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의 철학을 코트 위에 보이고 싶다" 창원 LG 조성원 감독

점프볼 편집부 / 기사승인 : 2021-05-11 1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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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편집부] 창원 LG 조성원 감독은 KBL 첫 감독 시즌을 몹시 아프게 보냈다. 빠르고 화려한 ‘공격농구’를 표방하며 LG 지휘봉을 잡았으나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조성원 감독은 실패한 시즌을 뒤로 하고 다음 시즌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사실 그의 인생은 매순간 도전으로 이어져왔다. 늘 탄탄대로를 걷지 못했다. 그렇다고 포기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목표로 한 바를 이뤄냈다. 그가 어떤 그림을 그릴지 벌써 다음 시즌이 기다려진다. <점프볼>기자들이 ‘작지만 큰 남자’ 조성원 감독을 만나고 왔다.

 

※ 본 인터뷰는 점프볼 5월 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우리는 캥거루 슈터를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조성원 감독은 비교적 늦은 중학교 3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다. 어렵게 진학한 홍대부고에서는 농구를 그만두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이 때 조성원 감독이 농구를 그만뒀다면 프로농구 코트를 뒤집었던 ‘캥거루 슈터’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성원 감독은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독한 마음을 먹고 시작한 농구는 그의 인생을 바꿨고 결국 KBL 최고의 슈터로 올라섰다.

서호민_비교적 늦은 시기에 농구를 시작했다. 키도 많이 작았다. 모두가 회의적으로 바라봤을 정도로 큰 기대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중학교에서 농구를 할 때는 동기가 8명이었다. 처음에는 배재고에 가려했다. 근데 배재고가 워낙 운동부가 많은 학교라 8명 중에 4명만 진학할 수 있었다. 결국 배재고는 갈 수 없었고 잘하는 동기들과 홍대부고에 따라붙어서 갔다. 그때는 그런 게 많았으니까(웃음). 근데 1학년 때 김진수 선생님이 농구를 하지 말라고 하더라.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해서 간신히 학교에 남을 수 있었다.

민준구_개인 연습이 굉장히 혹독했다고 들었다.
보통 선수들이 농구를 처음 시작하는 시기가 초등학교 5학년 정도일 것이다. 빠르면 4학년에 하기도 한다. 근데 나는 남들보다 4~5년은 늦었다. 그래서 시간 투자를 할 수밖에 없었다. 홍대부고에 체육관이 없다보니 오후에 한 번 정도만 훈련했다. 새벽, 오전, 그리고 오후 일찍, 야간, 새벽 등 계속 몸을 만들었다. 1년이 지났고 2학년 때부터 경기를 뛸 수 있었다.

민준구_조 감독에게 김진수 선생님은 어떤 존재인가.
너무 감사한 분이다. 처음에는 그만두라고 했지만 결국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무진, 이상윤과 같이 시간을 맞춰 찾아뵙기도 했다. 현대에서 우승할 때는 엄청 기뻐하셨다. 만약 그분이 없었다면 난 절대 선수로서 성공할 수 없었다.

김용호_고등학교 3학년 시절 기량으로는 연세대, 고려대도 충분히 갈 수 있지 않았나. 명지대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보통 연세대와 고려대는 고등학교 1, 2학년 선수들을 미리 점찍어 놓는다. 그리고 한 해에 5~6명의 선수들을 입학시킬 수 있다면 보통 1명 정도만 미리 선택하지 않는다. 갑자기 성장하는 선수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사실 나는 결정권이 없었다. 부모님과 김진수 선생님이 많이 고민하셨다. 원래는 홍익대에 농구부가 있어 우리 동기들까지 모두 9명을 받아준다고 했다. 근데 체육과가 없어서 미술대학으로 가라 하더라(웃음).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무리 운동 선수라고 해도 말이다. 연세대와 고려대에선 나 혼자 오기를 바랐다. 근데 내가 홍대부고로 올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학 입학 시기가 되어 외면할 수 없었다. 그때 명지대에서 관심을 보여줬고 체육과도 있었으니 미래를 생각할 수 있었다. 사실 아버지가 연세대 출신이어서 연세대에 가고 싶기는 했다. 하하. 다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출전 기회를 잡고 성장할 수 있었던 명지대 진학이 적절한 선택이었다. 

