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 기사는 점프볼 1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할 거면 제대로 하고 마무리해!”
김완수 감독이 농구와 연을 맺은 건 산곡북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곡북초등학교가 설립된 1984년, 4학년이 되며 전학을 간 김완수 감독이 농구부 입문 전 정식으로 배운 첫 종목은 육상이었다. 친구들과 뛰어노는 걸 워낙 좋아했고, 운동에 소질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공부보단 친구들이랑 축구, 오징어게임하는 걸 좋아했어요. 4학년 때 초등학교를 옮겼는데 농구부가 있었고, 담임선생님이 추천해주셔서 해봤는데 재밌더라고요. 육상만 하다 손으로 공 가지고 노는 걸 처음 해보니 흥미가 생겼죠. 당시 선생님도 재밌게 가르쳐주셔서 빠져들게 됐던 것 같아요.” 김완수 감독이 농구부에 입문할 당시 최고참이 신기성이었고, 1년 후배로 김승현도 들어왔다.
농구명문 송도중-송도고를 거치며 유망주로 인정받은 김완수 감독은 건국대에 입학했지만, 이때부터 농구 인생이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다. 고(故) 전규삼 선생의 창의적인 훈련, 송도고의 자율적인 문화와 달리 선후배 체계가 엄격한 대학농구에 적응하지 못했다. “기대를 받으며 입학했고, 1학년부터 많은 기회를 받았어요. 그런데 제가 적응을 못했죠. 송도고가 자율적인 농구를 했던 것과 달리 대학은 선후배 기강이 셌어요. 패턴 숙지를 비롯해 해야 할 일도 많다 보니 스스로 무너졌죠. 대학시절에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정신 차리고 열심히 했으면 좋았을 텐데…. 농구 인생을 돌아봤을 때 아쉬운 순간 가운데 하나죠. (학창 시절에 어떤 스타일의 가드였나요?)헐랭이 스타일이었습니다(웃음).”
방황했던 탓일까. 당시 KBL 가이드북 집계에 따르면 김완수 감독은 건국대 4학년 시절 공식대회 출전 기록이 없다. “운동을 안 했어요. 솔직히 말해 농구가 싫었고, 프로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죠. ‘농구가 내 인생을 좌우할 수 있을까?’, ‘농구는 내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김승환(현 가스공사 코치) 건국대 코치님께 ‘미련이 없어요’라는 말씀도 드렸어요. 부모님, 코치님이 ‘그래도 졸업은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셔서 농구부 생활을 유지했던 거죠.”
김완수 감독은 한때 농구와의 인연을 정리하려 했음에도 2000 신인 드래프트 전체 15순위로 인천 신세기(현 한국가스공사)에 지명됐다. 당시 신세기 사령탑은 현재 KBL 최고의 명장으로 불리고 있는 유재학 현대모비스 감독이었다. 김완수 감독이 지닌 잠재력만큼은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다. “지원서도 안 낼 생각이었는데 김승환 코치님이 나중에 후회 남기지 말라고 하셔서 별다른 의미 없이 참가한 드래프트였어요. 당시에는 트라이아웃을 이틀 동안 했는데, 첫날에 대충했다가 김승환 코치님께 ‘할 거면 제대로 하고 마무리해!’라면서 혼났어요. 그래서 둘째 날에 열심히 했는데 그걸 좋게 봐주셨던 것 같아요.” 학창 시절에 끊어질 뻔했던 김완수 감독과 농구의 인연은 그렇게 이어질 수 있었다.
조기 은퇴와 사무국, 그리고 예고 없이 찾아온 전환점
의미 없이 참가한 드래프트였지만, 프로팀 입단은 김완수 감독에게 새로운 동기부여가 됐다. 스스로도 “솔직히 말씀드려 별다른 감정 없이 대학 시절을 보냈는데 프로까지 갔어요. 그런데 프로팀에 입단하니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라며 신인 시절을 돌아봤다. 하지만 김완수 감독이 뛸 자리는 없었다. 1999 드래프트에서 신기성이라는 복을 걷어찬 신세기는 이후 오랫동안 포인트가드 부재로 골머리를 앓았다. 결국 신세기는 김완수 감독이 입단할 즈음 최명도, 홍사붕 등을 영입하며 가드 전력을 보강했다. 김완수 감독의 입지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1군 데뷔경기조차 치르지 못한 김완수 감독은 결국 프로 입단 1년 만에 군입대를 결정했다.
