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프볼=최연길 칼럼니스트] 2m가 넘는 거인들이 즐비한 NBA 코트에서 타이론 ‘먹시’ 보그스, 앤서니 ‘스퍼드’ 웹, 얼 보이킨스처럼 170cm 남짓한 난쟁이(?)들이 거인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는 장면은 늘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지금 소개할 인물도 코트 위 ‘난장이’ 중 한 명이다. 선수보다는 감독으로 더 빛났던 그는 거인을 조종하는 감독이었다. 170cm의 단신 감독, 마이크 프라텔로가 그 주인공이다.
마이크 프라텔로는 170cm의 단신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신장이 워낙 작아 농구 선수로는 성공하기 힘들었지만, 신장에 제약이 없는 감독으로는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유일하게 올려보지 않아도 됐던 선수는 그와 키가 같았던 스퍼드 웹뿐이었다. 하지만 210cm가 넘은 거인 선수들도 마음속으로는 프라텔로 감독을 우러러볼 뿐이었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잡지 점프볼 7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프라텔로의 철학
NBA 팬들에게 마이크 프라텔로는 NBC와 TNT의 해설가로 낯익은 인물이다. 1990년 애틀랜타 호크스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곧바로 NBC의 해설가로 데뷔해 캐스터 마브 앨버트와 호흡을 맞췄다. 감독 경험을 살린 프라텔로의 해설은 상당히 분석적이었고 깊이도 있었다. 또한 프라텔로는 화면 위에 해설가가 직접 다이어그램을 그려 전술을 분석하는 시스템인 ‘텔레스트레이터(Telestrator)’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앨버트로부터 ‘텔레스트레이터의 짜르(The Czar of the Telestrartor)’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은 프라텔로를 ‘짜르’라고 부르곤 했다.
프라텔로는 해설가로 데뷔하기 전 애틀랜타 호크스의 감독으로 8시즌을 보냈다. 8시즌 동안 프라텔로는 5차례 플레이오프에 올랐고, 그 중 3번이나 동부 컨퍼런스 준결승에 오르는 등 실력을 과시했다. 1980년대는 ‘동고서저’의 시대로 동부 컨퍼런스에는 ‘맹주’ 보스턴 셀틱스, ‘배드보이스’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밀워키 벅스, 시카고 불스, 필라델피아 76ers 등 강호들이 즐비했다. 애틀랜타도 동부의 강호 중 하나로 군림했다.
농구선수로 유명하지 않았던 프라텔로가 명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분석적이고 연구하는 태도 그리고 그의 확고한 철학 덕이었다. 프라텔로는 휴비 브라운, 루 캄파넬리, 롤리 마시미노 등 명장 밑에서 경험을 쌓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만의 농구 철학을 완성해 명장 반열에 올랐다.
프라텔로는 강팀이 되기 위해서는 3가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강조한 3가지 시스템은 첫째, 공격 시스템, 둘째, 수비 시스템, 셋째는 소통의 시스템이다. 공격과 수비를 강조하는 것은 1980년대 한국 농구의 조크였던 “우리가 지금 안 되는 게 두 가지가 있어 바로 공격과 수비야”라고 말한 모 감독의 이야기가 떠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프라텔로는 공격과 수비 시스템을 확립하기 위해 다양한 드릴(drill)을 개발했고 또한 기록(stat)의 중요성도 인지하고 있었다.
공격에서 프라텔로는 1990년 중반 이후 3점슛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을 인지, 선수들에게 3점슛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경기당 20개 가까운 3점슛을 시도해 33% 이상의 적중률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수비 철학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비에 헌신적이어야 하고 자신만의 수비 드릴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상대가 수비를 깼을 때는 그에 대한 수비 보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지막은 소통이다. 그가 강조하는 소통은 선수간의 소통, 경기 중의 소통, 감독과 선수간의 소통 등 모든 종류의 소통이 포함되어있다. 특히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철학을 앞세워 프라텔로는 거인들이 즐비한 NBA 무대에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특히 프라텔로는 강력한 수비와 신인을 중용하는 과감한 변화를 통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프라텔로는 그가 맡았던 애틀랜타, 클리블랜드, 멤피스 등 서로 다른 세 팀에서 모두 실점 1위를 차지한 감독이다. 특히 1994-1995시즌부터 1996-1997시즌에는 클리블랜드를 3시즌 연속 실점 1위 팀으로 만들기도 했다.
