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하이카라' 美男의 사인

기자 / 기사승인 : 2021-12-25 16: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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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②

“고다르 이전의 영화와 고다르 이후의 영화가 존재한다.”는 프랑수아 트뤼포 식으로 말한다면, “김영기 이전의 농구와 김영기 이후의 농구가 존재한다.” 물론 이 말이 김영기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경기를 한 (또는 그럴 능력이 있는) 선수였다는 선언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시대를 가로질러 종합격투기의 ‘파운드 포 파운드(P4P) 랭킹’과 같은 비교를 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로키 마르시아노와 무하마드 알리가 한 링에서 주먹을 섞었다면?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가 같은 피치에서 경쟁했다면? 힉슨 그레이시가 요즘의 옥타곤에서 경기를 했다면? 하지만 나는 그런 방식으로 비교해서 승자를 가려내는 일에 흥미가 없다. 그런 노력의 의미를 그다지 크게 보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방식을 살짝 비틀어 보자. 우리는 복싱의 슈거 레이 로빈슨이나 축구의 프란츠 베켄바워, 야구의 베이브 루스와 같은 인물들에게서 역사적 의미를 발견해낼 수 있다. 김영기는 그 자체로서 위대할 뿐 아니라 역사적 맥락에서 더욱 위대하다. 한국 축구에서 차범근 이전에 이회택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듯이 신동파와 신선우와 이충희와 허재, 그리고 그 이후 ‘마지막 승부’ 세대의 청춘스타들을 말하기 이전에 김영기를 깨달아야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시대의 경계’가 되는 존재는 이런 의미이다. 나는 지난 회에 우리 여자농구의 전설 박신자 여사를 예로 듦으로써 모든 것을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자 임병철이 말한 ‘최초의 르네상스인’ 페트라르카와 같은 존재.

『갈채와의 밀어』를 발간한 원문각 출판사에서는 조선일보 1966년 10월 25일자 1면 왼쪽 아래에 꽤 큼직한 광고를 게재하였다. 광고 문구가 아주 재미있다. 일단 느낌표(!)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國寶的 存在!’, ‘東洋의 톱 플레이어 金永基 選手의 13년 간의 告白的 回顧錄!’, ‘靑春白書!’, ‘사랑과 눈물과 스릴이 躍動하는 赤裸裸한 告白!’, ‘甘美로운 휴모(유머)와 윗트!’, ‘最高의 선물!’…. 부제에도 느낌표가 들어갔다. ‘籠球여 安寧!’ 흔히 카피(copy)라고 부르는 광고 문구를 보자. “密度 짙은 文章으로 描破한 스포츠·靑春·人生의 格調 높은 에세이集!” 특이하게도 책을 알리는 광고인데 책이 아니라 김영기의 사진을 넣었다. 1960년대 공무원이나 은행원들의 헤어스타일인 ‘하이카라’ 머리를 한 김영기가 여성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옅은 미소에서 품위와 싱그러움이 함께 묻어난다. ‘저자의 말’에서는 겸손한 마음이 보인다.

“저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분들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부끄러운 책은 그 몇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심정에서 썼습니다. 이것뿐입니다. 이밖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갈채와의 밀어』는 1960년대에 나온 책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생동감이 넘친다. 글쓴이의 재능을 여러 곳에서 짐작할 수 있다. 경향신문 1999년 4월 12일자 31면에는 64세의 김영기가 소설을 쓰고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 김영기는 가제를 ‘용병(傭兵)’으로 정한 이 소설에서 “한국 프로농구 리그에서 뛰고 있는 용병(외국인 선수)들의 삶을 리얼하게 담을 예정”이라고 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 땅을 밟은 이후 겪은 국내선수와의 갈등, 그들의 사랑과 희망, 한국에서 경험한 여자관계를 빠뜨리지 않겠다고. 소설은 2000~2001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발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읽지 못했다. 출간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영기가 65세에 소설을 발표했다면 세상이 떠들썩했을 것이다. 대신 그는 KBL 총재로 일하던 2016년 동료 선후배들과 세상을 여행하며 겪은 이야기를 모아 『할배들의 무한질주』를 출간한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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