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김선아 기자 ]케이티 식구가 된 신윤하를 만났다. 신윤하는 2008년 2군 드래프트를 통해 KBL 무대에 진출했다. 8년의 경력을 가졌지만, 아직 KBL 1군 리그에는 출전한 적이 없는 ‘중고신인’이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잡지 점프볼 7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우여곡절을 거쳐 프로가 되다
신윤하는 연서중으로 진학하며 처음 농구공을 잡았다. 당시 신장이 178cm이던 신윤하가 농구부 코치의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공 갖고 노는 게 재밌었다”며 멋모르고 시작한 농구는 그렇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직 1군 선수로서 거둔 뚜렷한 성과는 없지만, 신윤하는 자신의 농구인생에 대해 “만족한다. 내가 좋아서 지금까지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신윤하는 이후 신림고로 진학하면서 농구를 조금씩 더 알아갔다. 그리고 건국대를 거쳐 프로 진출에 도전장을 냈다. 하지만 프로의 문턱은 높았다. 드래프트에서 10개 구단 어느 곳의 부름도 받지 못했다. 첫 좌절을 신윤하는 담담히 돌아봤다. “내가 모자랐다. 그래서 연연하지 않았다. 부족해서 안됐다.”
드래프트에 탈락한 뒤 신윤하는 헬스장에서 일했다. 하지만 농구공을 놓을 순 없었다. 일본 무대를 두드렸고, 두 팀이 신윤하의 영입을 원했다. 그러나 이번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숙소가 제공되지 않는 등 일본에서 생활하기에는 열악하고 힘든 점이 많았다. 결국 한국 유턴을 택했다.
그렇게 농구공과 이별하는 듯 했지만,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KBL이 2군 리그를 구상한 것. 신윤하는 2008 KBL 2군 드래프트를 통해 KTF(현 케이티)유니폼을 입었다. 신윤하는 “KTF 유니폼을 입었을 때 정말 감격스러웠다. 2군이지만 프로팀의 일원이 됐다는 게 뿌듯했다”라고 돌아봤다.
데뷔 경기는 2009년 7월 13일 상무와의 KBL 서머리그 경기였다. 이날 주전으로 나서 4득점 6리바운드를 기록했다. “1년차 때까지 벌벌 떨었다”던 그는 “김희선 코치님이 나를 많이 가르쳐 주셔서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실력을 키워 1군에 올라가야지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마음가짐은 경기에서도 잘 드러났다. 첫 시즌을 보낸 뒤 신윤하는 쑥쑥 성장했다. 윈터리그에서 한 시즌을 제외하고 매번 두 자릿수 득점을 올렸고 4시즌 연속 대회 베스트5로 선정됐다. 2011년 서울 SK로 팀을 옮겼을 때도 꾸준했다. 신윤하는 7시즌 간 2군 정규리그에서 평균 16.41득점 4.9리바운드 1.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꾸준히 베스트5에 이름을 올릴 수 있어서 뿌듯했다. 다음 시즌에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부여도 됐다. 그래야 인정을 받고 1군 리그에 오를 수 있을테니 말이다.”

8년차 베테랑, 그가 꿈꾸는 것
2014년. 첫 막이 오른 KBL D리그에서 신윤하가 선수단 대표가 됐다. 개막식에서 선수단 선서를 맡았다. D리그로의 변화는 신윤하에게 기회였다. 단순히 이름만 달라진 게 아니라, 2군과 1군으로 나누어진 구분도 사라지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컸다.
신윤하는 이 변화를 즐겼다. D리그에서 평균 25분 54초를 뛰었다. 이는 데뷔 후 가장 짧은 출전 시간이었지만 기록은 더 향상됐다. 경기당 19.09득점 5리바운드 1.2어시스트를 올렸다. 신윤하는 “윈터리그를 흔히들 ‘우리만의 리그’라고 했다. 하지만 D리그는 관중도 많이 오고 농구 관계자분도 많이 와서 좋았다”라며 “내가 열심히 하면 어필할 수 있지 않은가. 더 열심히 했다”라고 했다.