운동영재에서 코치로
1947년 2월 24일(이하 현지 시간) 뉴저지州 해켄색에서 태어난 마이클 로버트 프라텔로는 어린 시절부터 여러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해켄색 고등학교 시절 농구, 야구, 미식축구, 심지어 필드하키팀 대표로 뛰었고, 각 종목에서 주장으로 활약하는 등 한 마디로 ‘운동 천재’였다. 하지만 농구 선수가 되기에는 키가 너무 작았다. 고등학교 졸업반 때 버건 카운티 미식축구 ‘올 카운티 팀’에 뽑힌 프라텔로는 미식축구 장학생으로 뉴저지州 몬클레어 주립 대학으로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 프라텔로는 모교인 하켄색 고등학교로 돌아와 농구와 미식축구 팀 어시스턴트로 활동했다. 1970년에는 로드아일랜드 대학의 톰 카모디 감독의 제안으로 대학원팀과 1학년 팀을 지도하는 어시스턴트 코치가 되어 농구 코치계에 발을 내딛었다.
이후 1972년에는 제임스 메디슨 대학의 감독으로 부임한 루 캄파넬리 감독의 제안을 받아 제임스 메디슨 대학의 어시스턴트 코치가 되었다. 캄파넬리 감독은 프라텔로의 대학 선배로 훗날 캘리포니아 대학(버클리)의 감독으로 부임해 제이슨 키드와 함께 캘리포니아 대학의 부흥을 이끈 감독이다. 이처럼 여러 명장들과 함께 풍부한 경험을 쌓은 프라텔로는 1978년 또 다른 ‘명장’ 휴비 브라운의 부름을 받고 애틀랜타 호크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부임했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NBA에 입성한 순간이었다.
휴비 브라운은 1975년 ABA의 켄터니 커널스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NBA 「올해의 감독」에 두 차례나 선정된 후 2005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명성 있는 지도자다. 또한 브라운은 훗날 방송해설로도 프라텔로의 선배가 되는 인물로, 감독과 해설 등 여러 면에서 멘토 역할을 한 스승이었다.

애틀랜타의 지휘봉을 잡다
1980-1981시즌 막판 휴비 브라운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팀을 떠나자 프라텔로는 감독 대행이 되어 3경기를 지휘했다. 이것이 프라텔로의 첫 감독 데뷔였다. 하지만 데뷔전은 혹독했다. 데뷔전에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 107-115로 패한 프라텔로는 이후 시카고 불스에게 83-108, 25점차로 대패했고 마지막 경기였던 밀워키 벅스와 경기에서도 연장 접전 끝에 128-132로 패해 3전 전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하지만 애틀랜타 구단은 프라텔로가 어시스턴트 코치로 재임하는 동안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1982-1983시즌 프라텔로는 뉴욕 닉스 감독으로 부임한 휴비 브라운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1시즌 동안 뉴욕에 머문 프라텔로는 공석이 된 시카고 불스 감독 자리에 지원했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시카고 구단 관계자들은 프라텔로가 키가 너무 작아 선수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탈락시켰다.
그의 진가를 알아봐준 곳은 바로 애틀랜타였다. 케빈 로거리가 떠난 자리를 프라텔로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이미 어시스턴트 코치 시절부터 그의 능력을 지켜봤던 애틀랜타 구단은 면접 후 곧바로 프라텔로를 감독에 임명했다. 당시 애틀랜타는 2년차 스몰포워드 도미니크 윌킨스와 댄 라운드필드, 트리 롤린스, 에디 존스가 버티고 있던 복병이었다. 또한 유망주 루키 랜디 위트먼(현 워싱턴 감독)과 닥 리버스(현 LA 클리퍼스 감독)가 들어와 벤치도 탄탄했다. 1983-1984시즌 애틀랜타는 40승 42패를 기록하며 동부 컨퍼런스 7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랐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애틀랜타는 밀워키를 만나 선전했지만 2승 3패로 패해 다음 시즌을 기약해야 했다.