서호민_이상민, 추승균은 어떤 존재인가.
굉장히 친한 친구다. 같이 뛰었을 때 편안하다는 느낌을 처음 준 선수들이다. 물론 다른 팀에서 뛰었을 때도 사이는 좋았지만 같은 유니폼을 입고 코트를 누볐을 때 더 행복했다. 우승도 해봤고 마음도 잘 맞았다.

민준구_올해 1월 1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셋이 한 자리에 모였다. LG와 삼성 감독, 그리고 KBL 대표 해설위원으로 말이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내가 해설할 때 (추)승균이가 KCC, (이)상민이가 삼성 감독으로 있었다. 서로 위치만 바뀐 채 다시 만났다. 그 때는 아마 전주였을 것이다. 우리 셋이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는 것에 기쁘다.

김용호_현역 선수 시절, 짝발 스텝을 활용한 3점슛은 트레이드 마크였다. 알고도 막을 수 었던 그 슈팅 자세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굉장히 단순하다. 그때는 슈팅 자세를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계속 던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한 선배가 그런 식으로 슈팅을 던지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됐다. 그 형이 알려준 대로 연습했는데 그게 은퇴할 때까지 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민준구_혹시 짝발 스텝을 다른 선수들에게 지도한 적이 있을까.
그런 적은 없다. 슈팅 자세는 보통 초등학교, 그리고 중학교 때 갖춰져야 한다. 이미 자신만의 자세가 있는 성인 선수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다 보면 망치게 된다. 슈팅 스텝을 바꾸는 건 3년 이상 걸린다. 1년, 1년이 경쟁인 프로에서 3년이란 시간을 배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야구는 정적인 스포츠이기 때문에 자세 교정이 가능할 수도 있다. 다만 농구는 야구와 달라 쉴 새 없이 뛰어다녀야 하는 스포츠인 만큼 작은 변화가 큰 변화가 될 수 있다. 부정적으로 말이다.

서호민_조니 맥도웰, 에릭 이버츠, 무스타파 호프, 찰스 민렌드 등 KBL 역대 최고의 외국선수들과 한솥밥을 먹었다. 그들과 추억을 이야기해달라.
맥도웰은 굉장히 친근하게 다가온 선수였다. 나랑 동갑이었다. 머리카락도 항상 내가 잘라줬다. 소주도 같이 먹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굉장히 친하게 지냈다. 다른 외국선수들은 연봉을 받으면 집에 보내거나 개인적인 일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맥도웰은 선수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등 거의 외국선수가 아닌 원래 함께했던 친구처럼 대해줬다. 예전에 방송을 통해 얼굴을 본 적이 있는데 살이 많이 쪘더라. 그리웠다. 그의 별명이 만두였는데 항상 정겹게 불렀던 기억이 있다. 이버츠는 많이 소심했다. 농구선수였던 아내의 영향이 컸을까. 아니다. 아내를 너무 사랑했다. 하하.

서호민_엄청난 주당으로도 유명하다. 지금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을 자주 마시는지 궁금하다.
지금도 그렇다. 선수들한테 한 이야기가 있다. 나는 원래 지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다. 수원대, 그리고 명지대, LG에 올 때까지 지는 게임이 많으면 화가 많이 난다. 하지만 코트에서 풀 수는 없다. 그걸 선수들에게 풀지 않고 술을 먹으면서 털어낸다. 연습 때나 경기 때 선수들에게 화를 낸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스타일을 바꾸기는 어렵다. 선수들도 그 부분을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그런 선수도 없다. 지금 스타일을 바꾸면 내가 죽을 것 같다. 덕분에 살이 많이 쪘다. 4~5kg 정도?

민준구 영원한 현대맨일 줄 알았는데 결국 이적했다.
실업 시절 때 원래 삼성으로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문경은 감독이 현대였을 것이다. 근데 삼성과 현대 모두 문경은 감독을 잡으려고 엄청 노력했고 결국 삼성을 가게 됐다. 나는 기아와 현대에서 제의가 왔는데 이왕이면 더 큰 기업에 가고 싶었다. 이후 LG에 갔을 때는 싼값에 데려가서 비싼 돈 주고 판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LG로 이적할 때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운동하고 있는데 나를 부르더라. 트레이드 이야기였다. 어디를 가고 싶냐고 물었고 두 팀 빼고는 다 괜찮다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속상했다. 그리고 분했다. LG로 갈 때 현대를 만나면 절대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루틴을 다시 시작했다. 그만큼 화가 많이 났다.