“실력이 부족한 것도 있겠지만 허리도 안 좋았어요. 빨리 군대 다녀오는 게 나을 것 같았죠. 상무는 (현)주엽이 형, (신)기성이 형 등 멤버가 쟁쟁해 떨어졌어요. IMF 때라 일반병 입대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서 의경으로 갔죠. 농구선수 중 의경 출신은 저밖에 없지 않나요?(웃음).”
이른 나이에 군 복무를 마쳤지만 제대 후에도 김완수 감독을 위한 자리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간판이 전자랜드로 바뀐 팀에서 건넨 제안은 사무국에서 지원업무를 담당하는 사원이었다. “1군에서 1경기도 못 뛴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돌아보면 제가 기회를 못 잡았던 것 같아요. 유재학 감독님이 오프시즌부터 신경을 많이 써주셨는데 제가 피드백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죠. 허리 아파서 쉰 기간도 있어서 정규리그 투입은 부담스러우셨을 수도 있고요. 제대 후 사무국 제안을 받았는데 몸은 준비됐던 터라 고민을 많이 했죠. 부모님뿐만 아니라 지인들과 상담을 많이 해봤는데 선수생활을 오래 못할 거라면 빨리 사회생활 경험을 해보는 게 나을 것 같더라고요.”
김완수 감독은 전자랜드에서 선수단 지원, 매니저 업무를 두루 맡으며 값진 경험을 했다. 문서 작성이란 걸 처음 해보는 등 사회생활의 A to Z를 배웠다. “김성헌 사무국장님, 최정용 과장님이 은인이세요. 사무국 업무를 맡지 않았다면 이후 사회생활도 못했을 것 같아요. 3년 동안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전자랜드 사무국을 거친 김완수 감독은 부모님의 고향인 홍성에서 지인과 동업을 한 것도 잠시, 다시 농구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이번에는 사무국이 아닌 정식 지도자였다. 그의 나이 29세에 찾아온 전환점이었다. “선배에게 ‘온양여중 코치 자리가 비었는데 한 번 해볼래?’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고민 많았지만 몸이 근질근질하더라고요(웃음).”
약 1년간 온양여중을 이끈 김완수 감독은 대진고를 잠시 거쳐 2008년에 온양여고 코치를 맡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상대적으로 지원이 열악한 데다 선수 수급도 원활하지 않은 지방 학교였던 만큼 시행착오도 많았다. 때론 선수가 적어 대회 출전조차 못할 정도였다.
“답답했죠. ‘내가 지도자들에게 배운 것을 다 전수하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왔는데 막상 보니 선수가 없더라고요. 정원 채우기 위해 다른 학교에서 그만둔 선수들을 찾아가고, 체육시간에 괜찮아 보이는 학생이 보이면 농구를 권유했죠. 기초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김완수 감독의 지도력은 빛을 발했다. 김완수 감독은 온양여고를 꾸준히 전국대회 4강권으로 이끌었고, 종종 준우승도 안기며 농구계에 이름을 알렸다. “서울이나 수도권 학교처럼 지원이 빵빵한 학교가 아니어서 선수들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저도 선수로는 빛을 못 봤잖아요. 제자들이 힘들더라도 훈련을 강하게 해서 능력치가 떨어지는 부분을 메우려 했어요. 그땐 선수들이 저를 욕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사회생활을 이겨내는 데에 큰 힘이 될 거라 생각해요. 실제로 제자들에게서 ‘밥 사주세요’, ‘술 사주세요’라며 연락이 와요.”
지도력을 인정받은 김완수 감독은 남자학교에서도 제의를 받았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선수들과의 의리 때문이었죠”라는 게 김완수 감독의 설명이다. “월급, 환경을 따져서 옮기는 건 선수들을 배신하는 일 같았어요. 돈을 벌 목적으로 고교 코치를 맡은 게 아니었거든요. 잘 지도해 성장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희열을 느꼈고, 뭐라도 이뤄놓은 채 나가고 싶었어요. 열악한 학교라 무시해도 ‘그런 게 어딨어’라며 스카우트 없이 우승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끝내 그건 못 이룬 게 아쉽네요.”

햇수로 9년 동안 아마농구에서 입지를 다진 김완수 감독은 2016년 부천 하나원큐(당시 KEB하나은행)의 코치로 임명되며 프로무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열심히 하긴 했구나’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름대로 고생했는데 누군가는 그걸 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저도 깜짝 놀랐죠.”