애틀랜타를 뜨겁게 달구다
프라텔로는 당시 구단주였던 테드 터너(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구단주였고 CNN, TBS, TNT 등을 소유했던 언론재벌)와 면담에서 “테드, 우리가 좋은 팀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열심히 뛰길 원하는 젊은 선수들을 영입해야 하고 열정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라며 변화를 시사했다.
이후 애틀랜타는 젊은 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애틀랜타는 노장 라운드필드를 디트로이트로 보내고 대신 앤트완 카와 클리프 리빙스턴이라는 젊은 피를 수혈했다. 또한 LA 레이커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샤프슈터 마이크 맥기를 영입했다. 또한 드래프트에서는 빅맨 케빈 윌리스를 영입했다. 1984-1985시즌 애틀랜타는 34승 48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애틀랜타의 미래는 밝았다. 1985년 루키 존 배틀과 스퍼드 웹, 존 콘칵을 영입한 것도 호재였다. 20대 초중반의 핵심 전력을 꾸리면서 계획을 멀리 보고 짤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5-1986시즌은 프라텔로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애틀랜타는 50승 32패로 동부 컨퍼런스 4위로 도약했다. 특히 윌킨스는 경기당 30.3득점으로 득점왕이 됐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3승 1패로 제압한 그들은 2라운드에서 보스턴 셀틱스를 만나 잠재력을 과시했다. 비록 1승 4패로 무릎을 꿇었지만, 한 시즌 만에 팀을 변모시킨 프라텔로는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클리블랜드와 멤피스의 성공과 실패
1989-1990시즌 41승 41패로 승률 5할을 기록했음에도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애틀랜타는 마이크 프라텔로 감독과 이별을 선언했다. 이후 프라텔로는 해설가로 변신했다. NBC에서 해설가로 활동한 프라텔로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NBC 해설위원으로 ‘원조 드림팀’의 중계를 맡았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1993-1994시즌 프라텔로는 클리블랜드의 감독으로 다시 코트에 복귀했다. 클리블랜드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동부의 강호 중 하나였지만,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노쇠화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1993-1994시즌에는 주전 센터 브래드 도허티가 32경기를 결장했고, 파워포워드 래리 낸스도 49경기를 빠지는 등 정상이 아니었다. (급기야 두 선수는 1994년에 은퇴했다.) 하지만 프라텔로는 터렐 브랜든, 바비 필스, 크리스 밀스, 타이론 힐 등 신예들을 중용하며 47승 35패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변화를 해야 했던 클리블랜드는 1995년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마크 프라이스마저 워싱턴 위저즈로 트레이드하며 대대적인 개편에 들어갔다. 덕분에 1995-1996시즌에는 47승 35패를 기록하면서 변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1997년에는 신인 4명을 중용하는 모험도 감행했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전 시즌 42승 40패(9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면서 위기감을 느끼던 상황이었다. 프라텔로는 삼각 트레이드를 단행해 숀 켐프를 영입했다. 동시에 221cm의 지드루너스 일거스커스, 브레빈 나이트, 세드릭 핸더슨, 데릭 앤더슨 등 4명의 신인을 과감하게 기용하면서 색깔을 확 바꾸었다. 과감한 시도는 성적으로도 이어졌다. 우려와 달리 47승 35패로 동부 6위까지 올랐던 것. 비록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에 의해 1승 3패로 탈락했지만, 프라텔로의 시도는 획기적이었다는 평이었다.
프라텔로와 클리블랜드의 인연은 1999년에 막을 내렸다. 직장폐쇄로 시즌이 거의 반토막(82경기→ 50경기)난 가운데, 주축선수인 숀 켐프가 몸관리에 소홀해 시즌 내내 부진하면서 클리블랜드도 22승 28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다. 프라텔로도 결국 사임하고 말았다.