김용호_공격 농구를 추구하는 김태환 감독과 시너지 효과는 대단했다.
내가 생각해도 상당히 좋았다. 김태환 감독님이 굉장히 무서운 분인데 송영진, 황진원 같이 어린 선수들은 맨날 혼났다. 옆에서 볼 때마다 미안해서 술을 많이 사줬다. LG에서 농구는 정말 재밌었다. 조우현, 이버츠, 이정래, 그리고 (오)성식이 형까지 있었다. 성식이 형이 정말 많이 양보했다. 자기도 공격을 잘하는데 동료들을 위해 희생했다.

서호민_LG에서 생활은 행복했나.
현대에 있을 때 창원만 가면 너무 무서웠다. 일단 팬들이 엄청 드세다(웃음). 물건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고 버스 배기통에 바나나를 넣어놔서 도로 위에 잠시 선 적도 있었다. 버스 유리가 깨지는 건 일반적인 일이었다. 근데 그런 팬들이 내 편이 됐을 때는 너무 든든했다.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나만 지켜봤다. 처음 현대에서 우승했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LG에선 관중석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잘 보일 정도로 시야가 트였다. 선수로서 최고의 기량을 뽐내던 시기이기도 했다.

김용호_좋았던 LG 시절은 짧았다. 금세 이적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무릎이 좋지 않았다. 병원에 갔더니 수술하라고 하더라. 의사가 수술하고 5년 뛸지, 재활만 하고 1년 후 은퇴할지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계단도 혼자 못 올라갈 정도로 아팠고 경기 때는 테이핑을 무릎부터 발목까지 했다. 그래서 이적하게 된 것이다. 근데 SK에 가서 많이 괜찮아졌다. 그렇게 5년을 뛰고 은퇴했다.

민준구_돌고 돌아 친정에서 은퇴했다. 좋은 감정으로 간 것은 아닐 텐데.
신선우 감독님이 계실 때였다. 예전 일들을 다 잊고 다시 잘해보자고 하더라. 시간이 지나니까 괜찮아졌다. 재밌게 운동하다가 우승도 했다. 마지막이 즐거웠다.

김용호_KCC에선 선발이 아닌 벤치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을 것 같다.
느낌이 달랐다. 벤치에 오래 앉아 있는 게 너무 싫었다. 또 벤치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은퇴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은퇴하게 된 것이다. 지금 와서 후회하는 건 나와 같은 베테랑이 벤치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강)병현이, (조)성민이한테 종종 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코트 위에서도 선배가 필요하지만 벤치에서도 선배가 필요하다. 이번 시즌에 병현이와 성민이가 그 부분을 잘해줬다.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팀분위기가 좋아졌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김용호_현대-KCC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영구결번되지 못한 아쉬움은 없나.
전혀 없다. 내가 잘못해서 은퇴한 것이다. 원래는 1년 더 뛸 계획이었다. 근데 음주운전에 걸려버렸다. 팀에 미리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너무 미안해서 숨기고 말았다. 허재 감독님도 지금이 은퇴할 시기인 것 같다고 하더라. 그래서 은퇴하게 됐다. 내가 영구결번되는 건 무리가 있다.

민준구_캥거루 슈터라는 별명으로 코트를 누볐다. 자신에게 붙여진 별명은 마음에 들었나.
내 특징을 아주 잘 살린 별명인 것 같다. 승균이는 소리 없이 강한 남자, 상민이는 컴퓨터 가드 아닌가(웃음). 신기성은 총알탄 사나이라고 하더라. 아쉬운 건 지금 선수들에게 별명이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특징이 없어졌다. 성민이는 조선의 슈터라고 불리던데 진짜 조선의 슈터는 정해원이다. 조선대를 나왔으니까. 하하.

