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김영기 作, 『갈채와의 밀어』를 위한 프롤로그

기자 / 기사승인 : 2021-12-22 16:3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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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①
▲김영기 전 KBL 총재

9월 24일에 유재학을 주제로 글을 쓴 뒤 오랫동안 「농담」을 하지 못했다. 핑계거리는 딱히 없다. 내가 몸담은 한국체육대학교도 코로나 위기로부터 자유롭지 않아서, 독자 여러분께 무언가를 말하기에 앞서 내 학생들에게 집중해야 했다. 가을이 지났고 이제 겨울이다. 아직 매서운 추위를 맛보지는 못했다. 영하 10도 이하로 곤두박질한 기온이 며칠씩 계속되는 그런 추위. 내가 자랄 때는 영하 18도, 19도에 이르러 휴교령이 내리는 겨울이 적지 않았다. 나는 추운 겨울을 좋아한다.


대학은 학기를 마쳤다. 학생들은 방학을 맞았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니 그들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젊음을 발산하는 일은 반드시 ‘멋대로 행동’을 뜻하지는 않는다. ‘네 멋대로 해라’ 같은 말을 지성이 결여된 인간이 하면 양아치의 넋두리가 된다. 사실 ‘네 멋대로 해라’는 프랑스 영화의 제목이다. À bout de souffle. 장뤼크 고다르 감독, 장-폴 벨몽도 주연으로 1960년에 개봉했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고다르 이전의 영화와 고다르 이후의 영화가 존재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영화사상 중요한 영화다.

우리 농구 역사를 돌아볼 때, 시대를 가르는 한 사람을 고른다면 누가 될까? KBS의 정재용 기자가 손꼽은, “농구의 역사를 영원히 바꿔놓은 인물” 마이클 조던처럼. 여자농구라면 쉬운 문제다. 박신자 여사가 정답이다. 박 여사는 100년이 넘는 한국 농구 역사상 남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선수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박 여사가 있었기에 우리 여자 농구가 세계수준에서 경쟁할 수 있었다. 박 여사의 유산은 우리 농구계에 선명하게 남아 숨을 쉰다. 2015년 7월부터 여사의 이름을 딴 ‘박신자컵 서머리그’가 열리고 있다.

박신자 여사의 현역 시절 포지션은 센터였다. 신장 176㎝. 장신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농구는 거대했다. 최고의 업적은 한국을 최초로 국제대회 결승으로 이끈 1967년 제5회 세계선수권대회(체코)이다. 한국은 소련에 이어 준우승했다. 당시 한국 팀의 평균 신장은 168㎝. 이 키로 평균 신장 190㎝를 넘는 동유럽 팀들을 제압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유고슬라비아…. 경기당 19.2득점을 기록한 박 여사는 대회 최우수선수(MVP)가 됐다. 준우승 팀 소속의 MVP는 당시에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국제농구연맹(FIBA)은 “한국이 세계선수권대회 역사상 처음으로 시상대에 오른 아시아 국가가 되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고 기록했다.

1967년 도쿄유니버시아드 우승도 우리 농구 역사에 빛나는 성과다. 유니버시아드는 비록 대학생의 대회지만 대단한 의미가 있다. 우리 농구가 세계 최고를 의식하면서 도전하고 성취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선수권 준우승 멤버를 모두 보내 일본을 누르고 우승했다. 박신자 여사는 4경기에서 111점을 넣어 득점왕이 됐다. 여사는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당시 나이 26세, 요즘 기준으로는 너무 이른 은퇴였다. 1967년 11월 2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경기가 열렸다. 평일임에도 농구팬 7000여 명이 모여들어 슈퍼스타와 작별했다.

남자농구에서 박신자 여사에 비견할 선수는 누구인가. 저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눈부신 농구를 한 선배들이 계신다. 농구가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종목이 된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는 이성구, 염은현, 장이진 등 조선 청년들이 일장기를 달고 출전했다. 이들은 제국주의 일본 농구의 넘버 1~3은 아니었던 것 같다. 베를린올림픽 운영기록을 보면 이들이 주전선수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성구는 일본이 출전한 세 경기 중 두 경기, 장이진은 한 경기에 나갔고 염은현은 출전기록이 없다.

시간의 수레바퀴를 빠르게 돌려 보자. 농구대잔치 시대의 ‘슛도사’ 이충희, ‘농구천재’ 허재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충희는 그 강렬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통산득점 기록에서 ‘전자슈터’ 김현준에게 추월당했다. 허재의 재능은 시대를 초월할 정도였지만 국제무대에서 대표 팀에 미친 영향은 1982년 뉴델리 우승의 주역 신선우에 미치지 못한다. 중국과의 결승전 필름을 들여다보면 한국을 우승으로 이끈 리더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신선우는 공격과 수비를 지휘했고, 경기를 설계한 방열 감독의 기대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과 리더십, 코트 장악력을 발휘한 그에게도 슛이 부정확한 약점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1969년과 1970년 잇달아 아시아 무대를 평정한 멤버 가운데에서 골라야 할 것만 같다. 나는 김인건-유희형-이인표-신동파-김영일로 이어지는 대표 팀의 베스트5를 광복 이후 우리 농구의 제1차 황금세대로 본다. 1970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득점왕에 오른 신동파가 핵심이다. 제2차 황금세대는 박수교-신동찬-이충희-임정명-신선우의 1982년 아시안게임 우승멤버다. 여기 박인규, 이문규, 이민현, 김현준 등을 보탤 수 있다. 제3차 황금세대는 ‘글쎄’다. 이상민, 문경은, 현주엽, 서장훈, 전희철 같은 걸출한 선수들이 출현했지만 어느 대회의 어느 트로피를 이들의 업적으로 꼽아야 할지 모르겠다. 2002년 부산에서 거둔 승리는 이들의 다음 세대라고 해야 할 김승현 없이 이해하기 어려운 업적이다.

사설이 길어졌다. 나는 답안지에 ‘김영기’라고 쓰겠다. 나는 김영기를 빼놓고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남자농구를 설명할 수 없다. 배재고와 고려대를 졸업한 그는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1956년 멜버른올림픽과 1964년 도쿄올림픽에 참가했다. 은퇴한 뒤에는 지도자가 되어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과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남자 농구대표팀을 이끌었다. 체육행정가로도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여 1984년 LA올림픽 한국선수단 총감독,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프로농구 출범의 주역으로서 한국농구연맹(KBL)의 초대 전무이사와 부총재를 거쳤고, KBL 총재로도 일했다.

나는 젊은 기자일 때 김영기가 쓴 『갈채와의 밀어』를 읽었다. 여러 농구인들이 이 책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내용이 궁금했다. 신동파, 이인표, 김인건, 박한 같은 우리 농구의 레전드들이 나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갈채와의 밀어』는 누가 대신 써준 책이 아니다. 김영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써내려간 책이다. 젊은 날 김영기의 모습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가 활동할 무렵 우리 농구의 프로필을 짐작하게 해준다. 독자 여러분과 함께 이 책을 다시 읽고 싶다. 김영기의 필치에 주목하면서, 해설을 곁들여 읽음으로써 긴 겨울날의 길동무로 삼고자 한다. 오늘 한 이야기는 프롤로그라고 해 두자.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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