프라텔로가 다시 지휘봉을 잡은건 2004년이었다. 스승 휴비 브라운이 멤피스 감독직을 내려놓자 그 후임으로 가게 됐다. 그는 2004-2005시즌에 기틀을 잡고, 2005-2006시즌에는 49승 33패를 거두면서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기도 했다.
프라텔로는 17시즌 동안 통산 667승 548패(승률 .549)를 기록했고 플레이오프에 11차례 올라 통산 20승 42패(승률 .323)을 기록했다. 비록 NBA 우승 경험이 없고 컨퍼런스 결승조차 오르지 못했지만 과감한 변화와 자신이 개발한 다양한 드릴을 통해 성공가도를 달렸다.

‘프라텔로 매직’, 우크라이나를 깨우다
2011년 프라텔로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애틀랜타 시절, 감독과 선수로 인연을 맺은 알렉산더 볼코프 우크라이나 농구 협회장의 부탁으로 우크라이나 대표팀을 맡게 된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소련대표팀 포워드로 참가해 금메달을 차지했던 볼코프는 애틀랜타에서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뛴 바 있었다. 볼코프가 프라텔로에게 부여한 임무는 바로 우크라이나를 2014년 FIBA 월드컵에 진출시키는 것이었다.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우크라이나는 유럽 농구의 변방이었다. 물론 슬라바 메드베덴코, 비탈리 포타펜코 등 여러 NBA 선수들을 배출하기도 했지만, 국제대회 성적은 항상 신통치 않았다. 1997년 처음 유로바스켓(유럽선수권)에 출전한 우크라이나의 역대 유럽 최고 성적은 1997년 기록한 13위였고 이후 성적은 계속 하락 중이었다. 2011년 리투아니아에서 열린 유로바스켓에서 17위에 그친 우크라이나가 월드컵 진출 티켓을 따기 위해서는 6장의 티켓이 달린 2013 유로바스켓에서 최소 7위(스페인은 개최국으로 자동출전) 안에 들어야 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프랑스, 벨기에, 영국, 독일, 이스라엘 등 만만치 않은 팀들과 함께 A조에 속했다. 우크라이나가 예선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최소 A조 3위에 들어야 했다. 첫 경기에서 우크라이나는 난적 벨기에를 맞아 58-57, 1점차로 승리하며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미국에서 귀화한 유진 지터와 세르게이 글라디르가 분전한 우크라이나는 이어 이스라엘, 독일, 영국을 격파하며 4승1패로 2라운드에 진출했다.
2라운드에서 세르비아, 리투아니아, 프랑스, 벨기에, 라트비아와 함께 E조에 편성된 우크라이나는 최소 4위에 올라야 8강에 올라 월드컵 티켓을 바라볼 수 있었다. 첫 경기였던 라트비아와 경기에서 51-85로 충격의 패배를 당한 우크라이나는 2차전에서 강호 세르비아를 82-75로 잡는 이변을 연출하며 2승 3패로 4위를 차지해 8강에 올랐다.
8강에서 크로아티아에게 72-84로 패한 우크라이나는 이탈리아와 월드컵 티켓을 놓고 최후의 일전을 치렀다. 이탈리아를 66-58로 꺾고 2013 유로바스켓에서 6위를 차지한 우크라이나는 농구월드컵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른바 ‘프라텔로 매직’이 일군 기적이었다. 비록 우크라이나는 2014 월드컵에서 2승 3패로 2라운드 진출에 실패했지만, 강호 터키와 도미니카 공화국을 잡는 등 저력을 과시했다. 이처럼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만의 철학과 전술로 팀을 바꿔놓았고, NBA든 FIBA든 무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마이크 프라텔로 프로필
생년월일 1947년 2월24일
출신대학 몬클레어 주립대학
주요경력 1986년 NBA 올해의 감독
NBC/TNT 해설위원
애틀랜타, 클리블랜드, 멤피스 감독
우크라이나 대표팀 감독
NBA 통산 667승 548패(승률 .549)
#사진 - FIBA, 일러스트 김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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