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바스켓볼,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

기자 / 기사승인 : 2021-12-30 11:4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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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③
▲『경향신문』 1964년 1월 8일자에 실린 김영기의 인터뷰.

우리 농구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농구팬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다. 관심은 대중적인 지식이나 상식으로 이어지고, 그 기반 위에서 ‘농구 문화’가 형성된다. 우리에게 농구 문화가 없지는 않고, 팬들의 농구지식도 간단치 않다. 학교에서 농구를 좋아하는 학생들과 대화하면 그들의 지식이 넓고 깊은 데 놀라기도 한다. 학생들의 지식은 미국농구 정보에 기초하고, 마니아라고 할 수 있는 학생들은 농구의 기술이나 작전에도 정통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농구의 과거에 대한 상식은 없거나 얕다. (나는 2013년에 방영된 한 농구 드라마의 PD가 “그 시절에 농구를 했던 사람이 있나, 농구가 존재했나 의아하게 생각했다.”는 말을 듣고 몹시 놀랐다.) 물론 우리 농구의 역사를 몰라도 농구를 즐기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래서 나도 불평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비판하고 싶지 않다. 농구를 좋아하면, 농구를 사랑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농구는 미국에서 비가 내리거나 추운 겨울에도 할 수 있는 구기 종목으로 고안된 운동 경기다. 1891년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국제 YMCA 체육학교에서 일하던 캐나다 출신의 교사 제임스 네이스미스가 창안하였다. 농구의 인기가 빠르게 고조된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이다. 우리나라에는 꽤 빨리 들어왔다. 1907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초대 총무인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소개했다. 농구가 발생한 뒤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이 땅에 들어온 것이다. 1916년 3월 25일 미국인 바이런 반하트가 기독청년회 간사로 부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보급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한국 농구 역사에 이름을 남긴 첫 실력자들은 이성구, 장이진, 염은현 등인데 이들의 명성이 널리 알려진 시기는 1936년 독일의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에 참가하는 일본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을 때다. 농구 경기는 베를린 올림픽대회 때부터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한국 남자농구 역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는 196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농구를 익혀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때는 농구라는 운동 자체가 민중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운동이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스포츠와 체육을 전문적이고 대중적으로 다루는 신문이나 방송 매체가 없던 시기였다. 자연히 스타 선수들의 활약을 미디어를 통해 감각적으로 상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스포츠의 대중화란 미디어의 발전과 무관할 수 없다. 특히 방송 매체에 의해 폭발적인 대중화가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하면 일제강점기나 광복 직후에 대중화된 스포츠 스타의 등장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에서 신문이 스포츠 내지 체육을 적극적으로 보도한 시기는 18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계몽적 수단으로서 신문이 보건위생과 체력증진이라는 목표에 초점을 맞춘 기사를 게재하는 경향이 강했다. 방송에 의한 스포츠 중계는 1927년 전조선 야구선수권대회를 중계한 것이 시초이며 최초의 농구 중계는 1939년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 1939년 7월 27일부터 3일 동안 캐나다 웨스턴 농구단이 한국을 방문해 연희, 보성전문과 경기를 할 때 경성방송에서 중계를 한 것이다(김원제). 이성구, 장이진, 염은현 등이 베를린올림픽에 나갔을 때, 이들의 소식은 『조선중앙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국내 언론 매체를 통하여 대중에 소개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얕은 수준에서일지언정 미디어의 세례를 받은 최초의 선수들이라고 할 수 있다. 농구선수들 외에 육상 마라톤 종목의 손기정과 남승용, 축구 종목의 김용식 등이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하였다.

광복 후에 출현한 김영기는 걸출한 기량을 지닌 선수로서 제3공화국 시기에 강력하게 시행된 체육정책에 영향을 받은 방송 매체들이 활발히 중계방송에 참여한 데 힘입어 전국적인 스타로 부각되었다. 김영기는 1956년부터 1965년까지 국가대표를 지냈고, 1969년부터 1974년까지 국가대표 코치와 감독을 지낸 성공한 농구인이다. 전례 없는 테크닉과 잘생긴 용모로 인기를 모은 그가 활약한 시기는 라디오로나마 경기 중계가 일반화되었을 때다. 그 시대를 산 세대라면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상하의 나라, 비율빈(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입니다.”로 시작되던 라디오 중계방송을 기억할 것이다. 또한 정부홍보시책으로 필름 영상물이 제작되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어 『대한뉴스』는 1964년 도쿄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남자농구 대표 팀의 경기내용을 영상물로 보도하면서 1964년 9월 25일 열린 쿠바와의 경기, 9월 27일에 열린 태국과의 경기 내용 및 결과를 전하였다.

당대 최고의 스타 선수로 우뚝했던 김영기의 바로 뒤 세대로 출현해 1960년대 후반 국가대표팀의 주축을 이루는 선수들이 김영일, 김인건, 이인표, 신동파, 유희형 등이다. 재능으로 충만한 이들은 김영기의 맹활약으로 인해 고조된 국민들의 농구에 대한 관심과 언론 매체의 활발한 보도 및 중계 문화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세대였다. 또한 존 번과 내트 홀맨, 찰리 마콘과 제프 고스폴로 이어지는 미국인 코치들에게 선진농구를 배우고 경기에 활용하면서 내면화한 그룹이기도 하다. 김영기는 선수로서 미국농구의 세례를 가장 먼저 받은 세대에 속한다. 광복 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선수들을 지도한 미국인 지도자는 미국 스프링필드대학 교수 겸 감독이었던 존 번이다. 그는 1955년 8월 내한해 3개월 동안 대학생 선수 30명을 지도하였다. 당시 선발된 선수로 김영기, 백남정, 염철호 등을 꼽을 수 있다. 김영기는 은퇴한 뒤 후배들이 학습한 미국식 농구를 변용하여 한국농구의 프로필을 완성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김영기는 존 번 코치와의 만남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특히 기술적인 면에서 선수의 자율적인 훈련과 새로운 동작에 대한 호기심을 고양하는 코칭 기법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김영기는 1964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 존 번 코치 밑에서 4개월 동안 연습한 게 오늘의 밑거름이 되었죠.”라고 술회하기도 하였다. 당시 우수학생으로 선발된 서른 명에 포함되어 존 번의 지도를 받은 염철호는 매우 상세히 지도 내용을 기억하였다. 그는 2010년 필자와 인터뷰할 때 “그때까지 배운 기계적인 일본식 농구 대신 미국식 농구를 배웠다. 난 그때 존 번 선생님한테서 배운 걸로 평생을 써먹었다.”고까지 말했다. 미국인 코치들이 우리 농구에 준 영향은 최근의 몇몇 학술논문과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내용과 역사적 의미, 현장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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