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인터뷰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7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평범한 선수에서 파란만장한 감독으로
KBL 최초 프랜차이즈 출신 지도자
이상범 감독은 현역 시절 스타플레이어가 아니었다. 연세대에 진학하기 전까지는 대전에서만 농구를 했고, 실업과 프로를 거치면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떨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니폼을 내려놓고 양복을 입는 순간 KBL 코트에서 그를 모르는 이는 없게 됐다. 파란만장했다고 형용될 정도로 열혈남아로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호민_ 고등학교 시절까지 대전에서 꾸준히 농구를 하다 연세대에 진학했다. 학생선수 이상범은 어떤 선수였나.
얼떨결에 농구를 시작해서 운 좋게 잘 풀린 케이스다. 운동하는 집안도 아니었고, 초등학교 때는 팀이 막 창단돼서 동아리 개념으로 했던 농구였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정식으로 배운 셈인데, 연세대에 진학했던 것도 행운이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학생 선수들이 운동을 해서 좋은 대학을 가고 싶다는 공통적인 목표가 있었다. 나 역시 그 부분만 보고 열심히 했던 것 같다. 특출난 선수는 아니었다.
민준구_ 실업 시절을 지나 SBS 선수로서 KBL의 출범도 함께했다. 특히, KBL의 첫 득점이자 첫 3점슛 성공 기록자로 남아있는데,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운이 참 좋았다고 생각한다. 프로가 출범하고 첫 경기를 직접 뛰면서 첫 득점까지 했다는 게 나에게는 굉장히 뜻깊다.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웃음). 하나의 추억인데, 감독을 하면서 바쁘게 살다 보니 뒤돌아볼 시간도 없더라. 지금같이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서 곱씹어 볼 수 있는 좋은 추억으로 만족하고 있다.
김용호_ KBL에서 선수 생활은 길지 않았다. 은퇴 이후에는 1년 만에 다시 SBS 코치로 합류했는데, 본래 지도자의 길을 생각했었나.
일단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리고 때마침 당시 이충기 단장님과 김인건 감독님이 프로 최초로 해외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유학을 다녀와서 코치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다. UCLA로 향할 길을 알아봐주셨고, 다녀오면 코치로 합류한다는 계약을 하고 비행기에 올랐던 거다. 이충기 단장님이 SBS 장학재단을 통해 마련해주신 자리였는데, 지금도 은인으로 모실 정도로 굉장히 감사한 일이었다.
김용호_ 코치 생활을 하면서 꽤 많은 감독들을 보좌했다. 지금의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누구였나.
안양에서 코치를 하는 동안 김인건, 정덕화, 김동광, 유도훈, 그리고 대표팀에서 유재학 감독까지 총 다섯 분과 함께했다. 대부분의 감독님들은 코치들에게 장점만 뽑아가라고 하신다. 그중에서 영향이 제일 컸던 건 내가 코치로 입문했을 때 모셨던 김인건 감독님이었다. 사실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는데, DB에 오고 나서 내 모습을 스스로 돌아보니 누군가와 많이 닮아있더라. 그게 김인건 감독님의 스타일이었다. 감독이 된 이후에는 매 시즌을 싸워나가느라 잊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분의 스타일이 몸에 배어있었다.
민준구_ 앞서 말했던 해외 연수를 다녀온 뒤에는 그 연수보다 한국에서 직접 경기를 치르며 배우는 게 더 많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말은 아직도 유효한가.
유효하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뛰던 선수가 미국에 가서 지도법을 배우니 그곳의 시스템은 그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느낌을 가장 크게 줬다. 감독을 하면서도 느낀 건데 한국 감독들이 한국농구 특유의 문화를 이해하며 연구하는 게 정말 많다. 한국농구가 주어진 인프라에서 아시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게 그 증거라 생각한다. 해외연수를 반대하는 건 아니다. 농구가 매번 똑같지 않기 때문에 다른 농구를 보고 견문을 넓히는 것도 좋지만, 한국만의 농구를 빨리 알아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느꼈던 시간이었다.