김용호_KBL에서 9시즌을 뛰며 통산 테크니컬 파울 6회, 언스포츠맨라이크 파울 0회다. 이 정도면 코트 위의 신사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모범상을 받았다. 심판들이 주는 상인데 나를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파울 콜을 부르면 무조건 손을 다 드니까. 항의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처음에는 화도 많이 냈다. 근데 그게 선수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더라. 대신 겉으로 말고 몰래 분노를 표출한 적은 많다. 맥도웰과 승균이는 순진해서 상대 선수가 괴롭히면 마음 속에 담아두고만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복수해준 적이 많다.

 

프로-대학-프로, 돌고도는 지도자 인생

보통 프로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이들은 프로에 계속 머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조성원 감독과 같은 스타플레이어 출신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는 머나먼 길을 계속 돌고 돌았다. 수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긴 시간 동안 자신만의 농구 철학을 세웠다. 그렇게 그는 강한 성격의 지도자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농구에서 이례적인 덕장 이미지를 만들었다.

서호민 일찍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지만 순탄하지는 않았다. 결국 대학을 돌아 다시 프로에 입성했다.
처음 여자농구 팀을 맡았을 때는 우려했던 선배들이 많았다. 지도자가 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이다. 현대에서는 1년 계약이 남아있으니 그 돈으로 유학을 다녀오라고도 했다. 하지만 배울 거면 일찍 배우자는 생각이 더 컸다. 또 내가 실패하더라도 어디서든 찾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결국 야인 생활이 길어졌고 대학원을 다니다가 수원대 감독으로 가게 됐다. 박봉이었지만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김용호_수원대 감독 시절, 마지막 경기 때 선수들이 눈물을 보였다. 그만큼 선수들에게는 훌륭한 지도자라는 뜻이 아닐까.
여자 선수들은 마음이 여려서 많이 운다. 그 친구들과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실 수원대는 프로에서 지명되지 못한 선수들이 많이 오는 곳이었다. 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야단을 치고 혼내는 것보다는 일단 농구에 대한 의지를 만들어주는 게 중요했다. 모든 행사에 다 참여해도 좋다고 했다. 축제 때는 자기들이 남자들을 다 꼬실 수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12시에 나가볼 테니 한 번 보자고 했다. 막상 나가보니 자기들끼리 앉아 있었다. 하하. 또 체육과 조교를 굉장히 무서워해서 금요일마다 같이 농구를 시켜봤다. 며칠 지나고 나니 친해져 있더라. 학점 관리까지 해주는 관계가 됐다. 주말이 되면 숙소에 남아있는 아이들과 게임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수원대는 오고 싶은 대학이 됐다.

서호민_명지대 시절에도 다사다난했다. 수원대와는 다른 의미에서 문제가 많았다.
농구선수가 농구를 싫어하더라. 분위기 자체도 너무 안 좋았다. 일대일 상담을 자주했다. 개인 면담을 통해 “너 졸업하고 학교에 올 수는 있겠니”라고 물으면 모두가 “오기 싫습니다”라고 답하더라. 그래서 농구에 대한 열정이 있는 선수들만 투입했다. 고학년 선수들이 보통 의지가 없었다. 그래서 저학년 위주의 게임을 했고 그렇게 분위기를 바꿨다. 몇몇 선수를 제외하면 고학년들도 정신을 차렸다. 명지대가 강해지려면 좋은 선수들이 오고 싶은 학교가 되어야 한다. 내가 감독일 때는 성적도 중요하지만 그 부분에 대한 변화를 가장 크게 생각했다. 다행히 좋은 결과가 이어지고 있다.

민준구_본인의 재학 시절, 그리고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명지대는 대학농구의 다크호스였다. 그러나 현재는 대학농구리그 출범 이후 단 한 번의 플레이오프 경험이 없는 약체가 됐다. 모교 선배로서, 그리고 한때 지도자였던 사람으로서 아쉬움이 클 것 같다.

그렇다. 일단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선 선수 구성이 중요하다. 지도자가 좋고 나쁨을 떠나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선수 구성이다. 또 하나는 바로 학부모와 만나지 않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부모님들이 학교를 찾아와 “뭐 필요하세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처음 명지대에 갔을 때도 냉장고에 음료수를 채워야 한다며 연락이 왔다. 내가 필요한 건 직접 사먹겠다고 연락했다. 학부모들을 만나는 일도 1년에 1번, 신입생이 들어올 때다. 나도 학부모 입장이지만 이상한 부분이다.