신윤하는 프로에 데뷔한 뒤 1년 단위로 자유계약선수 계약을 맺어왔다. 2011년 SK로 이적한 뒤에는 3시즌 간 SK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 FA시장에서는 SK가 신윤하를 잡지 않았다. 그는 “프로에 온 뒤 매년 1년 단위로 계약해왔다. 항상 ‘이번 시즌이 마지막이다’는 생각으로 농구했다. SK에 서운한 것은 없다. 오래 버텼다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말했다.
태연한 척했지만,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농구공을 놓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때 친정팀 케이티가 그를 찾았다. 선수 시절 함께 생활한 조동현 감독이 그를 부른 것. 신윤하는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다”라고 연거푸 말했다.
다시 이어가게 된 프로생활. 하지만 돌아온 케이티 생활은 결코 쉽지가 않다. 지독한 훈련 강도 때문이다. 케이티는 새벽, 오전, 오후, 야간 훈련으로 2015-2016시즌 준비가 한창이다. “처음 프로에 왔을 때를 제외하면 가장 힘든 시기”라는 신윤하. 그는 “감독님께서 우리 신장이 낮으니까 수비와 뛰는 농구로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 운동량이 많다고 하신다. 다들 참고 묵묵히 한다”라고 설명했다.
어느덧 KBL 데뷔 8년 차. 하지만 아직도 그가 이루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KBL 1군 리그에 나선 적이 없다. 엔트리에 이름 올린 것까지가 전부다. 운이 따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가 몸담아왔던 팀들은 모두 포워드 라인이 두꺼웠다. 좀처럼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신윤하는 “가는 팀마다 포워드가 좋았다. 어렸을 때는 1군 리그에 못가는 것에 아쉬움이 있었지만. 한 시즌, 한 시즌이 지나면서 받아들이게 됐다. 불만 없이 지금 주어진 환경에서 내 실력을 보여주면 된다”라고 말했다.
8년의 인고.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신윤하는 이를 매번 이겨냈다. 그가 좋아하는 농구를 위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기대도 져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내 원동력은 가족이다. 와이프와 아이들 얼굴을 생각하며 버틴다.”
인터뷰를 마치며 신윤하에게 농구선수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를 물었다. 신윤하는 “아직 1군 정규리그를 못 뛰었다. 8년을 뛰면서도 아직 경기에는 못 뛰어봤다. 정규리그에서 뛰는 게 소원이고 목표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다시 돌아온 케이티에서 내 한 몸이 부서질 때까지 팀을 위해 희생하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가족을 위해 더 열심히, 악에 받쳐 훈련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신윤하에게서는 절박함도 엿볼 수 있었다. 그 절박함이 올 시즌에는 꿈의 실현으로 이어질 수 있길 기대해본다.

BONUS ONE SHOT | 내가 농구를 할 수 있는 힘!
신림고등학교 김승기 코치(현 인헌고 감독)
고등학교 은사님이다. 나는 중학교 때 연골판을 다친 뒤 수술을 안 하고 계속 농구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때 연습경기에서 십자인대가 끊어졌다. 이 무렵 김승기 코치님은 다른 학교로 전근을 떠나신 뒤였다. 그런데 계속 마음이 쓰이셨나 보다. 대학교, 프로에 간 뒤에도 내가 계약했는지 물어보시고, 내가 갈 곳은 없는지 알아봐 주셨다. 자주 연락을 못 드리고 찾아뵙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이다.
케이티 조동현 감독
다시 케이티로 불러줘서 정말 감사하다. 그런 만큼 열심히 안할 수가 없다. 처음에 KTF에 왔을 때 나는 선수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후배인 (윤)여권이와만 말하곤 했다. 이때 선수이던 조동현 감독님이 일부터 나에게 장난을 치곤했다. 팀에 잘 녹아들지 못하자 신경을 쓰신 것이다. 당시 원정경기에 가면 감독님과 방을 같이 쓰기도 했다.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감독님과 눈도 못 마주치겠다. 무섭다(웃음).
아내 김유리
친구 소개로 만나 5년을 연애한 뒤 3년 전에 결혼했다. 3살이 된 딸 신비와 200일된 신율이를 혼자 돌봐야 해서 미안하다. 아내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라고 뒤에서 많이 도와줬다. 그 힘으로 1년, 1년 버텨 온 것이다. 이번에 케이티와 계약한 뒤에도 ‘잘해보라’고 매일 응원해주고 있다. 내 은인이다.
#사진 - 유용우 기자, 신윤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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