김용호_ SBS에서의 코치 생활은 파란만장했다. 2003년에는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 몰수패를 당한 적도 있다. 지도자 생활에서 큰 위기가 아니었나 싶은데.
젊은 혈기가 넘쳤던 것 같다. 어떤 면에선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냉정하지 못했던 거다. 지도자 생활에 오점을 남긴 행동이었다. 실수라기 보단 오점이었다. 코치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욕이 앞섰던 때라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서호민_ 그럼에도 결국 사령탑의 자리에 올랐다. SBS에서 실업, 프로 선수로, 그리고 코치를 거쳐 감독까지. KBL 최초의 프랜차이즈 출신 감독이 된 것이다.
정말 오래 있었던 팀이다. 선수부터 코치와 감독까지 하면서 애정이 많이 생긴 팀이다. 지금은 DB의 감독이지만, 애정이 있는 걸 거짓말할 순 없다(웃음). 쉽게 말해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월급을 받았던 회사가 SBS인 거다. 안양에서 젊은 청춘을 다 보냈기 때문에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했고, 늘 애정을 갖고 있는 곳이다.
KBL에 몰고 온 질풍노도
감독대행 시절을 거쳐 이상범 감독이 정식으로 사령탑이 된 건 2009년이다. 앞서 수석코치 시절에 팀명은 KT&G로 변경됐고, 그가 지휘봉을 잡으면서 KBL에는 새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뒤를 돌아볼 새도 없었던 폭풍 질주는 결국 리그 정상에 도달하는 거룩한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상범 ‘감독’은 어떤 그림을 그렸던 걸까.
민준구_ 감독대행 당시 KT&G는 주희정을 중심으로 엄청난 속도전을 펼치는 팀이었다. 그런 팀 컬러를 만들게 된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나.
10년 정도 코치 생활을 하다 감독대행을 맡게 됐는데, 내 나이가 마흔쯤 됐을 때였다. 감독들 중에서는 젊은 편이다 보니 뭔가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농구를 해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도 압박을 통해 상대를 밀어붙이는 걸 좋아했다. 선수 때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하하. 그래서 감독대행 때는 주희정을 내세워 런앤건을 추구했던 거다. 사실 KGC인삼공사에서는 그런 농구를 하고도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생동감이 있다고 재밌어하는 팬들도 있었지만, 체력을 과하게 소모시킨다는 평가도 있었다.
서호민_ 그렇게 MVP까지 받은 주희정을 감독 정식 부임 6일 만에 트레이드시켰다. 언제부터 리빌딩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건가.
MVP를 떠나보내는 과감한 결단을 하지 않으면, 선수를 끌어올 힘이 없었다. 당시 SK는 당장 우승이 필요했고, 우리는 향후 2~3년을 내다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주희정이 MVP를 받던 시즌에 27승을 하고도 플레이오프에 탈락하지 않았나. 감독대행하면서 그 한 시즌을 경험해보니 대권 도전을 하려면 선수단 구성을 확실히 뒤엎는 시간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어찌 보면 모험이었다.
김용호_ 리빌딩 과정에서 신인드래프트의 행운이 따르기도 했다.
처음에 박찬희와 이정현을 동시에 데려왔다. 솔직히 1순위에서 박찬희를 뽑고, 2순위로 이정현을 데려왔을 땐 욕도 많이 먹었다. 당시 팀에 빅맨이 부족했기 때문에 하재필을 뽑았어야 한다는 말들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이정현이 그 당시 A급 선수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정현을 신인 때부터 풀타임에 가깝게 뛰게 한 거다. 평가를 뒤집어야 했다. 솔직히 그 다음에 오세근까지 뽑게 될 줄은 몰랐다. 운 좋게 오세근까지 데려오게 되면서 퍼즐이 다 맞춰졌던 거다. 만약에 그때 2순위에 걸려 세근이를 데려오지 못했다면 김선형을 뽑았을 거고, 아마 빅맨 수급을 위해 가드진의 트레이드가 있지 않았을까 한다.
