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러닝 타임 20초

기자 / 기사승인 : 2022-01-16 23:5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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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⑥

 

▲1955년 10월 대만의 극난 팀이 내한하여 육군체육관에서 국내 유수의 팀과 친선경기를 했다. 대한뉴스 화면 캡처. 

김영기의 이름이 1955년 12월 언론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동아일보의 12월 6일자 3면, 경향신문과 조선일보의 7일자 3면이다. 대한농구협회가 1956년 1월 자유중국(대만)에서 중화체육촉진회 주최로 열리는 극동농구리그에 참가할 농구대표선수단을 발표했는데, 김영기가 포함되었다. 이 대표 팀은 전원 대학생으로 구성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대만에 보낼 대표 팀을 구성하는데 대한농구협회와 대한체육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한농구협회는 당초 전국종합농구선수권대회 우승팀 산업은행을 주축으로 원정선수를 결정했다. 그런데 이 선수단 명단을 놓고 대한체육회를 중심으로 한 체육계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12월 1일자 3면에 “대한체육계를 위시한 체육계 방면에서는 과거 일 년 간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저조 침체한 농구계의 현상에 비추어 또다시 노쇠기에 들어간 선수를 기용하는 것보다 앞날이 촉망되는 학생선발 팀을 파견하자는 요망이 높아가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1차 선발된 선수 명단은 이랬다.

▲코치=방원순 ▲심판=신재숙 ▲선수=안병석 황태석 고세태 안영식 김성태(이상 산업은행) 김영수 서한균(부산지검) 조내성 윤명현(공군) 조병현(연세대)

언론이 사태를 주목했다. 조선일보는 이 의견대립이 스포츠계에 물의를 일으켰으며 12월 3일 오후3시부터 무려 4시간에 걸친 회합 끝에 기존의 대표선수단을 백지화하는 한편 전도양양한 학생선수들을 파견하기로 했다고 보도하였다. 동아일보는 승산 없는 대회에 일반 팀을 내보내기보다는 학생 팀을 견학차 파견하여 앞날의 발전을 꾀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주요 신문이 보도한 선수명단은 다음과 같다.

▲단장=미정 ▲코치=방원순 ▲심판=신재숙 ▲선수=조병현(포워드) 최태곤(가드) 백남정(센터) 박남희(포워드, 이상 연세대) ▲이보영(포워드) 손정채(가드) 김영기(포워드, 이상 고려대) 강병건(가드) 김춘배(포워드) 김동하(센터, 이상 홍익대) 박순동(포워드, 신흥대) ▲후보=강우성 염철호(이상 홍익대) 최무환(연세대)

우리 선수단은 1955년 12월 31일 오후2시30분 대만의 민항공운공사(民航空運公司, Civil Air Transport·CAT) 항공편으로 여의도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돌아온 날은 1956년 1월 12일, 오후1시30분이었다. 항공편은 이번에도 CAT항공이었다. 1월 2일부터 6일까지 열린 극동농구리그는 한·중·비3국친선농구전(韓中比3國親善籠球戰)으로 『한국농구80년사』에 기록되었다. 대회는 한국과 중국(자유중국 즉 대만), 필리핀이 참가해 한 팀과 두 번씩 경기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대만에서는 극난(克難), 필리핀에서는 산 미겔 팀이 참가했다. 우리 선수단은 극난에 64-72, 63-65로, 산 미겔에 57-59, 46-62로 져서 4전 전패를 기록했다. 그래도 소득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전적에 비해 경기 내용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 적었듯이 이 당시 대만과 필리핀의 농구는 매우 강했다.

대만의 극난 팀은 김영기에게 잊지 못할 기억 한 조각을 선물한 팀이다. 극난은 1955년 10월 1일 ‘한중친선농구경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여의도공항을 통해 한국을 방문했다. 경기는 2일부터 10일까지 육군체육관에서 열렸다. 육군체육관은 훗날 거대한 돔으로 덮인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체육관인 장충체육관으로 고쳐 짓게 되는데, 이때는 지붕이 없는 노천 코트였다. 극난 팀은 우리나라의 국군, 해병대, 산업은행 등과 경기를 벌여 전승을 거두었다. 김영기는 이때의 일을 『갈채와의 밀어』에 의미 있게 기록했다.

그는 “(극난 팀과의 경기는) 내가 가장 짧은 동안을 뛴 경기로 기억에 새롭다. 내내 후보 선수로 벤치에 앉아 있다가 타임아웃 20초 전에 출장하여 게임을 끝낸 경험을 이 경기에서 얻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존 번을 언급한다. “나의 체격과 체력이 약하다는 번 씨의 평가가 그만 20초 선수로 만든 것이다. 이 경기의 중요한 패인은 재래식 한국 농구에 두 달 동안 배운 번 식 농구가 짬뽕이 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라면서, “언제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이라는 것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가 보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여러 면에서 김영기는 생각이 많고 원인과 결과를 헤아리는 선수였다.

존 번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적을 필요가 있다. 존 번, 내트 홀맨, 찰리 마콘, 제프 고스폴은 우리 농구 역사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고, 이 가운데 존 번은 제일 먼저 언급되는 이름이다. 김영기가 첫 원정에 나선 한·중·비3국친선농구전의 내용과 더불어 존 번의 코칭 내용을 살펴보겠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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