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강병현, 잊혀지지 않는 ‘화려했던 5시즌’

김종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2-05-14 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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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미남 가드’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강병현(37‧193cm)이 올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한다. 현 소속팀 LG는 13일 "강병현이 14년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구단 전력분석원·스카우트로 새롭게 출발한다"고 발표했다.


최근 농구 팬들에게는 부상 잦고 기복 심한 경기력의 식스맨 정도로 보여질지 모르겠지만 강병현은 프로농구 역사에 자신만의 확실한 족적을 남긴 선수 중 한명이다. 전자랜드(현 한국가스공사), KCC, KGC, LG 등에서 14시즌간 519경기를 소화하며 평균 7.3점, 2.4리바운드, 1.7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플레이 스타일은 다소 투박했으나 공수에 걸친 밸런스가 좋았으며 곱상한 외모와 달리 파이팅과 허슬이 좋아 팀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돌격대장겸 살림꾼이었다.


강병현은 한창 경기력이 좋았던 시절 ‘강페니’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흔치 않은 장신가드이며 잘생긴 외모까지 더해져 붙여진 별명이다. 강페니의 페니는 1990년대 초 NBA에서 차세대 슈퍼스타로 불렸던 '페니 하더웨이'다. 1993년 신인드래프트 3순위로 골든스테이트에 입단한 후 곧바로 올랜도 매직으로 트레이드되었는데 신예 괴물센터 샤킬 오닐과 호흡을 맞추며 기존 스타들을 긴장시킨 선수다.


201cm의 장신임에도 1, 2번 모두에서 정상급 기량을 뽐냈던 당시 페니의 인기는 대단했다. 조던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재목으로까지 꼽힐 정도였다. 조던과 함께 불스 왕국의 한축을 이뤘던 스카티 피펜은 "동나이대 나보다 월등한 실력을 갖췄다. 어디까지 성장할지 예측이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늘은 페니를 버렸다. 건강만 보장된다면 무조건 NBA 역사의 한 획을 그을 것이 분명했던 페니였지만 연이은 부상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결국 그는 올랜도 프랜차이즈 스타는 커녕 피닉스 선즈, 뉴욕닉스, 마이애미 히트 등 여러 팀을 전전하다 쓸쓸히 은퇴하는 비운에 울어야 했다. 여전히 NBA팬들 사이에서는 ‘페니가 건강했다면 어떤 커리어를 남겼을까?’라는 논쟁이 나오고 있을 정도다.


페니와 닮은 듯 다른 강병현이지만 아쉽게도 가장 닮지 말아야 할 부분에서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말았다. 페니가 그랬듯 강병현 또한 자신을 지명한 팀(전자랜드)에서 얼마 있지 못하고 다른팀(KCC)으로 트레이드되면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첫 시즌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선수 생활의 전성기를 달린다.


KCC시절 강병현은 명실상부한 리그 최고의 2번중 한명이었다. KCC에서 뛰던 5시즌간 강병현은 모두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했으며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등의 세부기록 또한 이때가 가장 좋았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당시 강병현은 팀내 간판스타이기는 했지만 주포보다는 전천후 살림꾼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폭발적인 돌파에서 이어지는 드라이브인과 스탑 점프슛 그리고 과감한 클러치 성공 능력 등 을 감안했을 때 화려한 플레이에 집중할 것 같지만 실상은 달랐다. 수비나 보조리딩 등 궂은 일부터 앞장서는 마당쇠 마인드를 갖춘 젊은 리더였다. 팀플레이를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인 플레이어답게 자신의 공격이 잘 풀리지 않아도 어떤 식으로든지 팀에 도움을 줬다.

 

 


장신 2번으로서 1번을 도와 리딩을 돕는 것은 물론 3~4번 자리에 구멍이 생기면 직접 해당 포지션에 뛰어들어 빈자리를 채워주기도 했다. KCC 팬들 사이에서 ‘강병현은 늘 고맙고 미안한 선수다’는 말이 나왔던 이유다. 어찌보면 이같은 플레이는 강병현 자신에게는 상당한 과부화로 작용하기도 했다.

원체 활동량이 많았던데다 익숙치 않은 포지션까지 소화하다 보면 체력은 물론 2번 역할에 대한 감까지 떨어지질 수 있었다. 기록적인 면에서의 손해 역시 당연했으며 그로 인해 사정을 모르는 이들 사이에서 과소평가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외려 당시 강병현은 외국인코치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유럽에서 선수와 지도자로서 높은 명성을 쌓았던 스티브 영이 “대한민국 NO.1 슈팅가드는 강병현이다”고 말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강병현의 이같은 희생과 투혼 덕에 KCC는 그가 있는 동안 두차례나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 ‘KCC의 심장’이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그런 면에서 강병현의 갑작스런 트레이드는 팬들을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당시 KCC는 ‘제 2의 허재’로 불리던 김민구를 신인드래프트에서 뽑은 상태였고 차세대 간판으로 키우려 했다. 아무래도 포지션이 같은 강병현보다는 정통 포인트가드 김태술이 서로간 호흡에서 더 낫다고 판단했고 KGC와 맞트레이드를 감행했다. 결과적으로는 좋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좋은 빅딜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하필 상대가 강병현이었다는 점에서 아쉬워하는 의견 또한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KCC를 떠난 강병현은 이후 한참 좋았을 때의 기량을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마인드와 플레이 스타일로 인해 ‘가드판 양희종’으로 커리어를 이어 나갈 것으로 기대됐으나 공수에서 이도저도 아닌 모습으로 일관하며 성적도, 인기도 추락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팀과의 궁합 등 여러 가지 이유도 제기되고 있지만 무엇보다 부상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고질적으로 허리통증을 달고 살았고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발목, 무릎 등 크고 작은 부상이 늘어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강병현은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다소 투박하다.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슈팅이 매우 좋다던가 어시스트가 날카롭다던가 그런 유형은 아니다. 운동능력과 활동량을 바탕으로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공수 여기저기서 공헌하는 유형이다. 하지만 부상이 반복되자 특유의 운동능력이 감소하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어정쩡한 포지션에 놓이고 말았다. KCC 이후 뛰었던 팀들과의 궁합, 활용성 등에서도 서로 맞지 않았다는 평가다.


결과적으로 강병현은 적지 않은 기간 동안 현역으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누적기록을 두툼하게 쌓아놓지 못했으며 어느 한 분야에서 확실한 족적을 남기는데도 실패했다. 하지만 KCC 시절의 화려했던 5시즌은 두고두고 농구 역사에서 회자 될 것이 분명하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유용우 기자,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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