민준구_ 선수 구성을 마치고 2011-2012시즌에 파이널 우승까지 거머쥐는 농구 역시 인상적이었다.
그 선수단을 꾸리기 위해 두 시즌 동안 암울한 시간을 보냈다. 선수들이 군 복무까지 마치고 돌아왔을 땐 팀이 정말 젊어졌다. 앞서 말했듯 40분을 풀로 뛰어도 된다는 젊음이 있었기 때문에 압박수비와 런앤건이 가능했다. 농구 센스들도 충분한 선수들이지 않았나. 그럼에도 우린 챔피언결정전에서 동부에게 질 거란 평가를 받았다. 솔직히 기술에 대한 레벨은 우리가 따라잡을 수 없는 팀이었다. 정규리그에서도 1승 5패 열세여서 0-4로 끝난다는 말도 있지 않았나. 그랬기 때문에 프레스를 멈추지 않는 농구를 했던 거다.

다시 한 번 그 길을 가라고 하면 절대 안 갈 거다(웃음). 리빌딩을 진행하는 시간 동안엔 늘 사직서를 품고 다녔다. 정식으로 감독이 되면서 3년 계약을 맺었는데, 선수들을 모은다고 이미 2년을 날리지 않았나. 세근이를 뽑았던 마지막 해에는 솔직히 못 하겠다는 생각이 컸다. 대인기피증까지 생기고, 주변의 위로조차 듣기 싫었다. 집에 가도 가족들이 내 눈치를 보니까 공황장애 같은 게 오더라. 경기에 나가기 위해 양복 입는 것도 싫었다. 특히, 안양 홈구장은 숙소에서 경기장에 나가려면 사람들을 마주쳐야 하는데 그게 두렵더라. 벤치를 보면 조바심이 생기는데, 또 감독이 선수들에게 티를 낼 순 없지 않나. 예전에 김인건 선생님이 감독은 탤런트가 되라고 하셨다. 속이 쓰려도 선수들에겐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이다. 그만큼 리빌딩은 정말 쉽지 않았다.
민준구_ 창단 첫 우승을 이끌고, 그 다음 시즌에는 다시 4강까지 올랐다. 하지만 2013-2014시즌 한 번의 부진으로 결국 경질됐다. 표면적으로는 국가대표 코치직에 전념하느라 팀이 부진했다는 말도 있었다. 구단에 섭섭함은 없었나.
섭섭함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감독으로서 나름 어린 나이에 우승을 했다. 2년 동안 어려운 시간을 보내 그 한을 푸는 우승을 하지 않았나. 그리고 그 다음 시즌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세근이는 부상을 당했고, 태술이는 아버님이 편찮으실 때라 마음고생에 죽만 먹으며 경기를 뛸 때다. 그럼에도 4강을 갔고, 주변에서 감동이었다는 칭찬도 들었다. 그러다보니 2013-2014시즌에는 한 타임 쉬어가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어려서 융통성 있게 대처하지 못했던 것 같다. 회사와 더 유연하게 상황을 풀어갔어야 했는데, 내 성격대로 팀을 운영했던 거다. 처음엔 섭섭했는데, 팀을 떠나고 보니 내가 먼저 잘못한 거였다.
서호민_ 그럼에도 국가대표 코치로서 활동했던 시절은 큰 자산이 되지 않았나.
