규리그 2연패를 달성하고 다시 챔프전에 올랐다. 하지만 TG삼보(현 동부)에 2승 4패로 패하며 2연패에는 실패했다. 당시 오리온은 챔프전 5차전에서 종료 1분 16초를 남기고 15초간 시간이 가지 않은 이른바 ‘잃어버린 15초 사건’의 피해자가 되며 역전패를 당했다. “현장에선 아무도 몰랐어요. 경기장 전체가 흥분 상태였기 때문에 인지가 힘들었죠. 중계로 보면 알지 모르겠지만요. 15초가 안 가서 지는 바람에 재경기를 요청했고, 승인을 받았죠. 근데 굉장히 애매했어요. 그 때 선수였던 허재 감독이 갈비뼈를 다쳤는데, 그러면 부상이 나은 다음에 해야 하는 건지 하는 얘기도 있었죠. 결국 대승적인 차원에서 재경기를 포기했죠.” 김 부장은 여전히 우승에 대한 아쉬움은 지울 수 없었다고 말한다. “지금 와서 보면 재경기를 받아낸 것보다 TG가 우승한 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다시 생각해보면 역사에 기록되는 건 이긴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라는 거죠.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우승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규리그 우승은 정말 실력이지만, 챔프전은 운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음 기회라는 건 없어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서 잡아야죠. 우리 홈에서 상대가 우승 샴페인을 터뜨리는 장면은 절대 만들면 안 되겠더라고요. 32연패보다 더 슬펐어요. 눈물이 났죠(웃음).”




김 부장의 특별한 장래희망
김태훈 부장은 3대(代)가 농구인의 길을 걷고 있다. 아들 김기태는 현재 양정중 3학년으로 가드를 맡고 있다. 아버지를 보면서 농구에 재미를 갖고, ‘직업’으로써 오리온 선수들을 보며 살아왔던 그에게 ‘아들의 농구’는 어떤 의미일까? 틈날 때마다 아들 경기를 보러간다는 그는 ‘배움’이라 말했다. 아들 덕분에 아마추어 농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게 됐다며 말이다.


어느덧 20주년을 앞두고 있는 김 부장에게 프런트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는지 물었다.
“우승을 해봤기 때문에 이룬 거나 다름없죠. 하지만 또 기회가 온다면 저희 홈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저희 직원들한테도 우승의 경험을 시켜주고 싶은 거죠. 우승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니까요. 개인적으로 ‘반농구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제 꿈이 농구단 자원봉사를 하는 거예요. 백발노인이 돼서 관중들에게 경기장 안내를 돕는 거죠. 그게 되게 어려운 거예요. 농구단에 오래 있어 보니까, 그만 두고 다시 오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만큼 깨끗하게 인정을 받고 나가고 싶어요. 어떻게 보면 프런트 재능기부라고 할까요(웃음).”


#사진 - 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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