전자랜드 사무국 시절 홈구장이었던 부천체육관을 하나원큐 코치가 돼 다시 홈구장으로 두게 된 김완수 감독은 프로팀 코치 경험을 통해 의미 있는 이정표를 남겼다. 하나원큐를 2018년부터 3년 연속 박신자컵 우승으로 이끈 것. 1군은 아니지만, 성장이 필요한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수 차례 증명한 셈이다. “주위에서 멤버가 좋다는 말씀도 해주셨지만 멤버 좋다고 우승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규리그를 뛰는 선수들도 절실하겠지만, 박신자컵에 임하는 선수들은 그 마음이 더 클 거예요. 그걸 끌어내려고 했어요. 여기서 이겨내야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다는 말도 많이 했죠. 팀을 이끄는 감독님이 있었기 때문에 코치 입장에서는 그 틀에 맞춰 선수들을 끌고 가야 했어요. 이환우, 이훈재 감독님이 추구하는 틀을 유지하되 경기에 더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어떻게 갖게 하느냐를 두고 많이 고민했는데 좋은 결과가 따라왔죠.”
하나원큐는 1군에서 번번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지만, 시련만 겪었던 건 아니다. 김완수 감독으로선 자신을 더 채찍질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됐다. “프로가 훨씬 힘들더라고요. 학생선수들이 기초적인 부분을 반복 훈련하는 것이라면, 프로는 디테일을 더해 하나부터 열까지 제가 다 전달해야 하죠. ‘많이 부족하구나’라는 생각에 프로에 온 후 더 많이 공부했던 것 같아요.”
코치로 꾸준히 경험치를 쌓던 김완수 감독에게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 들어온 건 2020~2021시즌 종료 직후였다. 플레이오프에 탈락한 하나원큐 선수들이 휴가를 마친 후 숙소로 복귀할 즈음, 챔피언결정전 준우승에 그친 안덕수 감독이 사령탑에서 물러난 KB는 김완수 감독에게 감독 면접을 제의했다. “이훈재 감독님께 말씀드리는 게 순서였고, ‘당연히 (면접)봐야지’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이후 KB 관계자로부터 ‘후보가 여러 명이어서 감독직을 보장할 순 없다. 2차, 3차 면접을 거쳐 감독이 확정된다’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준비했어요. 한 번에 붙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죠.”
생애 처음으로 임한 면접. 여러 면접관 앞이라 긴장될 법도 했지만 김완수 감독은 자신이 느낀 KB의 전력과 비전 등에 대해 솔직하게, 소신 있게 전달했다. 그리고 돌아온 최종 결과. 합격이었다.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KB의 감독을 맡게 돼 기대감이 들더라고요. 기뻤지만 소식을 듣자마자 팀의 단점을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선수단 관리와 스태프 구성은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 고민하게 되더라고요”라고 합격 당시를 회상한 김완수 감독은 아내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잊지 않았다. “저보다 아내가 고생을 더 많이 했거든요. 처갓집이 서울인데 저 때문에 온양까지 내려가서 고생만 했어요. 친구들도 없는 곳에서 아이 낳고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우울증 걸려도 제가 할 말이 없을 정도였죠. 합격했다고 하니 아내가 울더라고요.”

2016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박지수를 지명한 후. KB에겐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꼬리표가 붙었다. ‘박지수 있으면 무조건 우승해야 하는 거 아냐?’라는 평가가 매 시즌마다 나왔던 것. 하지만 KB가 박지수 입단 후 5시즌 동안 우승을 차지한 건 2018~2019시즌이 유일하다. 2019~2020시즌이 코로나19 여파로 조기종료됐다는 점을 감안해도 기대치를 밑돈 행보임은 분명하다. 이에 대한 부담감도 따르지 않을까. 김완수 감독은 “부담은 많죠. 솔직히 많습니다”라고 운을 뗐지만, 이내 확고한 농구 철학을 전했다.