내가 국가대표팀에서 코치보다 감독을 먼저 하지 않았나. 감독을 먼저 하는 바람에 스스로 부족함을 더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배워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친분이 있는 (유)재학이 형에게 찾아갔던 거다. 만약에 형이 대표팀 감독이 되면 나를 코치로 써주면 안 되겠냐고 말이다. 그때는 형이 대표팀 감독 출신을 어떻게 코치로 쓰냐고 하더라. 나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두 번의 실수는 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향후에 재학이 형이 대표팀 감독이 되면서 여전히 코치를 할 생각이 유효하냐고 연락이 왔던 거다. 그러면서 지도자로서 임기응변 능력도 배우고, 농구 자체에 대한 교류도 많이 했다.
김용호_ 말씀하신 대로 젊은 나이에 프로 우승에 곧장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된 건 정말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프로에서는 코치를 해보고 감독이 되지 않았나. 그래서 어느 정도 리그의 생리와 룰을 아는 상태였는데, 대표팀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당시 3개월 정도의 준비 기간을 갖고 올림픽 예선에 나가야 했다. 부족하다는 걸 정말 많이 느낀 시간이었다. 첫 경기가 러시아 전이었는데, NBA 선수들이 워낙 많으니 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이 도미니카공화국이었는데, 여기도 NBA 출신이 두 명 있었다. 그래도 승부를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대표팀에서도 프레스를 내세웠는데, 경기 막판에 리바운드에서 승부가 뒤집어졌다. 당시 대표팀에 (김)주성이를 부상으로 못 데려갔고, (양)동근이도 손목을 다쳐 뛰지 못했다. 또 태술이가 경기 막판에 교체 사인을 줘서 벤치로 불러들였는데 그 교체에도 비판을 많이 받았다. 뭔가 세계의 벽에 부딪혔던 기억이 난다.

DB와 함께 마법을 부린 시간
프로 우승과 대표팀에서의 경험. 실패도 섞여 있었지만, 감독으로서 커리어는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다. 하나,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쾌거 이후 그의 자리는 없었다. 돌연 야인 생활을 해야 했던 이상범 감독. 힘겨웠던 시간이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그는 지도자로서 두터운 배움을 이어갔고, 운명의 장난과도 같이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 상대였던 DB의 사령탑으로 KBL 컴백을 알렸다. 그리고 ‘상범 매직’이라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팀을 탈바꿈했다. 그럼에도 아직 나아갈 길은 많고, 이상범 감독이 추구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김용호_ 안양을 떠난 이후 야인 시절을 보내야 했다. 당시 한국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으로 향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내가 일본 음식을 좋아한다(웃음). 또, 예전부터 재일교포로 농구계에서 활동하는 정용기 WILL 대표를 알고 있었고,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일본 대표팀의 하세가와 감독과 친분을 쌓았다. 아오야마 대학에서 25년 동안 감독을 하다 지금은 고문으로 있는데, 그 인연으로 인해 일본으로 가게 됐던 거다. 그분은 한국을 좋아해서 서로 꾸준히 교류를 이어왔다. 농구 이야기를 워낙 많이 나누던 분이었다.
민준구_ 일본으로 향해 감독이나 코치가 아닌 인스트럭터로 활동했다. 프로 우승팀, 대표팀 감독을 지냈기에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자존심이 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감독 생활을 쉬게 되면서 가와사키의 기타 다쿠야 감독이 두 달 정도 팀을 봐줄 수 없겠냐는 연락을 했다. KGC인삼공사 시절부터 일본 전지훈련에도 도움을 줬던 분이라 그 팀에 합류하면서 인스트럭터 생활이 시작됐다. 또 내가 일본에서는 후쿠오카에 자주 갔는데, 마침 정용기 대표의 한 선배가 오호리 고등학교를 도와달라고 했다. 사실 고등학생은 지도해본 적이 없어서 걱정했었는데, 일주일 만에 아이들과 정이 들더라. 그러면서 조금씩 인스트럭터로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지도자의 눈높이를 낮추고 식스맨을 키우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때 (나카무라) 타이치도 처음 만났던 거다. 오호리 고등학교가 후쿠오카 대학의 부속고등학교여서 나는 외국인 교수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마침 바로 옆 건물이 농구부 기숙사라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자식 같은 느낌의 학생 선수들을 찾아가게 되더라.