민준구_친정이라 할 수 있는 LG로 돌아왔다. 이전에도 LG 감독이 될 수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다. 

(현)주엽이가 감독이 되기 전에도 (제안이)왔고 이번까지 두 번째다. 내가 생각하고 또 하려는 농구를 부족함 없이 설명했다. LG에서 원한다고 했을 때 부담도 있었지만 기대가 더 컸다.

김용호_공격농구를 지향했지만 생각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성적에 대한 책임은 모두 내가 져야 한다. 그러나 분위기를 많이 바꿨다. 그 부분이 가장 큰 수확이다. 고참 선수들이 제 역할을 잘해줬고 또 선수들끼리 모여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중요한 건 부상 선수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1, 2라운드를 괜찮게 끝냈는데 이후 캐디(라렌), (서)민수, (박)정현이 등 주축 선수들이 모두 다쳤다. 그러다 보니 수비를 하다가 힘이 빠져 공격을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단신 가드가 많은 팀이기에 스피드는 자신이 있었지만 마무리가 안 되더라. 그 부분이 패착이었다. 

서호민_후반 라운드부터는 신인선수들은 물론 D-리그 멤버들을 중용했다. 이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D-리그 멤버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중참 선수들이었다. 연령차가 큰 우 리 팀에서 중간 선수들이 해줘야 할 역할이 많았다. (정)해원이는 기회를 달라고 했다. KCC 전이었을 텐데 이정현을 막아야 한다고 했더니 죽기 살기로 하겠다고 하더라. 우리는 잘하는 선수보다 열심히 하는 선수가 필요하다. 대표적인 예로 (이)광진이가 정말 신나게 농구를 했다. 또 시즌 최종전에선 (김)영현이가 기회를 얻었다. 많이 활약한 건 아니지만 코치들이 알려준 대로 왼손으로 득점하더라. 그리고 트레이드되어 온 (이)관희도 단신 가드만 즐비한 우리 팀에 중요한 역할을 해줬다.

김용호_감독 취임식 때는 FA 추가 영입이 없다고 했다. 지금은 어떤가. 

시즌 초반에 트레이드 제의가 많았다. 다 거절했다. 그만큼 지금 선수들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관심 많다(웃음). 이관희한테는 지구 끝까지 쫓아간다고 했다. 물론 내가 돈을 주는 건 아니지만. 하하.

김용호_선수들을 크게 야단치지 않는 지도자다. 또 판정에 대한 항의도 적다. 원래 온화한 성격인가.
처음에는 화도 많이 내봤지만 머리가 아프더라. 또 화를 낸다고 선수들이 잘하면 계속 화를 내게 된다. 단순한 방법보다는 어떻게 해야 나를 이해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말도 크게 하는 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들이 내 말을 들으려면 가까이 와야 한다. 매번 격려해주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농구를 정말 잘하는 선수, 득점이나 화려한 것을 할 수 있는 선수는 한 팀에 1~2명이면 된다. 남은 선수들은 벤치에서 원하는 걸 실행해줄 수 있어야 한다. 오로지 화만 낸다면 절대 좋은 팀이 될수 없다.

민준구_더욱 강해질 다음 시즌의 LG, 누구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나.
(이)광진이가 아닐까. 그 친구도 농구를 정말 늦게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했을 것이다. 신체조건도 좋고 슈팅력도 괜찮다. 예전의 양경민을 보는 것 같다. 몸도 참 건강하다. (윤)원상이는 운동 좀 그만하라고 할 정도로 독한 친구다. 근데 너무 급하다. 서두르는 것과 빠른 건 큰 차이가 있다. 그런 부분을 조금 바꾸면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다.

김용호_감독으로서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 남은 기간 동안 LG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있을까.
10년 정도는 이 팀에서 머무르고 싶다. 그 시간이라면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또 인정받고 싶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농구 철학을 코트 위에 부족함 없이 보이고 싶다. 나는 늙어가지만 선수들은 계속 젊어진다. 그렇기에 가능한 일이다. LG는 정말 빠르고 강한 팀, 그리고 재밌는 농구를 하는 팀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또 선수들이 은퇴하더라도 LG에서 한 번은 뛰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싶다.

 

#인터뷰_민준구, 김용호, 서호민 기자

#정리_민준구 기자

#사진_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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