“하지만 그런 평가는 농구를 모르는 분들이 하는 얘기라고 생각해서 한편으로 흘려버리려고 해요. 물론 (박)지수는 팀에 큰 보탬이 되는 선수죠. WNBA에서도 뛴 선수인데요. 하지만 ‘누가 있으면 우승해야 한다’라는 말은 이해가 안 됩니다. 농구는 1명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지수는 골밑에서 위력적인 선수지만 50점을 넣는 선수는 아니에요. 야투율 좋고 리바운드 많이 하지만 더블더블하는 선수는 다른 팀에도 있어요. 주득점원이 2명인 팀도, 3명인 팀도, 5명인 팀도 있는 거죠. 예를 들어 우리은행은 5명이 다 함께 농구를 하고, 신한은행은 5명 모두 농구를 알고 있는 베테랑들입니다. ‘박지수의 팀’이 아닌 ‘박지수는 훌륭한 선수’라고 얘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김완수 감독이 오프시즌 내내 선수들에게 강조한 부분이기도 했다. “지수 없으면 농구 못해?”는 김완수 감독이 선수들에게 전한 단골 코멘트였다. “지수가 있다고 다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선수들과의 호흡이 맞아야 하고, 각자 역할을 다하며 팀워크가 발휘되어야 승리하고 우승까지 할 수 있는 거죠. 선수들에게 ‘우리 팀은 에이스가 없다’라고 얘기했어요. 지수, (강)이슬이만 바라보면 안 되거든요. 두 선수 외에도 주축이 될 수 있는 선수들이기 때문에 지수가 알아서 할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많은 기대 속에 새 시즌을 맞은 KB는 정규리그가 반환점을 도는 시점까지 순항을 이어가고 있다. 구단 역대 최다인 개막 9연승을 질주하는 등 시즌 초반부터 꾸준히 독주 체제를 유지 , 일찌감치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라운드당 3승’이라는 김완수 감독의 시즌 초반 목표를 훌쩍 뛰어넘는 페이스다. “시즌 초반은 어려울 거라 생각했어요. 선수들이 안덕수 감독님 체제에서 5년을 보냈잖아요. 그 틀을 크게 바꾼 건 아니지만 저만의 틀도 만들어야 해서 시행착오를 겪는 시기가 있을 거라 예상했죠. 지수, 이슬이가 함께 호흡을 맞춰본 기간도 많지 않아 선수들이 이렇게 잘해줄 줄 몰랐어요. 우리은행에게 당한 시즌 첫 패도 선수들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최)희진이가 부상을 당해 어려운 경기가 될 거라 예상했는데 이길 수 있는 찬스까진 만든 경기였잖아요. 이슬이도 ‘우리은행 해볼 만하다’라고 생각했다더라고요. 물론 배운 점도 많은 경기였고, 시행착오도 계속 겪게 될 거예요. 분명한 건 우리가 준비한 농구가 맞아들어가면 더 무서운 팀이 될 것이란 점이죠.”
어느 팀이든 보다 멀리 바라보며 내걸고 있는 목표는 똑같다. 장기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강팀이 되는 것이다. 한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났지만 위성우 감독 부임 후 명가재건에 성공한 우리은행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김완수 감독 역시 올 시즌 우승을 목표로 내걸었지만, 그의 시선은 보다 먼 미래까지 향해있었다. “올 시즌 목표는 당연히 우승인데 일단 건강하게 시즌을 마쳐야 해요. 만약 우승한다 해도 몸이나 정신적인 면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라면 다음 시즌에 바로 위기가 올 거예요. 약점도 보완해야겠죠. 우리 팀은 속공, 스틸이 안 좋은 편인데 ‘이 부분이 약해’에서 끝날 게 아니라 놓친 부분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보완해나가는 시즌이 됐으면 해요. 장기적인 목표는 내부 육성이죠. FA, 트레이드를 통한 전력 보강이 아닌 잠재력 있는 선수들을 좋은 선수로 만들어서 ‘박지수의 팀’이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어요. 지수가 쉬고 (김)소담이를 비롯해 누가 나오더라도 이길 수 있는 팀이라는 소리를 듣는 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감독 선임 보도자료 배포 직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김완수 감독과 KB, 그리고 강이슬에게 뒤따르는 소문이 있다. KB는 오프시즌 FA 협상을 통해 ‘최대어’ 강이슬과 계약한 바 있는데, 일각에선 이를 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김완수 감독과 강이슬이 하나원큐 시절 한솥밥을 먹은 사이였기에 무성한 소문, 오해가 뒤따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김완수 감독 역시 소문에 대해 모를 리 없었지만, 굳이 나서서 해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김완수 감독은 거리낌 없이 속내를 전했다.
“면접을 보는 동안 사무국으로부터 이슬이에 대한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어요. 하나원큐에 있을 때 ‘KB가 이슬이를 필요로 하는 팀’이라는 걸 알고 있는 정도였죠. 오프시즌 때 이슬이를 잡기 위해 이훈재 감독님과 함께 삼천포까지 내려가서 계약하자는 얘기를 했어요. 아버님도 만나 뵙고요. ‘뒤에서 작전 짠 거 아니냐’고 하는데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이슬이도 제가 KB 감독으로 오게 돼 더 고민했다고 들었어요. 자신까지 뒤따라 KB로 가게 되면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다는 걸 예상했겠죠. 그뿐만 아니라 제가 훈련에 있어선 타협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아서 고민한 부분도 있었더라고요. 그래도 이슬이는 우승할 수 있는 전력을 선택한 거죠. 지수와 통화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저도 뒤에서 그런 얘기가 나와서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정말 아닌데 누굴 붙잡고 얘기해야 하나 싶었죠. (조)동현(현대모비스 코치)이 형이 ‘네가 아니면 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야’라고 말씀해주셔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죠. 동현이 형은 전자랜드 시절에 함께 했던 사이라 제가 은사처럼 모시는 분입니다(웃음).”