서호민_ 그렇게 돌고 돌아 2017년 DB에 부임했다. 다른 팀의 러브콜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DB에 오게 됐나.
일단 일본까지 직접 찾아온 DB가 가장 적극적으로 나를 원했다. 당시 DB의 멤버 구성이 좋지 못했는데, 내가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가르쳐본 경험이 쌓였다 보니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그런 생각을 못 했겠지만, 감독으로서 눈높이만 낮추면 될 문제였다. 또한 지방 팀의 재미없는 농구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얼마든지 기회를 주기로 결심했던 거다. 지금도 선수들에게 얘기하지만, 선수는 코트 안에 있어야 선수라고 한다.
민준구_ 부임 당시 DB의 개인 훈련 열풍은 분명 눈에 띄었다.
선수들에게 얼마든지 기회를 줄 테니 운동을 하라고 했다. 다만 남들과 똑같이 해서는 기회를 줄 수 없으니 확실히 준비하라고 말이다. 선수들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는데, 연습경기가 아닌 정규리그에서 정말 기회를 주니까 믿기 시작하더라.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 밤에 연습체육관 불이 꺼지질 않았다. 원정 경기를 떠날 때도 숙소에 남는 선수들에게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있으라 하면 항상 늦게까지 개인 훈련을 했다. 사실 실전에서 10분을 버티려면 30분을 뛸 체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걸 알고 선수들이 개인 훈련을 통해 스스로 기회를 잡아나갔고, 결국 오고 싶어 하는 팀이 되지 않았나 한다.
김용호_ DB의 감독으로 지내는 동안 구단에 대한 감사함을 꾸준히 표하는 게 인상 깊었다. 특히 고려대 출신인 신해용 전 단장이 라이벌 연세대 출신의 이상범 감독을 스카우트하는 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고 들었는데.
맞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신해용 단장님은 정년퇴직하셨지만, 지금도 정말 고마운 분이다. 나를 온전히 믿어주고 전권을 주셨다. 또 김정남 구단주님이 정말 끝내주시는 분이다. 농구는 감독이 알아서 하는 거라며 모든 전권을 쥐고, 책임감만 똑바로 가지라고 하신다. 회사 오너가 감독에게 힘을 주니 그보다 더 든든할 순 없었다. 가뜩이나 내가 KGC인삼공사 시절 우승을 이 팀 상대로 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구단주님이 “확실하면 데려와라”라고 하셨다더라. 꼭 한 번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해서 헹가래를 해드리고 싶은 게 내 소망이다.
2019-2020시즌이 확실히 아쉽다. 요즘 말로 우승각이었다. 구단주님께도 헹가래를 올려드릴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던 기억이 난다. 원래 우승에 도전하는 시즌에는 정규리그 후반에 탄력이 붙는 게 좋다. 당시 4라운드 전승을 하면서 정말 되겠다 싶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황당하게 시즌이 끝나버렸다. 2017-2018시즌은 실패가 아닌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선수들이 열심히 따라준 덕분에 나온 결과이기 때문에 만족하고, 2019-2020시즌보다는 덜 아쉬웠다.
민준구_ DB에 부임한 이후를 모두 돌아보면 성적표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긴 하다. 어떤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나.
첫 시즌이 끝나고 나서 (두)경민이는 입대하고, (김)주성이는 은퇴를 했다. (윤)호영이가 부상까지 당하면서 그 다음 시즌에는 벤치 멤버를 키워보자는 생각이 강했다. 디온테 버튼과 재계약도 불발된 상태이지 않았나. 그러다 2019년에 (허)웅이가 제대를 하고, (김)종규를 데려왔다. 덕분에 반등을 했는데, 지난 시즌에는 결국 부상 앞에서 답이 없었다. 그래서 올해는 로스터를 두텁게 가져가려는 거다. 부상에 트라우마가 생겼다. 다가오는 시즌은 외국선수까지 합류하면 선수가 20명 가까이 되는데, 어떻게 운영할까 고민이다. 단순히 부상 선수의 빈 자리를 채우려는 목적이 아니라 모든 선수들을 활용할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김용호_ 성적을 떠나 DB를 이끌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감독은 선수의 단점을 보면 안 된다’라는 말이었다.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 않았나.
어려운 일이었다. 장점이 51, 단점이 49라면 장점을 택하는 거다. 감독은 선수의 단점을 보기 시작하면 절대 코트에 내보낼 수가 없다. 이건 감독의 몫이고, 인내가 필요한 부분이다. 옛날에 김인건 선생님은 감독이 선수의 단점을 보면 당장 눈앞의 나무 하나밖에 보이질 않는다고, 뒤에 있는 숲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감독이 선수의 단점을 몰아가면, 선수는 갈 곳이 없다. 단점이 있다면 비시즌 때 강하게 질책해서라도 고치지만, 시즌 때는 장점만 보고 선수를 믿어주는 거다. 그래서 두경민이 에이스가 될 수 있었고, 김태홍, 김현호, 김영훈, 김훈 등의 선수들이 기회를 잡아갈 수 있었던 거다.
서호민_ 지난해 DB와 4년 재계약을 맺었다. 그중 한 시즌을 보냈고, 이제 3년의 시간이 남아있다. 향후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나.
3년을 통째로 바라보지 않고 있다. 1년씩 싸워나가는 중이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남은 3년을 모두 함께하는 거고, 그렇지 못하다면 언제든 팀을 떠날 수도 있는 게 감독이다. 나에게 몇 년의 계약 기간이 남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야 목표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급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내년은 없다는 마음으로 올해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민준구_ 이제 DB는 반등해야 한다. 그 반등을 앞두고 에이스를 트레이드하는 큰 결심도 했다.
경민이를 떠나보낸 건 솔직히 아쉽다. 정말 힘들게 만들어서 키운 선수였다. 그래도 결국 선택이 필요했다. 윤호영이 점점 나이가 들면서 부상이 심해졌고, 김종규 혼자서는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 강상재는 물론 김철욱까지 영입한 거다. 항간에는 종규와 상재가 겹친다는 우려가 많던데, 나는 상재를 4번(파워포워드)으로 쓸 생각이 없다. 외곽으로 나와서 호영이처럼 3.5번으로 뛰어야 한다.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걸 이겨낼 능력이 충분히 있는 선수다. 다가오는 시즌에는 상무에서 제대하는 시즌이라 쉽지 않을 수 있지만, 분명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용호_ 마지막으로 지도자로서 궁극적인 목표가 궁금하다.
목표라기 보단 내가 있는 동안 팀을 항상 밝게 이끌고 싶다. KGC인삼공사 때부터 갖고 살아온 생각인데, 언젠가 내가 떠나더라도 밝은 팀이 유지됐으면 한다. 내가 감독이라고 권위를 내세우는 걸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팀은 명랑하고 활기차야 한다. 4년 전 DB에 와서 분명히 팀 분위기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도 활기차고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 선수들이 오고 싶어 하는 팀이 되도록 하겠다.
이상범 감독 프로필_
1969년 3월 8일생, 183cm/88kg, 서대전초-대전중-대전고-연세대
주요경력
1992~2000 SBS 농구단 선수
2001~2008 안양 KT&G 코치
2008~2009 안양 KT&G 감독대행
2009~2014 안양 KT&G/KGC 감독
2012 국가대표팀 감독
2013~2014 국가대표팀 코치
2017~현재 원주 DB 감독
2017-2018시즌 감독상
# 인터뷰_ 민준구, 김용호, 서호민 기자
# 정리_ 김용호 기자
# 사진_ 문복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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