아픈 손가락 윤예빈
김정은(우리은행) 이후 이렇다 할 스타를 배출하지 못했던 온양여고는 2010년대 중반에 마침내 바통을 이어받을 유망주를 발굴했다. 온양여중 재학 시절부터 다재다능한 면모를 발휘, 일찌감치 차세대 국가대표로 주목받은 윤예빈(삼성생명)이었다. 윤예빈은 드래프트 전 십자인대파열이라는 시련을 맞았지만,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삼성생명은 그를 전체 1순위로 선발했다. 데뷔시즌 1경기 출전에 그치는 등 데뷔 초기 재활에 많은 시간을 쏟았던 윤예빈은 부상을 털어낸 후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그렸고, 2020 도쿄올림픽 국가대표까지 선발됐다. 시련을 딛고 국가대표로 성장했지만, 김완수 감독에게 온양여고 제자 윤예빈은 대견함보다 미안함이 앞서는 제자인 듯한 눈치였다. “(윤)예빈이는 중학교 시절부터 눈에 띄는 재목이었어요. 키우고 싶었는데 고등학교 때 부상을 당해 가장 미안한 제자예요. 제가 훈련량을 조절해줬어야 하는데 많이 하는 게 좋은 건 줄 알고…. 예빈이는 부상 없이 더 잘됐으면 좋겠어요. 적이지만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경기에서는 우리가 이겨야겠지만, 삼성생명의 MVP는 예빈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죠. 중학교 때는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였고, 고등학교 입학한 후부터 가드를 맡겼어요. 그때 다른 선수 부모님들 사이에서 말이 많이 나왔어요. ‘센터 봐야 할 애한테 가드 맡기면 우리 애는 뭐가 되냐’고 얘기한 부모도, 저를 자르려고 하는 부모도 있었어요. 제가 팀을 잘 꾸리고 있다는 걸 보여준 이후에는 다들 인정하고 이해해주셨죠.”
못다 한 이야기
Q.프로선수 시절 프로필을 보니 고 전규삼 선생을 기억에 남는 지도자로 꼽았던데?
A.기억에 많이 남죠. 눈 가리고 하는 드리블을 시키셨고, 한 손을 묶어놓고 하는 드리블을 주문하기도 하셨죠. NBA를 거의 접하지 못하던 시기였는데 찾아보고 인상적인 부분을 알려주시기도 했어요. 선수 개개인의 장점을 끌어내고, 창의적인 농구를 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셨죠. 부상 방지를 위해 유도선수들이 하는 낙법도 가르쳐주셨고요. 할아버지와 장기, 고스톱도 많이 뒀어요. 상대의 수를 읽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장기, 고스톱도 일종의 수싸움이잖아요. 고스톱은 종종 이겼는데 장기는 한 판도 못 이겼죠.
Q.선수 시절 유일하게 모신 감독이 유재학 감독입니다. 당시 유재학 감독은 30대 후반의 젊은 감독이었는데 어떤 지도자로 기억에 남아있나요?
A.그때도 무서우셨어요. 저는 신인이다 보니 대화할 시간이 많진 않았지만 말 한마디에서 포스가 느껴졌죠. 운동을 힘들 게 시키지 않고 말 한마디로 눈치껏 알아듣게 하셨어요. 그만큼 선수들과 신뢰하는 사이였던 것 같아요. 훈련이나 경기할 때 ‘이런 부분까지도 열정적으로 준비하시는구나’라고 느꼈던 적도 있었죠.
Q.인터뷰 감사드립니다.
A.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제가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에요. 예빈이, (정)유림이 등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저와 함께한 모든 선수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지도자는 자신이 잘나서 하는 게 아니라 선수가 있어서 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팀 선수들에게도, 하나원큐 선수들에게도 고마워요. 상대팀이지만 잘됐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하나원큐 선수들을 적으로 만나고 있지만 마음이 아파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픈 게 아니라 슬픈 거죠. (신)지현이, (양)인영이를 비롯해 선수들 모두 고생하고 있는데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하나원큐도 부상 없이 빨리 반등해서 시즌을 잘 치렀으면 해요.
#사진_유용우 기자, W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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